책소개
프란츠 브렌타노는 현대철학의 형성, 특히 현상학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다.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과 작용 심리학자인 카를 슈툼프 등이 바로 브렌타노의 제자들이다. 현대 철학사가인 볼프강 슈테크뮐러는 그를 현대철학의 분기점으로 삼았다.
브렌타노 철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철학의 무선입견성’이다. 이 말은 미래의 철학이 결코 “선조들의 판단에 의해 노예처럼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대철학이 베이컨이나 데카르트의 정신 안에서 맹목적으로 아프리오리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종래의 정신에 함몰되어 있는 철학을 브렌타노는 ‘선입견의 철학’이라 불렀다. 이에 대비되는 말이 (경험에 입각한) ‘학문적 철학’인데, 이러한 학문적 철학의 토대를 브렌타노는 새로운 심리학, 즉 ‘경험적 입장에서 본 기술심리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이 책은 기술심리학의 탐구와 분석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윤리학의 근본 원리에 관해 매우 훌륭한 논의를 펼친다.
브렌타노는 이 논문에서 윤리학도 궁극적으로 명증적 판단이나 통찰적 판단 같은 직접적인 기준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어떤 올바른 느낌, 선호, 의욕, 의무를 부과하는 규범에 관해 말하거나 법과 정의, 그 자체로 가치 충만한 것이나 선한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리지 않는 순간을 인간의 의식 속에 떠올림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브렌타노는 이 저술에서는 어떤 윤리 사상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삶 속에 들어 있는 도덕적 의식에서 시작해서 최종적인 경험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200자평
‘법과 도덕에 대한 자연적 제재’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정리해 발간한 책이다. 철학의 무선입견성을 강조하고 경험에 입각해 인간 의식의 요소들과 이 요소들을 결합하는 방식을 규정했다. 이 책은 후설과 마이농, 셸러와 하르트만의 연구에 도움을 주어 현대 가치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어로 처음 출간하는 브렌타노의 저작이다.
지은이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프란츠 브렌타노는 기술심리학 또는 지향성이론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1864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로 임명되었고, 1866년에는 철학 사강사(무임금 강사)가 되었으며, 1872년에는 뷔르츠부르크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교황의 무오류성의 교리(1870)로 인해 종교적 의심이 깊어진 그는 1873년에 교직과 사제직을 사직하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경험적 관점에서 본 심리학(Psychologie vom empirischen Standpunkte)≫(1874)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영혼과학이라 할 수 있는 체계적 심리학을 제시해 ‘내재적 객관성’에 대한 스콜라 철학이론을 현대화했다. 1874년에 브렌타노는 빈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895년까지 머무는 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중에서 지크문트 프로이트, 심리학자 카를 슈툼프,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현대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토마시 마사리크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옮긴이
이을상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정훈장교로 3년 근무했다(육군 중위 예편). 1993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아대, 부경대, 동의대, 동서대, 부산대, 신라대 등에서 강의했고, 동아대학교 석당연구원 전임연구원,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부산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윤리학 관련 연구와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1999년 새한철학회에서 수여한 제4회 만포학술상과 2015년 대한철학회에서 수여한 제4회 운제철학상을 수상했다.
차례
편집자 서문
1판 머리말
1. 법률에 대한 역사와 철학의 가치: 오스트리아에서 법학 개혁에 관한 새로운 제안
2. 우리의 주제: 빈 법률협회에서 행한 예링의 강연과의 관계
3. ‘자연법’이라는 표현의 이중적 의미
4. 예링과 일치하는 점: ‘자연법’과 ‘민족법’의 거부, 윤리 이전의 시대를 정치적으로 상정함
5. 예링과 대립하는 점: 자연적으로 인식되는 보편타당한 도덕법칙이 존재한다. 물음의 상대적 독립성
6. ‘자연적 제재’의 개념
7. 자연적 제재 개념을 철학자들이 오해한 부분
8. 습관적으로 발달해 온 감정적 충동 자체는 제재가 아니다
9. 희망과 공포라는 동기 자체도 아직 제재가 아니다
10. 더 높은 힘에 의해 의지가 명령된다는 생각도 자연적 제재가 아니다
11. 윤리적 제재는 논리적 법칙과 비슷한 명령이다
12. 미학적 관점. 그것은 논리학에서도, 윤리학에서도 옳은 것일 수 없다
13. 칸트의 정언명법은 활용할 수 없는 허구다
14. 심리학적 채비가 필요한 이유
15. 궁극 목적 없는 의욕은 없다
16. 어떤 목적이 올바른가는 윤리학의 주요 물음이다
17. 올바른 목적은 도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선의 것이다. 이 규정의 불분명함에 관하여
18. ‘선하다’는 개념의 기원에 관하여. 그것은 이른바 외적 지각의 영역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19. 모든 심리적인 것의 공통된 특징
20. 심리현상의 세 부류: 표상, 판단, 심정의 활동
21. 믿음과 부정, 사랑과 미움의 대립
22. 대립하는 심적 태도에서는 언제나 하나가 옳다면 다른 하나는 옳지 않다
23. 선의 개념
24. 좁은 의미의 선과 다른 것을 위해 선한 것의 구별
25. 사랑한다는 것이 언제나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26. 맹목적 판단과 통찰적 판단
27.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영역에서 판단과의 유추적 구별: 선한 것의 기준
28. 선의 다의성: 이와 결합된 물음들
29. ‘더 선한 것’이란 더 강렬하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이해될 수 있는가, 없는가?
30. 더 선하다는 개념의 올바른 규정
31.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선호된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 어떻게 아는가? 선악이 대립할 때인가, 어느 한쪽이 결여된 경우인가, 동일한 것에 덧붙여지는 경우인가?
32.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면
33. 쾌락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는가?
34. 어느 한쪽의 결여가 우리가 우려하는 것보다 훨씬 덜 나쁜 이유는?
35. 실천적 최고선의 영역
36. 모든 고귀한 소질들의 조화로운 발전
37. 법적 한계에 대한 자연적 제재
38. 실증적 도덕법칙에 대한 자연적 제재
39. 자연적 제재가 갖는 힘
40. 윤리적 규칙의 올바른 상대성과 잘못된 상대성
41. 기존하는 특수 규정들은 어떻게 도출되었는가
42. 왜 다른 철학자들도 길을 우회해서 우리와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가?
43. 일반적으로 만연해 있는 윤리적 진리는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자신의 의식 과정에 대한 불명료성
44. 개별적으로 언급된 요인들이 미친 영향들의 흔적
45. 영향력을 행사하는 저급한 흐름들
46. 윤리적 발전과 유사 윤리적 발전의 구별에 즈음하여 우리는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7. 윤리 이전 시대에 이미 발전해 온 유사 윤리적 가치: 사회적 질서의 확립, 소질의 형성, 입법자로서 윤리학을 위한 규칙의 입안, 천편일률적인 공식주의의 예방
48. 이 측면에서 계속 행사되는 영광스러운 영향들
49. 다시금 법적·정치적 연구의 개혁에 관하여
부록
I. 윤리 원칙의 선천적 특징에 관하여
II. 심정의 결단과 최고 도덕법칙의 형성에 관하여
III. 파생적 도덕법칙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
IV. 처벌 동기와 처벌 기준
V. 에피쿠로스와 전쟁
VI. 윤리에 대한 젊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공격
VII. 모든 부수적 존재의 제1원인이 갖는 도덕적 완전성에 관하여
VIII. 행복과 불행
IX. 사랑과 미움에 관하여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사상가들이 호감이 일어나는 방식을 오직 저급한 부류의 현상에서만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 저급한 부류의 호감과 비호감에만 주의하고, 더 높은 방식에서 나타나는 호감과 비호감에는 완전히 눈을 감아 버렸다. 예를 들어 흄이 한 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더 높은 부류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예감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6쪽
좋고 나쁨의 개념과 쾌적하고 불쾌한 것의 개념을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선과 쾌를 구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것’, ‘누군가에 대해 좋은 것’과 ‘그 자체로 쾌적한 것’, ‘누군가에 대해 쾌적한 것’을 구별했다. 쾌적하다는 말은 쾌락과 결부된 것이고, 우리가 쾌락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쾌적하다는 것과 어떤 사람이 하는 활동의 결합은 본래 합목적적으로 정돈된다. 그것은 마치 신체 기관에 정돈되어 있는 것과 같다.
-220~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