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려 중기의 피폐한 불교계를 혁신한 인물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불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것이 곧 정혜 결사 운동(定慧結社運動)이었다. 이를 통해 선교상쟁(禪敎相爭)을 불식하고 선(禪)에 의한 교(敎)의 흡수와 함께 새로운 선학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에게 계승되었으며, 혜심은 이를 다양한 양상으로 승화시켜 승려들에게는 물론 일반 재가신도에게까지 널리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제작된 것이 한국 선가의 요체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비롯한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무의자 시집(無衣子詩集)≫ 등의 저서다.
≪무의자 시집≫ 상·하권에는 각각 68수, 180수 총 248수의 시가 실려 있다. 이는 혜심의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실제 그 내용을 보더라도 법사로서 법을 전수할 때의 시법시(示法詩)·개오시(開悟詩)는 물론이거니와 아름다운 자연과 사찰의 정경 묘사, 차 끓이며 자적하는 산사 생활의 즐거움, 대·연(蓮)·귤 등의 자연물에 대한 감흥, 재가신도와 타 승려들과의 교유시, 그리고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읊은 인정시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혜심의 시에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은데,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선적(禪的) 흥취를 묘사한 작품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그 양상을 보면, 우선 산사 생활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그것을 배경으로 펼쳐진 사찰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산사 생활의 즐거움에 관한 내용이다. 고적한 산사에서 펼쳐지는 승려들이 차를 끓인다거나 숲길을 산책한다거나 하는 일상생활의 모습들인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청빈한 삶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고자 하는 승려들의 일상사를 혜심은 지족수분(知足隨分)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셋째는 사물에 대한 감흥이다. 이른바 영물시라고 하는 부분인데, 파초(芭蕉)·가사(袈裟)·연꽃·귤·밤·모란·달·지팡이·눈 등의 묘사가 그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혜심의 예리한 관찰력과 함께 한갓 미물이지만 그 미물에 쏟는 시인의 아름다운 시선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200자평
국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선시인(禪詩人) 진각국사 혜심의 시 81편과 산문 3편을 실었다. 그의 시는 깊은 깨달음의 선 사상을 내용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자질을 충분히 발휘해서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 있어 문학성이 높다.
지은이
혜심은 1178년 전라도 나주 화순현(和順縣)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아버지 최완(崔琬)과 어머니 배씨(裵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유학을 공부해 24세인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닦게 된다. 본래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1202년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을 모시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그는 보조국사로부터 다양한 시험을 통과한 뒤 1210년, 지눌의 법석을 공식적으로 이어받는다. 지눌로부터 이어받은 수선사(修禪社) 2대의 자리는 당시의 사회적·종교적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 수선사는 당시 왕권과 결탁해 온갖 부패와 모순을 낳았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보며 지눌이 결성한 실천적인 결사 운동이었다. 지눌의 이러한 결사 운동은 당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던 최씨 무신 정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혜심은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종교인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종교인이 권력과 밀착되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승려 본연의 자세와 개혁 정신을 유지하면서 수선사를 당시 정신계의 핵심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후 20여 년간 수선사를 이끌다가 1234년 6월 26일 57세(법랍 32)의 나이로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남긴 책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선서(禪書)로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1125칙(則)과 선사들의 염송(拈頌)을 합쳐서 총 30권으로 완성한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생전에 행하신 각종 법어를 모은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등이 있다.
옮긴이
배규범은 1998년 문학박사 학위(<임란기 불가문학 연구>)를 받은 이래, 한국학 및 불가 한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자와 불교를 공통 범주로 한 ‘동아시아 문학론’ 수립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그간 한국학대학원 부설 청계서당(淸溪書堂) 및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과정을 수료했으며, 수당(守堂) 조기대(趙基大) 선생께 사사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자 강의를 진행했으며, (사)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의 한자능력검정시험 출제 및 검토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학술진흥재단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0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순종≫ 교열 및 교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경희대(학진연구교수), 동국대(학진연구교수),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KF객원교수)을 거쳐 현재 중국 북경공업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의 말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전파라는 새로운 뜻을 세우고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불가 잡체시 연구≫, ≪불가 시문학론≫, ≪조선조 불가문학 연구≫, ≪사명당≫, ≪한자로 배우는 한국어≫, ≪요모조모 한국 읽기≫, ≪외국인을 위한 한국 고전문학사≫,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등이 있고, 역저로는 ≪역주 선가귀감≫, ≪한글세대를 위한 명심보감≫, ≪사명당집≫, ≪허정집≫, ≪허응당집≫, ≪청허당집≫, ≪무의자 시집≫, ≪역주 창랑시화≫, ≪정관집≫, ≪초의시고≫ 등이 있다.
차례
정 낭중을 전별하며 餞別鄭郞中
어떤 일에 느낀 바가 있어 因事有感
새로 선상을 칠하고서 新漆禪床
파초 芭蕉
시자가 묻기를 눈꺼풀이 얼마나 넓으냐고 하기에 시를 지어 대답하다 問侍者眼皮濶多少無對作詩示云
금성 경사록의 시운을 빌려 次錦城慶司祿 從一至十韻
작은 연못 盆池
사뇌사 집회를 마치고 시주 등의 전송을 받고 돌아와 감사하며 思惱寺罷會施主等相送至還謝之
스님을 전송하며 送僧
기사뇌가 碁詞腦歌
만족의 즐거움 知足樂
물시계 更漏子
식심게 息心偈
못가에서 우연히 읊다 池上偶吟
자비사에서 이틀을 묵으며 일암의 시운을 빌려 信宿慈悲寺 次韻逸庵
봄을 아쉬워하며 惜春
여뀌 蓼花
비 온 뒤 송만 雨後松巒
진일 상인이 와서 말하길, “저는 타고난 성품이 산란하여 조섭을 할 수가 없으며, 혹 고요한 곳에 엎드려 있게 되면 곧 혼침한 곳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오직 이 두 가지야말로 저의 근심인데, 법게를 내려주신다면 처방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眞一上人來言曰 某乙賦性散亂 未能調攝 或於靜處捺伏 則便落昏沈 惟此二病是患 請得法偈 爲對治方
고분가 孤憤歌
하늘과 땅을 대신해 답하다 代天地答
전 녹사에게 답하다 答田祿事
성주천 가에서 차 마시며 얘기하다 주지 스님의 시운을 빌려 聖住川邊茶話次贈住老
몽인 거사가 목우시를 청하기에 夢忍居士請牧牛詩
한가위 달구경 中秋翫月
쌍봉 장로의 <감춘> 시에 화답하며 和雙峰長老感春
봄날 산에서 놀다 春日遊山
냉취대 冷翠臺
폭포 瀑㳍
맑은 못 淸潭
사계절에 대한 느낌 四時有感
우연히 흥이 일어 偶興
연지에 샘물을 대고 蓮池注泉
산에서 놀다가 遊山
고향을 지나며 過古鄕
양 상인을 전송하며 送亮上人
근친하러 가는 옥 상인을 전송하며 送玉上人覲親
그림자를 마주하고 對影
작은 못 小池
천관산 의상암에 깃들여 사는데 몽인 거사가 남긴 시를 보고는 운을 빌려 마음을 적다 寓居天冠山義相庵 見夢忍居士留題 次韻叙懷
눈 내리는 패주 죽림사에 묵으며 宿貝州竹林寺有雪
인월대 隣月臺
능운대 凌雲臺
부모님을 뵈러 가는 육미 상인을 전송하며 送六眉上人省親
팔령사 동재에서 묵으며 이경상의 시운을 빌려 宿八嶺寺東齋 次李敬尙韻
기능을 경계하다 誡技能
저물녘 비 개자 晚晴
산을 나서며 出山相讃
황 중사의 시운을 빌려 次黃中使韻
검 원두가 게송을 구하기에 儉園頭求頌
남포원 누대에서 놀다 모란을 보고 遊南浦院樓看牧丹
응 율사가 법을 구하는 시의 운을 빌려 次膺律師求法韻
작은 글자로 쓴 금강경을 찬하다 小字金剛經賛
청량굴 題淸凉窟
전물암에 깃들여 살며 寓居轉物庵
담령 상인이 육잠을 구하기에 湛靈上人求六箴
방일을 경계하다 誡放逸
시로 깨달은 바를 보여주기에 그 시운을 빌려 답하다 以詩呈悟處依韻答之
백운대 위에서 선사를 추억하며 白雲臺上憶先師
서석산 규봉에서 노닐다 남겨둔 시를 보고 그 운을 빌려 遊瑞石山珪峰見留韻次之
둥근 부채 團扇
조월암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祖月庵聞笛
누군가 법을 구하기에 서암의 주인공 화두를 들어 게송을 지어주다 求法擧瑞巖主人公話作偈
목련 木蓮
자규 울음을 듣고 대중들에게 보이다 聞子䂓示衆
권백 卷柏
흥 感興
우명 左右銘
산 속의 사위의 山中四威儀
암자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庵中聽雨
여름날 감원에서 처마를 수리해 준다기에 시를 지어 거절하다 暑月監院欲補簷作詩去之
겨울날 석상암에서 자다 冬日寄石上庵
신묘년 8월, 인홍사를 지나다 벽에 붙은 시운을 빌려 辛卯八月過仁弘寺次壁上韻
무위사 공 장로와 차를 마시며 茶無爲寺恭長老
연꽃 핀 못에서 蓮池
달을 읊다 咏月
비 온 뒤 雨後
물가에서 臨水
삼가 지장 일승통의 시에 화답하다 奉和地藏一僧統
유거 幽居
세상을 민망히 여겨 憫世
빙도자전 氷道者傳
대인명 병서 大人銘 并序
일암명 병서 逸庵銘 并序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봄을 아쉬워하며(惜春)>
저무는 봄을 남몰래 아쉬워하며
작은 뜰에서 낮게 읊조린다네.
바람 부는 잎엔 푸른빛이 나부끼고
비 내린 꽃술엔 붉은 가루 떨어지지.
나비가 빨고 가니 꽃은 붉어지고
꾀꼬리가 따라오니 버들은 푸르러진다.
향기롭고 부드럽고 따스한 봄날의 모습이라
솔잎과 댓잎 같은 새순은 차고도 담박한 모습일세.
●<비 온 뒤 송만(雨後松巒)>
비 개자 시원스레 목욕하고 나온 듯
남기가 엉켜 푸르름이 뚝뚝 맺힐 듯.
멍하니 보다 마음 일어 한 수 읊으니
내 온몸도 서늘하고 푸르러지네.
●<시로 깨달은 바를 보여주기에 그 시운을 빌려 답하다>
물고기와 용은 물에 있어도 물을 모르나니
운에 따라 파도에 따라 물결 좇아 노닌다.
본래부터 떠나지 않았거늘 누가 잃고 누가 얻었나.
미망도 없는데 깨쳤다 함은 무슨 이유에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