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두 장, 두 개의 보충 그리고 부록 I, II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국가들 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여섯 개를 포함하는데, 조항 1, 5, 6은 엄격한 금지 법칙에 해당하고 나머지 셋은 시행이 유보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비 조항 1: 장차 있을 전쟁 요소를 비밀리에 유보하고 체결한 어떤 평화조약도 평화조약으로 타당하지 않다. 예비 조항 5: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예비 조항 6: 어떤 국가도 타국과의 전쟁에서 장래의 평화에 대한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 분명한 적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제2장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첫째 확정 조항: 각 국가에서 시민적 체제는 공화적이어야 한다. 칸트는 비록 오늘날 우리가 알며 실행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는 몰랐지만 민주적 공화제가 바람직한 체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론 프랑스 혁명과 ≪실천이성비판≫을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둘째 확정 조항: 국제법은 자유국가들의 연방제를 기초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확실한 국제국가의 성립을 배제하고 국가들 간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셋째 확정 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 우호 조건들에 국한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법의 권리는 “지구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권리”로서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라고 하지만, 그의 법 사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법철학을 기초로 삼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법이 있고 신법에 따르는 우주만물의 자연법이 있으며 현실의 실정법은 자연법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칸트의 법 사상은 이와 같은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00자평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과정과 방법을 칸트가 제시한다.
21세기 지구촌에서는 하루도 그치지 않고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게다가 세계시민의 평화는 고사하고 국제평화마저도 위협하는 각종 분쟁, 예컨대 자본, 자원, 기술, 정보, 군사 등 무수한 영역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세계시민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대한 통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은이
이마누엘 칸트는 마구(馬具) 제작자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아나 레기나(Anna Regina)의 넷째 아이로 1724년 4월 22일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출생했다. 청소년 시절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Collegium Fridericianum) 학교에 다니면서 고전 작가들과 라틴어에 치중했다. 목사이자 신학교수인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Franz Albert Schulz)의 영향이 컸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해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배웠으며,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 교수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46년 첫 논문 <생명력의 참다운 평가에 관한 사고>를 썼다. 그 후로 10년간 쾨니히스베르크 내 여러 가정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1755년 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첫째 원리>라는 논문으로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사강사(Privatdozent)가 되었다. 1756년 공개토론을 거치면서 <물리학 단자론>을 라틴어로 작성했다. 1764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시예술 교수 제의가 왔으나 적임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이듬해에는 쾨니히스베르크 성(城) 도서관의 정식 직원이 되어 고정 수입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770년 형이상학과 논리학 담당 교수로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정교수로 취임했다. 교수 취임 논문은 <감각계와 가지계의 형식과 원리>였다. 교수 취임 시부터 10년간 구상하고 작성한 ≪순수이성비판≫을 1781년에 출판했으나, 반응이 별로 없자 해설판으로 소책자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서설≫(1783)을 출판했다. 1785년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를 출판하고 1786년 대학 총장이 되었다. 1787년 비로소 개인 소유 주택을 구입했고 1788년 두 번째로 총장이 되었으며 그해 ≪실천이성비판≫을 출간하고 2년 뒤 ≪판단력 비판≫을 출판했다.
말년의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 ≪공법론≫(1793), ≪영원한 평화를 위해≫(1795), ≪도덕형이상학≫(1797), ≪실용적 견지에서 저술한 인간학≫(1798). 73세 되던 해인 1797년 교수직을 사임한 뒤에도 노화로 쇠약해지는 신체를 이끌고 여전히 연구에 전념했다. 1800년부터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강의록들과 미발표 원고들을 정리해서 출간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803년 10월, 쇠약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약 4개월 이상을 병석에서 앓다가 1804년 2월 12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옮긴이
강영계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연구했고, 건국대학교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중국 서북대학교 객좌교수이고 한국니체학회 이사다. 저서로는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철학과현실사), ≪사회철학의 문제들≫(철학과현실사), ≪니체와 예술≫(한길사),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해냄), ≪헤겔, 절대정신과 변증법 비판≫(철학과현실사),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해냄), ≪사랑학 강의≫(새문사), ≪행복학 강의≫(새문사), ≪죽음학 강의≫(새문사),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멘토프레스) 등이 있다. 역서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서광사),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한길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지식을만드는지식),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지식을만드는지식), ≪도덕의 계보학≫(지식을만드는지식), ≪선과 악의 저편≫(지식을만드는지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서광사), 쾨르너의 ≪칸트의 비판철학≫(서광사),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 프로이트의 ≪문화에서의 불안≫(지식을만드는지식), ≪꿈의 해석≫(지식을만드는지식), ≪쾌락 원리의 저편≫(지식을만드는지식),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삼중당) 등이 있다.
차례
영원한 평화를 위해
제1장.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제2장.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첫째 보충. 영원한 평화의 보장에 관해
둘째 보충. 영원한 평화를 위한 비밀 조항
부록 I. 영원한 평화와 관련해서 본 도덕과 정치의 불일치에 관해
부록 II. 공법의 선험적 개념에 의한 정치와 도덕의 일치에 관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함께 생활하는 인간들 사이의 평화 상태(Friedenszustand)는 결코 자연 상태(status naturalis)가 아니다. 자연 상태는 오히려 전쟁 상태다. 즉, 자연 상태는 비록 항상 적대 행위의 발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대 행위를 동반하는 끊임없는 위협이다. 그러므로 평화 상태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18쪽
법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체제는 그 자체가 모든 종류의 시민적 조직에 근원적 기초로 놓여 있는 체제다. 그런데 단지 다음과 같은 물음만 남아 있다. 과연 이 체제는 또한 영원한 평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인가?
-2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