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오상순은 1920년 김억, 남궁벽, 황석우, 염상섭, 김찬영 등과 함께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오상순의 시에는 세계와 자아의 갈등이 관념적이고 생경한 시어를 통해 격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상순은 ≪폐허≫ 1호와 2호에 수록한 글에서 ‘폐허’의 상징적인 의미를 한편으로는 종교적 교리와 근대적 지식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서, 또 한편으로는 인습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서 분명히 제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대 초 식민 지배를 받는 우리 민족의 현실, 그리고 우리 문단에 수용된 서구의 상징주의와 감상적 낭만주의의 영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20년대 오상순의 시에서 폐허와 허무, 밤과 어둠은 현실의 암울한 상황을 상징한다. 동시에 폐허와 허무는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게 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궁극의 절대 세계에 이르려는 시인은 지독한 허무의식에 침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허무의 단순한 순환 논리를 넘어선다. 우주 만유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영원과 절대와 무한의 세계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시인이 허무의 칼을 들고 일체의 모든 관념과 질서를 부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태우고 나면 이제 우주에 허무만 남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허무에게 “너는 너 自體를/ 깨물어 죽여라!”라고 말한다. 절대 허무의 세계를 추구하던 시인은 더 높은 차원의 궁극적인 세계를 찾아 스스로 방랑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등단 이후 줄곧 허무와 방랑의 삶을 살며 비록 허무를 관념적으로 노래했다고 하지만 오상순의 시는 다분히 역설적으로 이해해야 할 소지가 많다. 폐허의 현실을 감상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시인의 많은 시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생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사물이 그 본성을 회복하기를 염원하는 시인의 태도 때문이다. 오상순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허무적 색채와 종교적 깨달음은 그의 시가 지니는 한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애를 시와 일관되게 하려는 시인의 특별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강한 종교적 성향을 바탕으로 허무의 궁극에 가닿으려고 했던 오상순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시와 삶, 예술과 종교의 일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드문 시인으로 기록된다.
200자평
4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했지만, 정작 오상순이 쓴 시는 그리 많지 않았고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내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뒤 유고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공초 오상순 시선≫이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관념적이며 언어의 미의식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문학사의 일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허무적 어조 뒤에 맹렬한 정열을 숨기고 있다.
지은이
오상순(吳相淳, 1894~1963)은 한국 근대시의 선구적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1920년 김억, 남궁벽, 황석우, 염상섭, 김찬영 등과 함께 ≪폐허(廢墟)≫ 동인으로 참여해 7월 창간호에 <時代苦와 그 犧牲>을, 그해 11월 ≪개벽(開闢)≫ 6호에 시 <新詩>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10월 ≪폐허≫ 2호에 <힘의 崇拜>, <힘의 憧憬>, <힘의 悲哀>를 포함한 시 17편과 평론 <宗敎와 藝術>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성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1923년에는 ≪동명(東明)≫ 8호에 <放浪의 마음>, <虛無魂의 宣言>을 발표하고, 1924년에는 ≪폐허이후(廢墟以後)≫ 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虛無의 祭壇>, <虛無魂의 獨白> 등을 발표했다. 1926년 갑자기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입산해 불교적 선의 세계를 추구했다. 이 무렵 대구, 부산 등을 유랑하면서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 등과 교분을 쌓았다. 공초(空超)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조계사(曹溪寺)에 몸을 기탁해 낮에는 연극인 이해랑이 운영하던 명동의 ‘청동다방’에 머물며 여러 문인들과 어울렸다. 이 만남을 기록한 195권의 문인 서명첩인 ≪청동산맥(靑銅山脈)≫을 남겼다. 이 무렵 오상순은 허무를 초극하고자 무소유의 삶을 직접 실천했다. 1961년 몸을 기탁했던 조계사를 나와 안국동의 ‘정이비인후과’에서 생활하다가 고혈압성 심장병과 폐렴으로 입원해 1963년 6월 3일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지 20일 후에 유고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공초 오상순 시선≫이 절친한 동료였던 구상의 도움으로 자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1983년에는 오상순 시전집인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구상 편, 한국문학사)이, 1988년에는 추모 문집인 ≪시인 공초 오상순≫(구상 편, 자유문학사)이 간행되었다. 1992년부터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간 그를 기리기 위해 ‘공초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엮은이
여태천(余泰天)은 197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김수영 시의 시어 특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국외자들≫(2006), ≪스윙≫(2008),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2013), 비평서 ≪김수영의 시와 언어≫(2005),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2007), 편저 ≪춘파 박재청 문학전집≫(2010), ≪이성선 전집 2·산문시 기타≫(2011) 등을 비롯해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제27회 김수영문학상(2008)을 수상했다.
차례
序詩·寄港地
<虛無魂의 宣言>
虛無魂의 宣言
廢墟의 祭壇
타는 가슴
迷路
어둠을 치는 者
한 잔 술
<아시아의 마지막 밤 風景>
아시아의 마지막 밤 風景
아시아의 黎明
항아리
바다물은 달다
八·一五의 精神과 感激을 낚다
<斷章>
疑問
구름
創造
어느 친구에게
나의 苦痛
生의 哲學
<불나비>
一塵
불나비
나의 스케취
한 마리 벌레
나와 詩와 담배
放浪의 마음(I)
放浪의 마음(II)
<白日夢>
夢幻詩
幻像
꿈
表流와 底流의 交叉點
白日夢
<첫날밤>
해바라기
永遠 廻轉의 原理
대추나무
生命의 秘密
첫날밤
새 하늘이 열리는 소리
團合의 結實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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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城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山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凝視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潮流를 通하여 우도다.
茫茫한 푸른 海原-
마음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香氣
코에 서리도다.
-<放浪의 마음(I)>,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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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불보다 太陽보다 빛보다 어둠보다
生命보다도 또 죽음보다도
더 두렵고 深刻한 너 해바라기의
속 모를 사랑의 淵源이여!
不滅의 情熱이여!
오! 해바라기
너 정녕
太初 生命과 그 사랑을 더불어
永遠 想念의 源泉이니 絶對 神秘한 大自然!
生命의 核心! 그 權化요 化身이 아니런가!-
-<해바라기> 부분,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