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이무영의 초기 작품은 식민지 농촌 사회의 가난한 소작농들의 문제를 다룬 농민 소설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주제는 대체적으로 농민의 흙에 대한 순교자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표작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속 제1과 제1장>)에 이런 점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먼동이 틀 때≫(≪동아일보≫, 1935)에서는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과 동일한, 브나로드 사상을 서사화한 농민 계몽의 주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1939년 귀농한 후에는 ‘보수형 농민 소설’(오양호,<농민 소설론> 참조)을 많이 썼다. 창작집 ≪흙의 노예≫(조선출판사, 1944)에 수록된 7편의 소설들, 곧 <문 서방>, <안달소전>, <모우지도>,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이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만주사변 후의 불안한 사회 기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농민들의 건실한 생활상과 흙에 집착하는 혼을 통해 한 시대 한국인의 의식을 검증한다. 작품집 ≪산가≫(민중서관, 1949)에 수록된 여러 단편도 그 성향은 이런 점과 다르지 않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조선 농업을 식량 공급, 원료 조달, 상품 판매를 위한 시장으로 간주했고, 토지조사사업도 형식적 개편을 위한 것이었다. 이무영의 농민 소설은 그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무영의 농민 소설은 한국 소설사에서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박영준, 김유정, 그 후의 오유권, 하근찬, 박경수, 이문구, 방영웅 등의 농민 소설과 테마톨러지 측면에서 변화와 지속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여러 농민 소설 연구에서 증명된다.
이무영의 대표작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는 바로 이런 농민 의식을 테마로 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흙에서 나서 흙을 만지며 컸고, 흙을 파먹고 사는 한낱 평범한 농부가, 바지저고리 한 벌에 삼베 행전 한 켤레를 타고 나서 10년 머슴살이로 가정을 갖고 60평생을 살뜰히 산 결과 30여 두락의 자작농이 된다는 내용이다. <흙의 노예>의 부제는 “속 제1과 제1장”이다. 그러니까 <제1과 제1장>과 <흙의 노예>는 이어지는 작품이다.
<제1과 제1장>의 귀농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소설 못 쓰는 소설가”란 이름을 벗어나기 위한 소설가의 귀농이다. 그러나 귀농의 내포는 옛날에는 남이 알까 봐 숨기고, 경멸까지 했던 농민인 아버지의 삶이 이제는 이해될 뿐 아니라 그것이 가장 진실한 삶의 태도임을 깨닫고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수택은 신문사 일에 쫓겨 늦게 귀가했을 때, “한 달 가야 한 번 건들여 주지도 않는 원고지”를 보고,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회의에 빠져 갈 즈음 “흙의 냄새를 맡고” 아버지를 생각하고 귀농을 결심하게 된다.
왜 사는지, 누구를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방황하고 있을 때 맡은 “매키한 흙내”는 주인공에게 참다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여태껏 농민을 업신여기고 자기 아버지를 일자무식 농투성이라고 “비웃고 가엽게 여겼던” 아들이 “집으로 가 흙을 만지는” 것이 진실하고 값진 삶임을 문득 깨닫는다. 이것은 아버지 세계로의 자발적 회귀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에 촉진제가 된 것이 흙내였고, 아버지의 흙의 노예 사상이다. 아들은 코피를 쏟으며 농사일을 배워 농민들과 친구가 되고, 추운 겨울 저녁 도둑을 지키기 위해 순라도 돈다. 봄이면 아내와 보리밭을 매고, 쟁기질을 배워 논도 간다. 아버지의 흙의 감정에 아들의 도회 감정, “농사는 이해타산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농사짓는 순간만은 신선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라는 동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도시로 공부하기 위해 떠난 후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부자의 만남이다. 더욱이 아들은 아버지가 60평생을 고된 노동 끝에 몸져눕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
<흙의 노예>에서는 동경 유학으로 상징되는 유식한 아들이 무식의 표상인 농군 아버지를 위대한 인물로 생각한다. 퇴보로 인식되는 흙의 감촉이 선진으로 인식되는 포도의 감촉보다 삶의 이치로 따져 훨씬 값이 있다는 판단에 이른다. 아버지 세계로의 자발적 귀환이다. 도시문화 향수자 사모님이었던 수택의 아내는 보리밥을 먹고 설사를 하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새벽밥을 먹고 산나물을 뜯으러 간다. 또한 수택은 대처로 떠나는 조카에게 “바람만 쐬고 곧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이런 언행은 수택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공부하러 갈 때 김 노인이 수택에게 타이르던 말과 같다. 수택은 어느 사이에 제2의 김 노인이 되어 있다.
이무영의 많은 농민 소설의 결말이 거의 해피엔드가 된다는 것은 작가 정신이 범휴머니즘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오리엔탈리즘적 인간주의가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무영이 도시를 버리고, 귀농한 후 농민 소설을 쓴 행위는 동양적 세계, 민족적인 것으로의 귀환이다. 이런 특성으로 보면 이무영의 농민 소설은 식민지 사회가 새로운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을 때, 자기 계층을 확인하고 우리 민족의 세계관이 뿌리박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나선 매우 개성적인 글쓰기 행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개성이 유지되어 오는 농촌 농민의 세계가 여전히 우리의 본질이고, 나아가야 할 지표임을 깨우쳐주었다. 이무영은 도시란 시대와의 타협지요, 농촌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계인데 이런 상황에 대한 전모의 묘사, 재창조가 불가능하게 되자, 농민 소설이란 글쓰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런 양식을 빌려 그는 한국인의 사고와 현실관을 그 시대를 살던 인물, 성실한 농민과 귀농한 지식인을 통해 표현했다.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가 언제나 이 작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200자평
한국 소설사에서 농민 소설의 한 축을 형성한 이무영(1908~1960)의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를 실은 작품집이다. 작가가 실제 귀농을 해서 작품 속에 성실한 농민과 귀농한 지식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농본주의적 세계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지은이
이무영은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농민, 농촌의 테마를 가장 먼저 창작 현장으로 이끌어 낸 문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한국의 농본주의 사상을 형상화한 <흙을 그리는 마음>(≪신동아≫, 1932)을 발표하면서부터다. 한국 소설사에서 농민 소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이익상의 <흙의 세례>(≪개벽≫, 1925), 김동인의 <시골 황 서방>(≪개벽≫, 1925), 이기영의 <농부 정도룡>(≪개벽≫, 1926), 최서해의 <농촌야화>(≪동광≫, 1926), 조명희의 <농촌 사람들>(≪현대평론≫, 1927), 송영의 <군중정류>(≪현대평론≫, 1927), 박승극의 <농민>(≪조선지광≫, 1927), 최인준의 <대간선>(≪조선농민≫, 1929) 등이 당시 농민 소설의 실상을 보여주는 예다. 초기의 이런 농민 소설들은 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1930년대에는 농민 소설의 이런 성향이 많이 달라진다. 이광수의 ≪흙≫(≪동아일보≫, 1932. 4. 12∼1933. 7. 10), 심훈의 ≪상록수≫(≪동아일보≫, 1935. 9∼1936. 2), 이무영의 ≪먼동이 틀 때≫(≪동아일보≫, 1935. 8∼1935. 12), 이기영의 ≪고향≫(≪조선일보≫, 1933. 11∼1934. 9) 등의 신문 연재 장편이 당시 사회의 큰 관심사였던 브나로드 사상, 곧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즘을 작품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런 농민 계몽, 농본주의 사상은 확산되어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조선일보≫, 1934. 1), 서오봉의 <와룡동>(≪신동아≫, 1934. 4). 이석훈의 <황혼의 노래>(≪신동아≫, 1933. 6∼1933. 9), 이기영의 <서화>(≪조선일보≫, 1933. 5∼1933. 7), 박화성의 <홍수전후>(≪신가정≫, 1934. 9∼1935. 3), 이태준의 <꽃나무는 심어 놓고>(≪신동아≫, 1933. 3), 최인준의 <통곡하는 대지>(≪사해공론≫, 1936. 3) 등으로 지속, 변화된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철, 안함광, 임화, 박승극 등이 중심이 된 농민문학론이 논쟁적 성격을 띠고, 작품을 뒷받침하고, 논리를 개발하며 문단 전면으로 나섰다. 이런 결과 1930년대 중·후반은 농민문학 시대가 되었다.
이무영은 이런 시대에 가장 문제적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아버지와 아들>, <오도령>, <노농>, <당귀삽화>, <농부>, <산가>, <만보노인>, <용자소전>, <궁촌기>, <안달소전> 등의 농민 소설을 집중 발표함으로써 문단이 주목하는 작가가 된 까닭이다. 1940년대에도 <민권>, <귀소>, <향가> 등의 농민 소설을 발표했다.
광복 후의 이무영은 다른 문제를 테마로 한 소설, 그러니까 여성 취향의 애정 소설을 많이 썼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성과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농민 소설가라 부른다.
이무영은 1908년 1월 14일 충북 음성군 석인리(오리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갑룡(甲龍), 아명은 용구(龍九), 무영(無影)은 필명이다. 그러나 1959년 법원의 허가를 받아 필명을 본명으로 바꾸었다. 소년기를 충북 중원군 용원리에서 보내고 1920년에 상경, 휘문고등학교에 진학, 이때부터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1925년에는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위해 도일, 고학을 하다가 소설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를 찾아가 ‘무슨 일이든지 하겠으니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러나 가토 다케오가 다시 불러 그 집의 서생이 되어 혹독한 작가 수업을 한다. 당시 가토 다케오는 ≪농민 문예의 연구≫를 쓴 농민문학 이론가였고, 인기 작가였다.
1927년 19세 때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이듬해 <폐허의 울음>을 발표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1929년 귀국, 무영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썼으나 작가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소학교 교원, 출판사, 잡지사 직원으로 지내면서 <팔년간>, <반역자>, <착각애>, <노파>, <아내> 등을 발표했다. 한편 희곡에도 관심이 있어 ≪동아일보≫ 희곡 현상 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했다(1932).
1934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광수의 농민 계몽 소설 <흙>이 끝나자 같은 주제를 다룬 <먼동이 틀 때>를 연재했다.
1936년에는 고일신(高日新)과 결혼하였고, 친우 이흡(李洽)과 문예지 ≪조선문학≫을 창간하기도 했다. 1939년 7월 이무영은 보다 치열한 작가 생활을 하기 위해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경기도 시흥 수리산 밑으로 내려가 실제 농사를 지으며 농민 소설을 썼다. 그의 대표작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를 쓴 것이 바로 이때다.
1946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1947년에는 연세대에서 소설론을 강의했고, ≪소설 작법≫도 출간하는 등 창작과 이론으로 문단의 중진이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입대, 해군 정훈장교가 되었고, 1954년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낸 뒤 1955년에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국제 펜클럽 중앙위원, 숙명여대 대학원 강사, 단국대 교수가 되었다(1957).
1960년 4월 21일 52세 되던 해에 뇌일혈로 갑자기 타계했다. 1975년 신구문화사에서 ≪이무영 대표작 전집≫ 5권이 간행되었고, 1985년에는 출생지 음성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세워졌다. 유족으로 고일신과 그의 자녀 2남 4녀가 외국에서 살고 있다.
엮은이
오양호는 경상북도 칠곡 동명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사범대 국어과에 진학했다.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1981),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인천대학교 교수, 교토대학 객원교수(일한교류기금지원)를 역임했다. 지금은 인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 년간 교수 생활을 하며 11권의 책을 간행했다. 그 중 대표적인 저서가 ≪농민 소설론≫, ≪한국 문학과 간도≫, ≪일제강점기 만주 조선인 문학 연구≫, ≪만주 이민 문학연구≫, ≪그들의 문학과 생애, 백석≫이다. 1984년 군부정권하에서 어렵게 간행된 ≪농민 소설론≫은 이기영의 <고향>, 송영 등의 카프계 농민 소설을 <흙>, <상록수>, 이무영, 박영준 등의 농민 소설과 대비 연구하여 1930년대 한국 농민 소설을 투쟁형, 계몽형, 보수형, 이농형으로 분류, 체계화시켰다. ≪한국 문학과 간도≫에서는 암흑기, 친일 문학기 등으로 기술되는 1940년대 초기 문학사기술에 대한 대체론, 이민 문학기를 설정했고, ≪일제강점기 만주 조선 인문학 연구≫에서는 만주 이민들을 문제 삼고 있는 문학작품을 인간의 존재론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만주 이민 문학 연구≫는 1940년대의 마도강(만주, 간도) 이민문학을 탈식민주의적 논리로 접근하면서 앞의 두 저서의 논의를 보완, 심화했다.
정년에 맞추어 출판된 ≪백석≫(한길사)에서는 백석의 시를 일본의 서정시인 다나카 후유지(田中冬二)의 시와의 영향관계를 고찰했고, 한편 숨겨진 듯 남아 있던 그의 몇 편의 시와 평론을 발굴하여 백석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런 연찬의 결과는 모두 농민문학 고찰에 바친 긴 시간과 관련된다. 석사 학위논문으로 <농민 소설 연구>를 발표한 후 꼬박 10년간 동서로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으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여 완성한 것이 박사 학위논문 <한국농민 소설연구>이다. 이 논문에서 발견한 이농형 농민 소설의 끝, 농민들이 살 길 찾아 마도강으로 떠난 후 생성된 만주 조선인 문학에 대한 연구가 위의 4권 책이다.
다른 저서로 ≪문학의 논리와 전환 사회≫, ≪한국 현대 소설과 인물 형상≫, ≪신세대 문학과 소설의 현장≫, ≪한국 현대 소설의 서사담론≫, ≪낭만적 영혼의 귀환≫, ≪백일홍≫(수필집) 등이 있다.
교토대(京都大) 객원교수 기간에는 재 교토 한국유학생들과 ‘정지용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그 후 정지용 시를 최초로 일어로 번역했다.(≪鄭芝溶詩選≫, 東京, 花神社, 대산문화재단 지원). 2005년에는 ‘정지용 시비’를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구내에 ‘윤동주 시비’와 나란히 세웠다.
받은 상으로는 ‘윤동주 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신곡문학대상’, ‘심연수문학상’, ‘인천대최우수논문상’, ‘경북대 자랑스런 동문상(학술부문)’, ‘황조근정훈장’ 등이 있다.
차례
제1과 제1장(第一課 第一章)
흙의 노예(奴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수택이가 하로 이틀 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하는 일 없이 교외를 빈들빈들 돌아다니었다. 하로는 S라는 동료를 유인해 가지고 청량리로 나갔다. 전부는 아니나 그만둘 게획만을 이야기하고 생게로 이야기가 옮아갔을 때다. 그도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낸지 몰랐었다. 매키?한 냄새가 코로 콕 찔른다. 그 냄새는 코를 통해서 심장으로 깊이깊이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흙내었다.
-<제1과 제1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