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청말 민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타이옌의 혁명 정신
장타이옌의 국학 강연 정신은 구국과 항일(抗日)을 외치는 혁명가 정신의 연장이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국학 개념의 형성은 청말 민초라는 혁명과 격동의 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는 혁명가로서의 저항과 투옥, 망명 생활 외에도 반청(反淸) 운동 이후 등장한 신해혁명의 실패 및 반위안(反袁) 운동과 그 좌절 등을 겪었다. 그리고 그의 강학은 새로운 형태의 혁명운동의 모색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투옥 생활 중 결국 중병을 얻고 낙향한 그에게 시대는 국학 연구를 통한 혁명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1920년 이후 ≪국학 개론≫을 필두로 그는 “국학 강학”이라는 공개 강연을 통해서 ‘혁명 시대’와는 다른 ‘강학 시대’라는 새로운 차원의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국학 개론≫은 상하이에서 개최한 정기적인 강학회의 강연에 해당한다.
장타이옌이 인식한 국학의 의미와 그 범주
강학 운동 이전부터 그는 원래 신해혁명의 선봉장인 동시에 문사철(文史哲)에 정통한 저명한 학자였다. 그가 주장하는 국학이란 서방의 서학(西學)과 병존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근대 시기로 전형(轉形)하는 학문의 독자적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국학의 범주는 유가 전통을 강조하는 공교(孔敎)의 범주와는 무관하다. 그는 국학은 절대로 유학(儒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유학은 제자학 중 하나로서 기타 학설과의 비교를 통해 객관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역사는 넓은 의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언어 문자고, 둘째는 문물제도고, 셋째는 인물과 사건이다”라고 했다. 일본에서 진행된 국학 강습회(國學講習會)에서 그의 첫 강연 내용은 ‘언어 문자학’, 두 번째 강연 내용은 ‘문학’, 세 번째 강연 내용은 ‘제자학(諸子學)’으로 구성되었다. ≪국학 개론≫에 경학(經學), 철학, 문학에 대한 강연 내용이 있고, 도쿄에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국고 논형(國故論衡)≫이 소학(小學), 문학, 제자학으로 구성된 점 역시 이러한 관점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200자평
청말과 민초 시기의 혁명가이자 저명한 국학대사 장타이옌의 강연록. 독특하고 풍부한 견해와 함께 중국 전통 학문인 경학, 철학, 문학의 역사 내용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장타이옌이 인식한 국학의 가치와 그 연구의 의의가 잘 드러난다.
지은이
장타이옌의 본명은 장빙린(章炳麟)이고 자(字)는 메이수(枚叔)며 타이옌(太炎)은 호(號)다. 그는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위항(余杭) 출신으로 민국 초기의 민주 혁명가며 사상가이자 저명한 국학사(國學史) 연구자다. 그의 연구 분야는 소학(小學)과 역사, 철학, 정치 등으로, 이에 대한 다수의 저술이 있다.
조부의 반청(反淸) 반만(反滿)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22세에 항저우에 있는 고경정사에 입학해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를 수학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캉유웨이·량치차오와 서신으로 교류했고, 1897년 상하이에서 ≪시무보≫ 주편(主編)을 맡으면서 유신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0년에 변발을 자르고 혁명의 뜻을 세웠다. 1903년 <캉유웨이가 논한 혁명을 반박하는 글>이란 글과 쩌우룽(鄒容)의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을 썼다가 청조(淸朝)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1906년에 출옥해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동맹회(同盟會)에 참여해 ≪민보≫를 편집하고 집필했다. 신해혁명 뒤인 1912년 상하이 쑨원 총통부의 추밀고문(樞密顧問)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자 그에 대한 토벌 운동을 주장하다 가택에 연금(軟禁)되기도 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연금에서 풀려나 이듬해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새로 수립한 혁명 정부에 가담했지만, 결국 의견의 차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국민당을 탈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학문 연구와 강학에 전념하면서 만년에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칭호를 얻으며 항일과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문학, 역사학, 언어학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고 그의 혁명적인 문장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그의 문언체 문장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신방언(新方言)≫과 ≪문시(文始)≫, ≪소학 답문(小學答問)≫ 등은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술로는 ≪장씨 총서(章氏叢書)≫(1915), ≪장씨 총서 속편(章氏叢書續編)≫(1933), ≪장씨 총서 삼편(章氏叢書三編)≫(1939), ≪장타이옌 전집(章太炎全集)≫(1994) 등이 있다.
옮긴이
조영래는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경희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 ≪신자≫, ≪제갈량 문집≫이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중국 역사지리 문헌의 문헌학적 분류와 그 기원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머리말
제1장 개론
제2장 국학의 분류(1)·경학의 유파
제3장 국학의 분류(2)·철학의 유파
제4장 국학의 분류(3)·문학의 유파
제5장 결론·국학의 진보
부록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는 서방 문화를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배후에는 국학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런 두 가지 문화가 결국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를 충분히 고려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국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서구 학문과 우리의 국학을 결합할 수가 있겠는가? 때문에 먼저 국학을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소통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28~29쪽
“고증(考證)”이란 것을 들어 이야기하면 청대의 성과가 비록 대단해 이들의 성과를 보고 이를 인용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가 있었지만, 이들의 성과 외에는 시종일관 별다른 방향을 찾을 수 없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정금과 같은 진리가 아직 많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려 한다면, 선인의 업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해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새로운 법칙을 모색해 선인의 능력을 초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보의 계기라고 본다.
-183~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