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북만주를 배경으로
최서해는 북만주를 배경으로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를 전쟁터로 만들어 갔다. 이에 따라 빈곤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모여든 이의 처지를 서해가 복원해 냈다.
<홍염>에서는 소작료를 갚지 못했다는 핑계로 중국인 지주 ‘인(殷)가’는 ‘문 서방’의 딸 ‘룡녜’를 강제로 끌고 가버린다. 문 서방 내외가 발악해 보았지만 물리력의 차이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대화 불능의 상황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화해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중국인이든 그네들이 보기에 조선인은 거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반면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의 도덕률도 무시하고 자신들을 함부로 취급하는 중국인들에게 똑같은 인간으로 다가설 수 없다. 그래서 문 서방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빼앗긴 것이지만, 딸 룡녜가 중국인 인가의 집에 붙들려 살고 있는 데 대해 심각한 자기 검열을 가한다. 또 무법천지의 세상에 무법자로 대응하는 방식만이 남아있다. 이는 결국 만주의 현실(사회 조건)이 조선인을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 서방이 질러놓은 불은 기세 좋게 타오른다. 그리고 인가는 문 서방의 도끼에 머리를 맞아 최후를 맞는다. 그것이 중국인과 북만주 조선인들이 갈등의 해결 방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었던 것이다. <이역원혼>, <기아와 살육>의 세계도 이와 그대로 일치한다.
한편 북만주를 배경으로 한 <탈출기>는 고백체를 취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고백체는 ‘나’가 ‘너’에게 심중에 묻혀 있는 은밀한 사실이나 감정을 전달하기에 용이한 형식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또한 한국문학사에서 과도한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선전, 선동의 수준에서 머무르던 신경향파 문학이 <탈출기>를 경계로 해 드디어 문학이라 부르기에 합당한 경지로 올라섰다. <이역원혼>, <기아와 살육>, <홍염> 등의 작품들이 <탈출기>의 의식을 배면으로 해 창작되었다.
최서해의 환상 세계
최서해는 적극적으로 환상을 만들어 냈다. 사랑하는 대상이 죽음에 이른 순간 그 충격으로 제정신을 잃고 환상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이때 대상의 죽음에 외부적인 요인이 개입한다. <홍염>에서는 문 서방의 아내가 죽기 직전 룡녜의 환상을 보고 쫓아나가는 대목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기아와 살육>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진수가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박돌의 죽엄>을 내세울 수 있다. 자식을 잃은 ‘박돌 어미’가 실성해 환상 속에서 헤매는 장면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한편 <이역원혼>에 나타나는 환상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죽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노리는 유가에 대한 두려움이 형상화되는 대목에서 환상이 직조되고 있다. 외부세계 묘사를 통해 분위기가 형상화되는데, 그 방식은 객관적인 시각에 입각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인물의 주관적인 상태를 통해 해석된 결과라는 것이다.
환상은 엄연히 현실의 일부이며, 때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근대의 이성(과학) 중심주의 시각이 ‘미신’ 내지 ‘전근대’의 딱지를 붙이면서 몰아냈던 사실이고, 또한 탈근대를 모색하는 이들이 이성(과학) 중심주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다시 새롭게 복원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서해의 소설에는 조선에서 전해지던 그러한 환상의 요소가 다분히 살아 있다.
200자평
관계에 입각해서 세계를 이해시키려고 한 최서해는 민중의 생활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일제의 정책 실패로 가난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만주를 향한 조선인들, 국가를 빼앗긴 까닭에 무법천지에 내던져진 그들의 이야기를 쓴다.
지은이
서해(曙海) 최학송은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성진(城津)에서 출생했다. 17세가 되던 1917년 간도로 들어가서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1923년 봄 귀국했다. 간도에서 겪었던 절박한 빈궁과 비참한 민족의 현실은 훗날 문학 창작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귀국한 이후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에게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고, 1924년 춘원을 찾아 상경했다. 이때 춘원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奉先寺)에서 3개월간 불목하니 역할을 한 바도 있다. 1924년 <토혈(吐血)>, <고국(故國)>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1925년 <탈출기(脫出記)>, <박돌(朴乭)의 죽엄>, <이역원혼(異域冤魂)>, <기아(棄兒)> 등의 수작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약 3년 동안에 걸쳐 발표된 작품들이 오늘날 그를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위치하게 한다. <조선문단(朝鮮文壇)>, <중외일보(中外日報)>, <매일신보(每日申報)> 등에서 직장 생활을 해 나가다가 1932년 7월 9일 위문협착증(胃門狹窄症)으로 사망했다. 창작집으로 ≪혈흔(血痕)≫(글벗집, 1926), ≪홍염(紅焰)≫(삼천리사, 1931)이 있다.
옮긴이
홍기돈은 1970년 제주에서 출생했다. 1999년 평론 <그림자로 놓인 오십 개의 징검다리 건너기-한강론>으로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고, 2004년 중앙대학교에서 <김동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백의출판사, 2001), ≪인공낙원의 뒷골목≫(실천문학사, 2006)이 있으며, 연구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소명, 2007)을 펴내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홍염(紅焰)
이역원혼(異域冤魂)
박돌(朴乭)의 죽엄
탈출기(脫出記)
기아(棄兒)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룡녜야! 놀라지 마라! 나다! 아버지다! 룡녜야!”
문 서방은 딸을 품에 안으니 이때까지 악만 찻든 가슴이 스르르 풀리면서 독살이 올랏든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떠러졋다. 이러케 슬픈 중에도 그의 마음은 깃브고 시언하엿다. 하늘과 땅을 주어도 그 깃븜을 밧꿀 것 갓지 안엇다.
그 깃븜! 그 깃븜은 딸을 안은 깃븜만이 아니엇다. 적다고 미덧든 자기의 힘이 철통 가튼 성벽을 문허트리고 자기의 요구를 채울 때 사람은 무한한 깃븜과 충동을 밧는다.
불ㅅ길은―그 붉은 불ㅅ길은 의연히 모든 것을 태여릴 것처럼 하늘하늘 올렀다.
-<홍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