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18년 세종학술도서 선정
≪춘추(春秋)≫는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다. 약 1만 6000여 자의 분량으로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부터 애공(哀公) 14년(BC 481)까지 242년의 역사 기록이다. 이 기간을 역사에서는 춘추 시대라고 한다. ≪춘추≫는 또한 ≪춘추경≫이라고도 부른다. 맹자(孟子)에 따르면 춘추 말기 공자(孔子)가 기존의 노나라 역사 기록을 근거로 정리해 ≪춘추≫를 편찬했다고 한다. 때문에 후세 유가에 의해서 경(經)으로 높여졌다.
≪춘추≫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맹자 이후 ≪춘추≫는 공자의 뜻이 담긴 지고한 경전으로 추존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대한 앙모와 존중은 선유들의 정신에 스며들었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조선(朝鮮)의 경우, 주지하듯 친명배원(親明排元) 정책으로부터 북벌론(北伐論) 및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춘추≫는 정치적 명분의 기준점이 되었고, 사회의 기풍을 선도했으며, 선비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춘추≫는 연도순으로 사건을 기록한다. 해마다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먼저 제시되고 사시에는 월(月)과 일(日)이 배속되며 날짜는 간지(干支)로 표시한다. 사건은 조목(條目)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으며 긴 것은 47자, 짧은 것은 1자다. ≪춘추≫의 내용은 대부분 정치 사건인데 전쟁 및 그와 관련한 회맹(會盟) 기록이 특히 많다. 그 외에 제사나 혼상(婚喪) 그리고 일식, 월식, 지진 등 자연 현상을 기록했다. 다만 ≪춘추≫의 기록은 지나치게 소략하다. 기록 당시 살았거나 시대적으로 근접한 사람들이야 내용을 알 수도 있었겠지만 시대가 흐른다면 더욱 해독하기 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공자 후학들이 ≪춘추≫에 대한 해설을 전수해야 했던 이유다.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당시 ≪춘추≫를 해설한 대표적 학파로 좌씨(左氏), 공양(公羊), 곡량(穀梁), 추씨(鄒氏), 협씨(夾氏)를 수록했다. 추씨와 협씨는 사라졌고 현재는 좌씨, 공양, 곡량 세 학파만이 전승된다. 이들 세 학파의 해설서인 ≪좌씨전(左氏傳, 간칭 ≪좌전≫)≫,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삼전을 대별하면 ≪좌전≫은 사학적 성격이 강하고, ≪공양전≫과 ≪곡량전≫은 경학적 성격이 강하다. ≪공양전≫은 ≪춘추≫의 개별 기록에서 문자의 운용에 따른 의미 차이를 밝히고, 비교와 귀납을 통해 그 서법의 규칙을 밝혀 ≪춘추≫의 대의를 설명한다. 때로는 한 번의 의론을 통해 여러 사례를 포괄하기도 한다.
≪춘추≫는 근엄하고 난해하다. 삼전은 춘추학의 원점(原點)이자 정점(頂點)이다. 삼전을 모두 보지 않고는 ≪춘추≫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공양전≫은 ≪춘추≫의 오의(奧義)를 풀기 위해 경문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런 집요한 천착에서 공도 과도 나왔다. 비록 ≪공양전≫이 역사 고증에 소홀하고 이로 인한 억측이 적지 않지만 경문에 대한 훈고와 조례를 밝힌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양전≫이 전해진 지 이미 2000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공양전≫과 공양학은 황제를 위해 사용되기도, 중앙 집권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유신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변법개제가 공자의 뜻이라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런 역정(歷程)에서 ≪공양전≫과 공양학은 중국 정치사 학술사 사상사 경학사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경학의 시대는 끝났지만 ≪공양전≫은 우리에게 과거의 중국과 미래의 중국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본다.
200자평
공자가 정리한 노나라의 사서(史書) ≪춘추≫는 유가 5경 중 하나로, 역대 왕과 선비들의 길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간략하게 기록된 ≪춘추≫를 연구해 각각의 관점에서 해설한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춘추좌씨전≫을 춘추 삼전이라고 한다. ≪춘추공양전≫은 ‘대일통(大一統)’,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드러낸다. 역대 왕들이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공양학을 적극 장려한 이유다.
지은이
<예문지>는 ≪공양전≫의 저자에 대해 제(齊)나라 공양자(公羊子)라고 했는데 안사고(顔師古)는 공양자의 이름을 고(高)라고 했다. 하휴(何休)는 ≪춘추공양전해고(春秋公羊傳解詁)≫에서 “그 학설이 구두로 전해지다가 한(漢)나라에 이르러 공양씨(公羊氏)와 그 제자 호무생(胡毋生) 등이 처음으로 죽백(竹帛)에 기록했다”고 했다. 서언(徐彦)은 ≪공양전소(公羊傳疏)≫에서 그 전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하(子夏)가 공양고(公羊高)에게 전했고, 고가 그 아들 평(平)에게 전했고, 평이 그 아들 지(地)에게 전했고, 지가 그 아들 감(敢)에게 전했고, 감이 그 아들 수(壽)에게 전했다. 한나라 경제(景帝, 재위 BC 157∼BC 141) 시기, 수가 그 제자 제나라 사람 호무자도(胡毋子都, 호무생의 이름)와 함께 죽백에 기록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공양전≫에는 ‘자심자왈(子沈子曰)’, ‘자사마자왈(子司馬子曰)’, ‘자녀자왈(子女子曰)’, ‘자북궁자왈(子北宮子曰)’, ‘노자왈(魯子曰)’, ‘고자왈(高子曰)’, ‘자공양자왈(子公羊子曰)’과 같이 여러 전수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자하왈(子夏曰)’은 없다. 자하의 이름을 빌려 위상을 높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공양전≫은 공양씨 집안을 주축으로 전해졌고 공양고의 현손 공양수가 제나라 사람 호무자도와 함께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옮긴이
박성진(朴晟鎭)은 성균관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북경사범대학(北京師範大學)에서 ≪춘추좌전(春秋左傳)≫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계속 선진양한(先秦兩漢) 시기의 고전을 연구해 왔다. 현재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발표 논문으로 ≪좌전(左傳)≫의 사상 경향, ≪곡량전(穀梁傳)≫ 고사 초탐, ≪춘추(春秋)≫에 대한 ≪공양전(公羊傳)≫ 해석의 경향성, ≪춘추(春秋)≫의 인용과 정치화 시론, 한대(漢代) ≪사기(史記)≫의 전파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역서로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 있다.
차례
권1 은공(隱公)
권2 환공(桓公)
권3 장공(莊公)
권4 민공(閔公)
권5 희공(僖公)
권6 문공(文公)
권7 선공(宣公)
권8 성공(成公)
권9 양공(襄公)
권10 소공(昭公)
권11 정공(定公)
권12 애공(哀公)
원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 경 ] 元年, 春, 王正月.
원년, 봄, 왕의 역법(曆法)으로 정월.
[ 전 ] 원년은 무엇인가? 임금이 즉위한 첫해다. 봄은 무엇인가? 1년 사계절의 처음이다.
경문에서 말한 왕은 누구인가?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다. 왜 왕을 먼저 말하고 정월(正月)을 뒤에 말했는가? 왕이 정한 역법에 따른 정월이기 때문이다. 왜 ‘왕정월’이라고 했는가? 주나라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천하를 하나로 만들었음(大一統)을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