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계용묵은 핍박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으로 당대 현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고발했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개인이 지닌 도덕적 가치 자체가 현실에 대해 아무런 힘과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선하디선한 개인은 필사적인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현실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갈 뿐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가로막는 사회 구조적 폭력이 깔려 있다. 가령 소작농과 지주의 관계를 다룬 <최 서방>을 보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빚만 남은 딱한 사정이 나온다. 탈곡하고 추수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순간이 미처 갚지 못한 빚에 빚만 더하는 형국으로 바뀌게 된다. 오직 “이러한 비인도뎍이요 비룬리뎍인 행동에는 조곰도 눈떠보지 안는 그에게는 밥이 생기지 안엇다.” 노력한 만큼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먼 풍문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최 서방처럼 우직한 이들만이 이런 현실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람을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의심을 못 가지는 것이 특색”(<마부>)이며 “하여야 될 일로 눈에 띄이기만 하면 몸을 아끼는 일이”(<백치 아다다>) 없지만 현실은 그들을 버린다.
계용묵의 소설은 선한 인간형과 사악한 사회의 대립 항으로 다양하게 변전한다. 최 서방, 백치 아다다, <인두지주>의 경수와 창오, <마부>의 용팔이 등의 인물은 착실하게 현실을 살아가려는 인물 유형이다. 가장 맑은 영혼은 그러나 곧 혼탁한 사회에 의해 침식당한다. 이들 영혼의 맑음은 오직 잔혹한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배색이다. 인물이 깨끗할수록 사회는 자신의 촉수를 감출 수 없이 드러낼 터다. 인물들의 백치성(白痴性)은 더럽혀질 운명을 감내하기 위해 제물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계용묵의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에서 아다다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준 욕망으로 인해 파괴된다. 아다다의 삶에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역설적 상황이 가혹하게 찍혀 있다. 부족한 것이 채워져야 행복한 게 아니지만 아다다의 주변인들은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양화와 온떼루에 투기하야” 아다다의 남편이 맞게 된 물질적 풍요는 예쁜 여자와 재산을 향한 새로운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다다는 버려진다.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좇아서 회전하지만 그 궤적 어디에도 진정한 행복이 놓여 있지 않다. 중요한 점은 어떤 것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욕망하는지를 배우는 자세다. 그러나 사회체제는 오직 인간의 욕망을 부풀리고 확장해서 호도한다. 이걸 소유하는 순간 마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백치 아다다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말 더듬는 아다다의 목소리는 진정한 행복과 욕망에 대해 제대로 귀 기울지 않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개별적인 가치와 소망은 억압적 사회기제하에서 아다다의 목소리처럼 끊어지고 분절되어 소멸한다. 우리는 자그마한 행복과 소망에 대해 말할 때조차 더듬거린다. 거세된다. 당연하게도 잘못된 욕망이 밟아대는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어놓아야 한다. 가련한 아다다는 자신의 불행이 돈 때문인 줄 알고 수룡이가 힘들게 번 돈을 모두 바다에 버린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의 가치를 상품으로 환산하고 수량화된 욕망의 덫을 놓는 사회체제에 있다. 화폐를 향한 아다다의 적의는 그래서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계용묵이 제시하고 있는 희망은 하루하루 품팔이로 살아가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생의 저점은 지옥을 현실에서 시연한다. 그러나 무기력한 조건이 결코 인식의 성숙을 빼앗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배움에 있다. 현실에 무릎 꿇어도 희망은 절망에 대한 자각과 함께 온다. 경험은 우리를 살찌우고 희망은 문제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문학 속에서의 수많은 인물의 선한 패배는 배움을 선사한다. 어떤 면에서 문학은 스스로의 패배를 승인함으로써 현실을 향한 강한 울림을 낼 수 있다. 마부 일을 열심히 해서 번 돈을 초시에게 다 빼앗기고 그의 계략에 걸려 붙잡혀 가는 용팔이(<마부>), 영세의 말만 믿고 사랑하는 자식을 전쟁에 보냈다가 영영 사별하게 된 선달(<바람은 그냥 불고>)의 모습은 자각의 편린으로 가슴 아프게 아로새겨진다. 오직 앞으로 올 미래가 아니라면 이들의 희생은 충분히 애도될 수 없고 그 미래를 위해 기꺼이 오늘 죽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지불 유예된 수표는 희망의 편지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200자평
계용묵은 핍박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으로 당대 현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고발했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개인이 지닌 도덕적 가치 자체가 현실에 대해 아무런 힘과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지은이
계용묵(桂鎔默, 1904∼1961)은 1904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했다. 1남 3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신학문에 반대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 한학을 배워야 했다. 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순흥 안씨(順興安氏) 정옥과 혼인했다. 졸업 후 상경해서 1921년 중동학교, 1922년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그 후 고향에서 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가서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공부한다. 그러나 가산이 기울자 1931년 귀국해서 조선일보사 등에서 일한다. 그는 1925년 시 <봄이 왔네>로 <생장>지 작품 현상공모에, 같은 해 단편 <상환(相換)>으로 <조선문단>에 당선된다. 그리고 1927년 단편 <최 서방>이 <조선문단>에 다시 당선된다. 일본에서 귀국하던 해에는 장편 ≪지새는 달 그림자≫, 중편 <마음은 자동차를 타고>를 탈고한다. 1948년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창립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작가로서의 본업에 성실한 일생을 보낸다.
계용묵의 작품 경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먼저 <최 서방>, <인두지주> 등을 발표한 초기의 경향 문학적 흐름을 들 수 있다. 지주와 소작인의 첨예한 대립적 관계를 착취의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식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35년 <조선문단>에 대표작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전보다 정밀하고 정제된 문장미와 기교를 보여준다. <장벽>(1936), <병풍에 그린 닭이>(1936), <청춘도>(1938), <신기루>(1940)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생산된 작품들이다. 세 번째는 해방 공간의 혼란했던 실상을 그린 시기다. 해방 직후 귀국한 이들의 생활을 서술한 <별을 헨다>(1946)는 삶의 좌표를 상실한 당대 현실을 파헤치고 있다. 또 <바람은 그냥 불고>(1947)에서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성공한 세태 영합적 인물을 고발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 세계에 대해 깊은 간극을 지니는 인물로 상징화한다. 그들은 기질과 성격, 경제적 조건 등으로 인해 현실에서 상처받고 마모되어 가곤 한다.
계용묵은 개인에게 적대적인 사회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적 정황을 적절하게 분석해 낸다. 가시적인 해결보다는 현실의 정확한 면모를 보여주는, 문학의 현실 반영적 진실에 충실한 작가다. 때문에 당대 서민 생활상에 대한 충실한 재현은 세세한 생의 편린을 담아내는 소중한 작업이라 할 만하다. 또한 평안도 사투리와 우리말에 대한 발굴을 통한 사실적 디테일의 복원은 문학사적으로도 평가받을 지점이다. 작가는 1955년 수필집 ≪상아탑≫을 출간하며, 1961년에는 <현대소설>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타계한다.
엮은이
강상희는 1988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모더니즘 소설론≫,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내면성 연구>, <타자의 문학적 담론>, <소설의 시각과 근대> 등이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부교수로 지내고 있다.
해설자
해설을 쓴 이훈은 경희대 국문과에서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청준 소설의 알레고리 기법 연구>(1999)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7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에 평론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평론으로 <지옥의 순례자, 역설적 상실의 제의 − 편혜영론>, <부재, 찰나, 생성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냉장고를 친구로 둔 인간, 피뢰침이 된 인간>, <생의 환상, 공전의 미학 − 박완서론>, <사랑을 부르는 매혹적 요구>, <부정의 부정−허혜란론>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 교사로 지내고 있다.
차례
최 서방
인두지주
백치 ‘아다다’
마부
바람은 그냥 불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다다는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밀녀 나려가는 무수한 그 지전들은 자기의 온갔 불행을 모다 거누워갖이고 다시 도라올 길이 없는 끝없는 한바다로 나려갈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꺼웠다.
그러나 그 돈이 완전이 눈앞에 보이지 않게 흘너나려 가기까지에는 아직도 몇 푼 동안을 요하여야 할 것인데 뒤에서 허덕거리는 발자욱 소리가 들니길내 도라다보니 수룡이가 헐덕이며 달여오는 것이 않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