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고원이 보여 주는 시작의 도정은 우주적 공간이라는 ‘바깥’의 사유를 근간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초기 시에서 ‘밤’의 이미지는 분명 암울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 시어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었다. ‘바다’와 ‘파랑’의 이미지와는 달리, ‘밤’과 ‘검은색’이 지니는 ‘부정’의 요소는 분명 어두운 우리의 근현대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인 법칙을 이루는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원의 시 세계가 그리는 현실 인식과 시어들이 형성하는 이미지와 그 의미들은 어떤 필연적 구심점을 향해 단선적 변화를 그릴 수 없을 만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요컨대 그것들은 극단적인 두 세계를 나누고, 구분 짓는 구성 요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받아들이는 구분의 확실성이 모호해지는 세계의 경계 위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해석을 바탕으로 시인의 시 세계에 보다 본질적이면서, 축약할 수 없는 긴 시간(‘기다림’)의 공간을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밤’의 어둠이 그리는 ‘밀도’와 ‘깊이’를 시간의 지평 위에서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황혼’ 무렵에 시작해, 동틀 무렵 자취를 감추는 어떤 것이다. 공간적 변화와 더불어 시간의 지평 속에서 시인은 어떤 ‘밤’의 또 다른 해석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이 세계의 ‘밤’이 그리는 어떤 본질적인 ‘열림’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의 경과에 따른 명확한 구획의 기준선을 어디에 둘 수 있을까? 그가 생전에 지구의 여러 장소들을 누볐던 것처럼, 그의 시작이 그 공간들의 공간성이 지니는 독특한 성격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또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실제로 어떤 역사적 지점들에 대해 반응하면서 ‘혁명’을 그리고 ‘바다’를 그렸던 한 시인에게서, 동시에 그 시인에게서 일관된 시어의 사용과 구문의 사용, 그리고 말과 시작을 향한 일관되게 작동하는 인식의 윤곽을 비교적 근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이 모호한 시인의 존재가 지닌 가능성에 대해서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 요컨대 그것은 헤겔의 역사 인식에 대한 낭시의 질문을 상기시킨다. 한 시인의 역사는 ‘동일성의 동일화 과정인가? 아니면, 동일성의 무한한 차이화의 과정인가?’ 그리고 그 물음의 지평에서 나는, 한 시인이 마침내 도달한 지점과 그가 처음 시작하는 지점(시 의식의 기원, 혹은 때때로 시인의 의식이 회귀하는, 귀환할 수밖에 없는 장소)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의 필연성(혹은 우연성)에 대해 보다 밀도 있는 탐색을 시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한 시인의 현실 인식과 삶의 문제, 그리고 그의 시작(詩作)과 역사, 역사의 역사성과 시인의 고유명이 제기하는 각각의 물음들과 그 물음들이 서로 얽히면서 생산하는 하나의 의미들 사이의 심원한 거리를 지시할지도 모른다. 결국 한 시인의 작품을 읽는다는 행위는 시인의 의식에 가능하면 가까이 접근한다거나, 시인의 시작의 비밀을 캐낸다는 다소 고전적인 해석의 의미를 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고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유명으로서 시인(‘고원’)이 지닌, 시 작품의 전체가 그리는 근원적 지점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그가 보여 준 존재론적 고투의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200자평
1950년대,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전후 모더니스트들이 태어난다. 그 가운데 시인 고원이 있다. 1964년 도미한 그는 외부에 있었기에 ‘국가’를 벗어나 새로운 공간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2008년 사망할 때까지 존재의 ‘바깥’을 향한 모험을 멈추지 않은 시인 고원의 시들을 엮었다.
지은이
고원(高遠, 1925∼2008)의 본명은 고성원(高性遠)으로 1925년 12월 8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587번지에서 태어났다. 1938년 양산 보통학교를 거쳐, 전주 북중학교(현 전주중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 시기 고원은 일제 치하의 공립 중학교 건물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발각되어 정학 처분을 받는 경험을 한다. 이 사건은 그 자신의 역사를 해방과 함께 찾아온 한국말의 소생과 발전의 역사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1948년 동국대학교 전문부 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 영문과 2학년에 편입학해 학업을 이어 가던 중, 이번에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고, 이미 두 권의 개인 시집을 갖고 있었던 고원은 1958년 3월에 가서야 학업(영문학)을 마무리하게 된다. 최초로 활자화한 시의 흔적은 1947년(혹은 1946년 초반) ≪습작시집 새움≫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집이다. 1952년 12월 그는 장호, 이민영 등과 3인 공동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협동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52년부터 ‘고원’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주간국제≫, ≪제일신보≫, 협동문화사의 아동지 ≪파랑새≫, ≪연합신문≫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문학 서클(‘구봉 문학회’)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1954년 시지(詩誌) ≪시작≫을 창간하고, 이해 12월 두 번째 시집(개인시집으로 제1시집) ≪이율(二律)의 항변(抗辯)≫을 시작사에서 출간한다. 이어 1956년 5월 제2시집 ≪태양(太陽)의 연가(戀歌)≫를 이문당에서 펴낸다. 그리고 같은 해 ‘영국 유학’ 경험을 쌓는다. 1959년에 고원은 ≪영미 여류 시인선≫, D. H. 로렌스의 ≪사랑의 시집≫ 등 번역 시집을 간행한다. 1960년 6월 제3시집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를 정신사에서 간행한다. 이후 고원은 ≪오늘은 멀고≫(동민문화사, 1963), ≪속삭이는 불의 꽃≫(신흥출판사, 1964), ≪미루나무≫(해외한민보사, 1976), ≪북소리에 타는 별≫(해외한민보사, 1979), ≪물너울≫(창작과비평사, 1985), ≪다시 만날 때≫(범우사, 1993), ≪정(情)≫(둥지, 1994), ≪무화과나무의 고백≫(창작춘추사, 1999) 등 총 12권의 시집과 ≪새벽별≫(태학사, 2000), ≪The Turn of Zero≫(Cross-Cultural Communications, 1974), ≪Some Other Time≫(Bombshelter, 1990) 등 한글 시조집 한 권과 영시집 두 권을 상재한다.
1964년 시인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문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학적 탐구’의 열망은 도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구된다. 1965년 미국의 아이오와대학에서 영문학 석사(MEA)를 받고, 그 이듬해까지 그의 학문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른다. 1966년 아이오와 시인협회 주관의 현상 공모에 대학부 1위로 당선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 ≪Kansan City Star≫ 신문 현상 시에 당선되는 영예를 얻는다. 이후 그의 미국 생활은 그야말로 문학적 출발점에서부터 추구했던 학문적 열정에 오롯이 바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뉴욕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 학위를 획득한 고원 시인은, 캘리포니아대학교 리버사이드(UC Riverside)의 대학 강단에서 은퇴할 때까지(1987∼1992), 그리고 2008년 1월 그의 문학적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문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의 열정을 보여 주었다.
엮은이
이석(李碩)은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에서 <김수영 시의 ‘주체’ 문제 연구>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현대시와 문학사이며, 특히 ‘현상학’을 주축으로 하는 철학적 사유와 문학 비평의 통섭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시(문학)와 역사성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
차례
≪시간표 없는 정거장≫
까마귀
鐵路
바다의 設計
마지막 편지
≪이율의 항변≫
하나만의 太陽과 하나만의 心臟
부르는 소리 있어
그날
圓舞를 위한 삼행시
소식처럼
황혼
≪태양의 연가≫
푸라타나스
어느 시간의 對位法
湖水가 더욱 푸른 시간을
夜曲
너는 나의 혁명
傲慢한 영원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碑文
템즈 江邊
一九五七年 봄
運河
파도에 부쳐서
밤의 계단
벽과 창문 사이를
來日의 記憶
손
내가 나와 헤어지는
죽음의 계단
≪오늘은 멀고≫
눈의 抒情
글라디올라스
오늘은 멀고
밤사람
바람꽃
純粹 抽象
同意
第百의 旗
四月의 星座 아래
≪속삭이는 불의 꽃≫
씰리만 海邊에서
숨은 太陽
사랑의 函數
時間의 文法
<長詩> 씨와 꽃
≪미루나무≫
旗의 의미
새벽 세시의 거울
變成
나비와 불
창문
돌
백일 전에
바워리(Bowery)
북
답장
≪북소리에 타는 별≫
라인 강에 부쳐
판문점
≪물너울≫
물길
항아리
객지에서 소를 보면
불
샘물의 줄기
눈
입
금강산
물너울
아직도 숨을 쉰다면
≪나그네 젖은 눈≫
모나리자의 손
≪다시 만날 때≫
구름 울음
베를린의 벽
새가 울면 달이 지고
마띠스의 물
높고 멀어서
검은 눈물로 거듭나
그날로 돌아가자는 날
≪정≫
바람·2
줄넘기
말의 바다
작은 섬
니오베의 돌
≪무화과나무의 고백≫
하늘이 보인다
하늘이 눈물이라면
어둠이 앓는 소리
어디서 새가
어머니의 하늘
새벽길
글마루에서
당신이 올 때는
산의 시
대화
베드로 생각
고요한 멈춤
≪춤추는 노을≫
안녕
그림자 없는 가로등
그림자 그림
실존
시간의 몸짓
종려나무 벌판
≪시간의 색≫
오늘 처음일까만
증언
열린 밤
시간의 색
하나
꽃잎은 져도
등나무 줄기
하늘은 늘 하늘이다
유고 시
별의 눈이 내려와
공주 꽃
하늘은 높고 멀어도
외다리 갈매기
잠시
향기의 소리
빛을 터뜨려
땅 기운의 만남
바람 자국
대답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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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임학수 시선≫ 임학수 지음, 윤효진 엮음
≪초판본 임화 시선≫ 임화 지음, 이형권 엮음
≪초판본 장만영 시선≫ 장만영 지음, 송영호 엮음
≪초판본 전봉건 시선≫ 전봉건 지음, 최종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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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정지용 시선≫ 정지용 지음, 이상숙 엮음
≪초판본 정한모 시선≫ 정한모 지음, 송영호 엮음
≪초판본 조명희 시선≫ 조명희 지음, 오윤호 엮음
≪초판본 조벽암 시선≫ 조벽암 지음, 이동순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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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황석우 시선≫ 황석우 지음, 김학균 엮음
책속으로
●하나만의 太陽과 하나만의 心臟
(그 속에 내가 사는 당신의 눈은
실상 당신께서
준 일이 없더라도 좋은 것입니다)
저 수많은 별들이 뚝뚝 떨어져
모조리 떨어져
행여 별 없는 하늘 아래 엎드릴지라도
오직 하나만의 태양은 헛되지 않어
이 충만한 동맥이 콸콸 터져
어쩔 수 없이 터져
행여 비웃음이 남을지라도
내 하나만의 심장을 다져 가리라
밤이면 밤을 지켜 촛대를 받쳐 들고
낮이면 산에 올라 바위를 구을리고
먼 길 위하여 스스로 어려운 시험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저질러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이 또한 어쩔 수 없던 지난날의 허물이기에
비밀은 없이 더구나 조건도 불편도 없이
이렇게 즐거이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냐
여기서 또 무엇이 있으며
여기서 또 무엇이 없는가
하나만의 태양과
하나만의 심장과
그리고 그것을 비치는 드맑은 눈과
그리하여 더 어려운 시험만이 있으라
(그 속에 내가 사는 당신의 눈은
실상 당신께서
준 일이 없더라도 좋은 것입니다)
●너는 나의 혁명
그늘은 태양이
갈망에 겨운 세월 위에 던지는 씨니씨즘이었다
그늘 속에는 이름만의 공화국처럼 서운한 얼굴들이
그날그날 휴식을 구하는 풍속이 있었다
도피와 굴복의 창백한 그늘에 엎뎌
처참한 自虐의 숨소리가
어느 식민지 유행가를 닮아 갔고
이따금 비라도 내릴 때면
서글픈 자기기만을 위안 삼았다
비굴한 고독이여
그러나 태양은 그늘이
종내 갈망의 머리를 드는 표적이었다
차마 뜨거운 가슴 파아랗게 트인 나의 사랑
자유의 해변에서 너는 내 보람을 영도하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혁명이었다-
●말의 바다
가물가물한 고향과
번쩍거리는 타향을 우리 앞에
이어 놓은 바다는 하나,
이때 저때 물빛이 다른 대로
빛깔의 바다가 퍼진다.
날마다 빛깔의 바다에는
밤이 새로 빠져서 색이 된다.
지금은 고향도 타향도
따로 있지 않고
두 가지 말로 이어져서
사방이 말의 바다다.
말의 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말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말의 바다로 빨려 든다.
색깔을 줍고
말을 줍고
3차원의 바다가
또 새롭다.
●어머니의 하늘
당신이 아무 말 없이
오래오래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당신 맘을
내가 안다.
당신은 어머니를
대하고 있다.
그럴 때 내 맘속에도
어머니가 가득 차서
당신의 눈을 보면
하늘에 비치는 모습을
보고 안다.
당신과 나는 똑같이
돌아가신 어머니들을
따로따로 보고 있지만
두 마음이 같은 하늘에서 만난다.
네 사람이 만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