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문학작품이 정치 상황을 포섭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미학적 방법론을 완성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거와 여론을 의식하며 눈치 보는 현대 정치인들은 문화의 흐름보다 더욱 빠르게 정치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남정현이 초기작을 발표하던 1960년대는 지금과 다르게 정치 상황의 변화 가능성이 희박했다. 사일구와 오일륙이 차례로 일어났고 반공과 독재가 보편화된 시기였다.
1960년대의 리얼리스트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를 비판하거나 중공업 중심으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저항하고자 했고 외세에 의해 형성되는 문화·경제적 예속 상태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그래서 1960년대 문학에는 부의 축적 과정에서 파생되는 개인의 도덕적 타락상과 외세 개입에 의해 형성되는 정치·사회·문화·경제적 혼란상이 자주 나타난다. 외세는 당대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할 수 있는 키워드인데 남정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외세에 대한 반발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 <너는 뭐냐>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가치관의 전도 상황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주된 초점 화자로 등장하는 남편 관수는 외국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데 경제적으로 무능하다. 아내 신옥은 무역회사의 사장 비서로 일하면서 바깥에서는 독신으로 행세하고, 안에 들어와서는 남편에게 애인을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애인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현대적 자유라 주장한다. 도덕적이고 건전한 관수의 이데올로기는 신옥의 속물적이고 왜곡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번번이 설복 당한다.
신옥은 ‘현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방 안에서 요강에다 대변을 보는 희극적 인물이다. 재래식 화장실에 바이러스가 많으니 청결한 요강에다 변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관수는 아침마다 아내의 변 냄새를 맡으면서도 그녀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그녀가 내세우는 ‘현대’를 마음속으로만 저주한다. 식모 일을 하면서 연예인 되기를 꿈꾸는 인숙, 라디오 드라마 줄거리를 외우는 데에는 천재적이면서 학교 공부에는 그렇지 못한 초등학생 경자와 명자의 태도는 신옥을 닮아 있다. 그들 역시 관수를 비웃고 조롱한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결말에 등장하는 의외의 사건을 통해 관수가 쾌감에 도달하면서 마무리된다.
남정현은 한 대담(對談)에서 <너는 뭐냐>의 결말에 등장하는 시위 군중이 사일구 혁명의 분위기를 상징한다고 했다. “너만 살면 제일이냐”, “사람대접을 해라”고 외치는 구호와 “인민을 학대하던 일체의 건물과 일체의 제복이 인민들의 그 피를 토하는 함성과 주먹방망이에 의해서 산산히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다”는 문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 관수는 뜻밖에도 신옥을 목격한다. 신옥은 애인으로 짐작되는 사람과 함께 고급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자동차에서 클랙슨이 울리자 시위 군중이 유리창을 깼고, 차 주인이 “패스포드”를 내민다. 권위로 압도하려 하는 것이다. 군중이 야유하고 비웃는다. 이번에는 차에서 신옥이 화를 내며 내린다. 군중들은 신옥에게 “너는 뭐냐”라고 꾸짖는다. 관수는 신옥이 “현대”를 들이대면서 군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예상 밖이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빈다. 관수는 문득 다가온 깨달음에서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너는 뭐냐”라고 외치며 즐거워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의외의 결말에 의해 해소되는 것과 함께 인물의 행동이 과장되고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는 것은 남정현 소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동안 당해왔던 억눌림을 보복하기 위해 관수가 신옥의 멱살을 잡고 “너는 뭐냐”라고 외치는 행위는 과장되어 보인다. 이런 식의 서사 진행은 연극에서 말하는 바 과잉 연기와 유사하다. 연극에서 나타났던 과잉 연기(ham acting)는 과장되고 부자연스런 몸짓이었다. 이는 코믹한 요소를 증가시켜 희화화를 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방식이었는데 그것에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개입한다.
200자평
1960년대의 리얼리스트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를 비판하거나 중공업 중심으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저항하고자 했고 외세에 의해 형성되는 문화·경제적 예속 상태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외세는 당대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할 수 있는 키워드인데 남정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외세에 대한 반발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 <너는 뭐냐>, <분지>, <허허 선생 3−귀향길>, <현장>을 수록했다.
지은이
남정현은 1933년 충남 당진군 정미면 매방리에서 아버지 남세원과 어머니 이낙년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을 일제 강점기에 보내고 5학년 때 팔일오 해방을 맞이했으며 17세 때에 육이오를 목격했다.
남정현이 소설가로 등단한 것은 1958년 9월 단편소설 <경고 구역>을 ≪자유문학≫에 투고해 소설가 안수길의 추천을 받고, 1959년 2월 <굴뚝 밑의 유산>으로 ≪자유문학≫에 추천 완료되면서였다. 그는 등단 이후 1965년 분지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매해 중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서구 문화의 유입에 의한 가치관의 전도 상황을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 중심으로 서술해 풍자했던 중편소설 <너는 뭐냐>는 1961년 제6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너는 뭐냐>의 결말에 등장하는 군중의 시위는 1960년의 사일구 혁명을 연상케 한다. <모의 시체>, <인간 플래카드>, <기상도>, <현장>, <부주전 상서>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남정현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체제 저항적이고 외세를 비판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약소국, 주변국의 일원으로서 한민족이 겪어왔던 외세 강압에 의한 영향을 한국 역사를 인식하는 기본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민족적 양심’의 발현에 대한 희망, 자주에 대한 염원은 그러한 역사 인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작가 이력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분지 필화 사건이라 불리는 <분지> 사건이다. <분지>는 남정현이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북한에서 그 작품 전문을 당 기관지인 <통일전선>(5월 8일)과 <조국통일>(7월 8일)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남정현은 반공법(지금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판에서 7년을 언도받았고 2년 동안 실형을 살았으며 1967년 선고유예 판결로 석방되었다. 당시 남정현은 “이 소설은 당신이 쓴 게 아니라 북괴의 어떤 인사가 써서 당신에게 건네주어 발표시킨 것이 틀림없으니 그 경위를 밝혀라”라는 심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자세한 사항은 장석주, “반공법의 족쇄에 묶인 <분지>”,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3≫, 시공사, 2000. 234∼239쪽 참조). 남정현은 반공법 위반으로 우리 역사상 처음 구속 수감된 작가였다. 당시 공소장 작성자는 <분지>의 내용을 문제 삼으며 “북괴의 대남 적화 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재판정에서 문학의 자유를 변호하고 증언했던 인사는 한승헌, 이항녕, 안수길, 이어령 등이었다.
남정현은 석방 이후 장편 ≪코리아 산책≫을 연재했으며 풍자연작소설 <허허 선생>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허허 선생>은 일제 때는 일제에, 해방 후에는 미국에 동조해 부를 축적했던 물신주의자를 허허 선생이라 명명해 풍자한 소설이다. 허허 선생은 남정현의 용어로 말해 ‘민족적 양심’이 없는 인물이다. 남정현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긴급조치 해제로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 생활과 기관의 심문 과정에서 받았던 고통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아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력과 관계된 그의 작가 이력은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정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창작집으로 ≪너는 뭐냐≫(1965), ≪굴뚝 밑의 유산≫(1967), ≪준이와의 삼 개월≫(1977), ≪허허 선생≫(1978), ≪허허 선생 옷 벗을라≫(1993)가 있다. 장편소설로 ≪사랑하는 소리≫(1978)가 있다. 작가 이력을 배제하고 작품을 읽는다면 우리는 외설과 풍자의 경계선상에서 독특한 문학 세계를 이루고 있는 남정현 소설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 설정과 과장된 인물 행동, 의외의 결말이 등장하는 점은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일관되는 특징이다. 남정현은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의 고문과 펜클럽 이사를 역임했으며 2020년 12월 21일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엮은이
박금산의 본명은 박영준이다.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년대 한국 장편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 <공범>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연작소설 ≪바디페인팅≫이 있다. 2009년∼2010년 ≪문학웹진ㆍ뿔≫에 장편소설 ≪고원을 달리는 비행기≫를 연재했다. 연구서로 ≪소설과 우연의 질서≫, ≪장편 미학의 주류와 속류≫, ≪한국 현대 작가와 불교≫(공저)가 있다.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 중이다.
차례
너는 뭐냐
분지(糞地)
허허(許虛) 선생 3-귀향길
현장(現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작품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어머니
제발 몸을 좀 그렇게 떨지 마십시요. 미관상 과히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뭐 제가 지금 죽을 것 같아서 그러신다구요. 참 걱정도 팔자시군요. 적어도 홍길동(洪吉童)의 제십대 손이며 동시에 단군의 후손인 나 만수(萬壽)란 녀석이 아무렴 요만한 정도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쉽사리 숨을 못 쉬게 될 것 같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요. 누가 보면 웃습니다. 저는 설령 이보다 더한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처럼 그렇게 용이하게 미치거나 죽어 없어질 시시한 종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렇다고 저는 물론, 제 목숨이 처한 지금의 이 절망스러운 판국을 조금이라도 부인하거나 변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좀 속되게 말하자면 풍전등화 격이라고나 할까요. 저를 포위하고 있는 객관적인 정세로 미루어보아서 말입니다. 제아무리 미련한 놈의 소견으로 보아도 제 목숨이 지금 이 마당에서 신(神)의 부축이 없이 인간만의 힘으로 어떻게 살아나리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겠지요. 천하가 다 소상하게 알다시피 저는 지금 독 안에 든 쥐니깐요. 어디 원 눈꼽만 한 면적이나마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 보입니까. 자, 보십시요. 저를 상대로 한 저 삼엄한 무장과 경비(警備)를, 저의 이 주먹만 한 심장 하나를 꿰뚫기 위하여 정성껏 마련해 놓은 저들의 저 엄청난 군비의 숫자를 말입니다. 지금 제가 숨어 있는 이 향미산(向美山)의 둘레에는 무려 일 만여를 헤아리는 각종 포문과 미사일, 그리고 전미군(全美軍) 중에서도 가장 밀접하고 정확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미제 엑스 사단(師團)의 그 늠름한 장병들이 신(神)이라도 내포할 기세로 저를 향하여 영롱하게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것입니다.
−<분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