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미 시의 시적 전통과 중국 고대시의 영향
리영리는 1980년대 이후 작품 활동 내내 매릴린 친, 캐시 송, 명미 김 등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아 온 중국계 미국인 시인이다. 아시아계 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2005년에 《노튼 시 선집(Norton Anthology)》에 시가 수록되면서 정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시인은 서구 또는 영미의 시적 전통과 이백이나 두보 같은 고대 중국 시인들의 전통 및 기법을 혼합하여 자신만의 분명한 시 세계를 구축한다. 시인의 스승 제럴드 스턴은 리영리의 시가 “숭고함이 그가 집중하는 영역에 들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는 의지, 언어에 대한 헌신, 거룩함에 대한 믿음”을 잘 보여 준다고 평하면서 이는 존 키츠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주요 유럽 시인들의 전통을 상기시킨다고 주장한다. 리영리도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에밀리 디킨슨, 로버트 프로스트, 월트 휘트먼 등 전통적인 미국 시인들을 꼽는다. 또 조용하고 명상적이면서도 구어적 어조와 독백, 간결하지만 힘 있는 리듬의 사용은 이백과 두보의 영향을 잘 보여 준다. 특히 리영리 시 세계 전반에 걸쳐 침묵의 사용이 두드러진 기법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 시인들의 시를 읽고 외우게 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기억의 시인
리영리는 “기억의 시인(poet of memory)”이다. 그는 기억하는 행위와 기억의 작용을 시적 특성인 은유적 사유 속에서 인상 깊게 표현함으로써, 왜 그가 기억을 다름 아닌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루는지 이해하게끔 한다. 시집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도시》에 실린 아버지에 관한 시들은 이렇게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진동하는 인간 심리와 정서를 조명한다. 또 이 시집의 여러 시가 고통의 기억과 그것의 망각 사이에서 고뇌하는 화자를 보여 준다. 기억은 소중한 이의 부재를,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이 시간과 죽은 것>에서 화자의 트라우마, 즉 유령 같은 형의 출몰(haunting)은 화자로 하여금 특정 시공간에 관계없이 형의 죽음, 상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화자에게 이 “죽음”은 생존한 자신의 고통(상실감, 우울감, 무력감)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일깨운다. 부재하는 형의 출몰이 화자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증명하는 역설이다. 이렇게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반복적인 조우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의 반복적인 조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트라우마의 반복은 “자신의 생존을 주장하려는 시도 그 자체”다.
200자평
미국 내 소수 문학인 중국계 미국 시인 리영리의 초기 시집이다. 전미도서상,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상 등을 받았으며 아시아계 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2005년에 《노튼 시 선집(Norton Anthology)》에 시가 수록되면서 정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1990년 출간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도시》는 “관조적이며 사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정적인 자아가 등장하면서도 개인성에만 함몰되지 않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기억과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책에는 시인이 직접 쓴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시와, 시인의 시론이 담긴 문예지 인터뷰 기사 “시인과의 대화”를 함께 실었다.
지은이
리영리는 아버지가 망명 생활을 하던 1957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카르노(Sukarno)가 반중국 정서를 확산시키면서 아버지가 1년 반가량 정치범으로 복역한다. 1959년 그가 출옥한 후 리영리의 가족은 인도네시아를 탈출해 마카오에 잠시 체류한 뒤, 몇 년간 홍콩과 일본을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피츠버그대학(the University of Pittsburgh)에 진학해서 시인의 초기 경력에 중요한 멘토가 되는 시인 제럴드 스턴(Gerald Stern, 1925∼2022)을 만나 시 쓰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 피츠버그 대학을 졸업한 뒤 1980년 애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와 1981년 뉴욕주립대 브록포트 캠퍼스(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rockport)에서 문예창작 석사과정(MFA) 및 작가 워크숍(Writer’s Workshop) 과정을 거치며 시인으로 성장했다. 이후 시인으로 활동하며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와 아이오와 대학교(the University of Iowa) 등 여러 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가르쳤다. 한편 시인은 앞서 언급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상을 비롯하여 미국시인협회(the Academy of American Poets) 펠로십, 래넌 문학상(Lannan Literary Award), 휘팅 작가상(Whiting Writer’s Award), 푸시카트 상(Pushcart Prizes), 구겐하임 재단 펠로십(Guggenheim Foundation fellowship) 등 다양한 상을 받았으며, 1998년에서는 뉴욕주립대 브록포트 캠퍼스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the honorary degree of Doctor of Humane Letters)를 받기도 했다. 시집 《Rose》,《The City In Which I Love You》, 《Book of My Nights》, 《Behind My Eyes》, 《The Undressing》 등이 있다. 현재 아내 도나 리와 함께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고, 슬하에 아들 둘이 있다.
옮긴이
김성훈은 현재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부교수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에서 공부했다. 최근의 영미문학 작품을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고찰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현실 세계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다루면서도 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는 작품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사유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며, 깨달음과 교훈을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특별히 우리의 실제적인 사고와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지니는 것은 시라고 믿으며 이 믿음을 학생, 동료 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한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네이티브 아메리칸,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퀴어, 난민 및 망명자)의 인권과 문학, 이른바 저항문학, 그리고 생태주의 관련 문학이 주요 연구 관심사이자 업적이었다. 포크송과 힙합음악 관련 장르들과 구전전통(Oral Tradition), 그리고 현대 미국 시 사이의 친연성과 경계에 대한 연구, 여기에 연계되는 감정 또는 정동적 언어들이 또 다른 관심 분야다. SAIL, AIQ, MELUS, DSH와 같은 다수의 저명한 국제저널에 학술 논문을 출판했으며, 조이 하조의 시집 《미친 사랑과 전쟁 속에서》와 사이먼 오티즈의 《샌드크리크로부터(From Sand Creek)》를 번역, 지식을만드는지식을 통해 출판했다. 또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캐서린 정(Catherine Chung)의 장편소설 《다시 만난 날들(Forgotten Country)》과 캐시 캐루스(Cathy Caruth)의 트라우마 비평서 《소유하지 못한 경험》, 조이 하조의 최근 시집 《아메리칸 선라이즈(American Sunrise)》를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차례
I
치열한 이야기들 1
치열한 이야기들 2
치열한 이야기들 3
치열한 이야기들 4
치열한 이야기들 5
치열한 이야기들 6
치열한 이야기들 7
II
추궁
이 시간과 죽은 것
일어나, 내려가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소리 높여 읽으신다
이 미합중국의 새로운 시민을 위해
폐허와 함께
III
이 방과 여기 모든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도시
IV
기다림
이야기
굿나이트
너는 노래해야 한다
나 여기 있어
마지막 존재
쪼개기
부록 : 시인과의 대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하지만 나는 이 꽃들을 바라보고, 이들은
내 마음을 움켜잡는다.
이 꽃들을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듯이 나는 이들을
꿈꿀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 어지럽고, 세상에
그대로 걸린 마음을 추스를 수
없듯이.
마음은 시간으로
갈라져 들어가
꽃 피는 한 송이,
장미
(…)
–<치열한 이야기들 4> 중
(…)
어디서 그토록 어린 네가 그런
희생을 배운 걸까? 지금
사과 떨어지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떨어지는지 봐! 소리 없이,
중력에 대한 어떤
볼멘소리도 없이, 그렇지만 끊임없이.
보라고!
밤에는 밑바닥이 없고, 우리의 하강에는
끝이 없어.
우리는 서로를 가지려 한동안 서로를 아파하는 거야.
–<굿나이트> 중
(…)
당신은 내
근육에 푸른 멍
자국을 남깁니다.
뼈가 고통의 근원을 껴안는 만큼,
나는 당신을 애타게 사랑합니다.
돌아옴의 형태인 당신의 몸, 빛줄기인 당신
머리카락, 체온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열린 부분, 그 연질의
과일을, 나를 잊게 하는
뒤집힌 분수의 순간순간을 삼킬 것입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도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