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정확한 번역과 충실한 내용으로 ≪도연명 전집≫ 정본을 추구하다
이 책은 특정한 판본을 저본으로 삼지 않고 ≪도연명집(陶淵明集)≫[경인문연각 사고전서(景印文淵閣四庫全書) 1063책)], 도주(陶澍) 집주(集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 [속수 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 1304책], 루친리(逯欽立) 교주(校注) ≪도연명집(陶淵明集)≫[중화수쥐(中華書局), 1987], 위안싱페이(袁行霈) 찬(撰) ≪도연명집전주(陶淵明集箋注)≫ [중화수쥐(中華書局), 2014] 등 여러 통행본을 두루 대조해 옮겼다. 그간 난해해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던 작품들도 여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정확히 번역해 내었으며, 번역은 직역을 위주로 하되 원문의 절주를 살리기 위해 우리말 번역도 가능한 한 글자 수를 가지런히 했다.
번역문과 대조해 볼 수 있도록 각 작품의 뒤에는 원문을 첨부했으며 운문의 운율을 즐길 수 있도록 우리말 독음을 달아 주었고 압운도 밝혀 두었다.
주석은 루친리(逯欽立) 교주(校注) ≪도연명집(陶淵明集)≫과 위안싱페이(袁行霈) 찬(撰) ≪도연명집전주(陶淵明集箋注)≫를 중심으로 여러 주석서를 참조해 필자가 추가했으며, 고증보다는 원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작품 뒤에는 작품 해설을 덧붙였는데, 주관적인 감상이나 평보다는 정확한 문맥 파악에 주안점을 두었다.
부록에는 도연명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록했으며, 특히 도연명 전문가인 위안싱페이 교수의 허락을 받아 도연명의 향년에 관한 그의 논문을 정리, 번역해서 실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도연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중심으로 도연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전체 해설에서 상세히 소개했다. 일반 독자는 물론 전문 독자들도 ≪도연명 전집≫을 통해 도연명의 다양한 면모를 깊이 있게 살필 수 있다.
이백과 백거이, 소동파의 롤모델 도연명
중국에는 수많은 시인들이 있었고, 그중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앞서, 아시아 전체에서 사랑받은 시인이 바로 위진 남북조 시대의 도연명이다.
이백의 시 속에 나오는 술과 대자연에는 도연명의 자취가 완연하고, 동파 소식은 도연명의 거의 모든 작품에 화답하는 <화도시(和陶詩)>를 남겼으며 한반도는 물론, 일본에서도 수많은 문인들이 <화도시>를 통해 도연명을 추숭했다. 또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모티프로 한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많은 화가들이 도연명의 생애와 작품을 회화로 남겼다.
오늘날에도 주변을 살펴보면 도연명에 대한 여러 책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참다운 삶, 전원으로 돌아가다
이렇듯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도연명, 그는 어떤 사람인가?
도연명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귀거래사>를 비롯한 그의 작품을 볼 때, 그는 몇 차례 관직에 나갔으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곧 그만두고 전원에서 평생을 소일한 ‘전원시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원’이라는 말을 그저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전원은 부유한 사대부들이 한가롭게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아니라, 힘써 노동하고 농부로서 살아가는 치열한 사유와 생존의 장이다. 이 때문에 그의 전원생활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는 상징적인 행위가 되었다.
도연명은 진나라 개국 공신의 후예로,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나 귀족과 군벌의 발호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대를 만난 그는 옳지 못한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시골 농부의 가난하지만 정직한 삶을 택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떳떳하지 못한 사회적 강자에게 경각심을 주고, 빈한하지만 성실한 약자에게는 자긍심을 주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전원생활이 아니라 혼탁한 시류에 맞서, 시대를 이끄는 선각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연명의 삶과 문학 세계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도연명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심원(深遠)한 사유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당시 유행이었던 꾸며 대는 글쓰기를 거부하고, 그저 잘 익은 생각을 가식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만나는 진정한 웰빙의 가르침
현실을 꿰뚫어 본 도연명이 꿈꾸었던 ‘도원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절실하다. 진정한 삶다운 삶을 찾아 ‘농촌’과 ‘도시’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을 하고 싶다면, 1500년도 넘는 옛적에 선각자로 앞서서 이 길을 걸었던 도연명을 만나 보기를 권한다. 그의 시문을 읽고 있노라면 도연명이 눈앞에 나타나 빙그레 웃으리라. “돌아오세요, 전원으로! 잘 오셨어요, 무릉도원으로!”
200자평
도연명은 이백, 두보, 소동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중국 시인이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장차 황폐하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로 시작하는 <귀거래사>와 동양의 유토피아를 제시한 <도화원기>는 누구나 한 번쯤 제목은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도연명은 불의한 부귀영화를 버리고 소박한 농부의 삶을 택한 전원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쉽고 평범한 말로 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유는 한없이 깊고 넓어 참다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도연명의 시와 문을 모두 모은 전집이다. 1권에는 사언시와 오언시를 실었다.
꼼꼼한 주석과 정확한 번역, 각 작품에 대한 해설은 물론,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한 상세한 전체 해설을 통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작품을 즐길 수 있게 했다. 부록에서는 도연명에 대한 여러 문헌상의 기록을 제공하고, 특히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국 학자 위안싱페이의 논문을 함께 소개해 도연명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또한 한시의 운율을 즐길 수 있도록 원문에는 한자 독음을 추가하고 각 시의 압운도 밝혀 주었다.
지은이
도연명(陶淵明)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근거해 도연명의 향년을 63세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참고할 때 최근 위안싱페이 교수가 주장한 76세설이 가장 타당하다.
도연명은 영화(永和) 8년, 서기 352년에, 현재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인근인 심양(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은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동진의 개국 공신이었고, 할아버지는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당시의 명사로 알려진 맹가(孟嘉)였지만 도연명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했다. 어려서부터 빈한해 직접 생업에 힘써야 했지만, 독서를 좋아해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산해경(山海經)≫ 같은 이서(異書)까지 즐겨 읽었다.
태원(太元) 5년(380), 비로소 출사의 기회가 주어져 주좨주(州祭酒)로 부임하지만 며칠 만에 그만두고서 귀가해 버렸다. 이후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근 20년에 달하도록 은거하다가, 398년 47세에 군벌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머잖아 모친상으로 귀가했다. 404년 53세에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이 되고, 405년에는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으로 옮겼다. 그가 군벌의 막하에 들어간 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는 불편한 심사가 가득 넘쳐 나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후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지만, 군(郡)에서 파견한 관리를 깍듯이 모시라는 말에 “나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저 시골의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郷里小兒)”라 하고,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영원히 돌아가 버렸다.
의희(義熙) 2년(406) 이후 도연명은 다시 농부로서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하게 영위해 나갔다. 408년 57세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조각배 속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고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창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411년 도연명이 60세가 되던 해, 예전의 상관인 유유가 태위(太尉)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도연명을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또 이 무렵 안연지와 약 1년 동안 교유했다. 420년, 도연명이 69세가 되던 해 유유는 마침내 칭제해 송(宋)을 개국했다. 당시 권세가 단도제(檀道濟, ?∼436)의 회유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시종일관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극심한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면서도 <걸식(乞食)>과 <자제문(自祭文)> 등을 쓰면서 죽음을 의연히 맞아들였다. 원가(元嘉) 4년(427), 7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옮긴이
양회석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문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 푸단대학과 양저우대학, 일본 교토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저술로 ≪망부운 : 백족 민간 설화와 정율성 오페라≫, ≪문(文)으로 읽는 노자 도덕경≫, ≪어느 동양학자의 산띠아고 까미노≫, ≪소리 없는 시, 소리 있는 그림≫, ≪서상기≫(역서), ≪인문에게 삶의 길을 묻다≫, ≪고시원−한시의 근원을 찾아서 1·2·3≫(공저) 등, 다수의 저역서와 논문이 있다. 한국중국희곡학회 회장, 중국인문학회 회장, 전남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이수진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도연명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 집필 중에 있다. 논문으로 <공맹(孔孟)의 생사관과 그 문학적 수용>(공저), <소식(蘇軾) 황주 시기 시·사에서의 생사 의식 연구>가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 중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차례
제1권 사언시(四言詩)
1. 멈춰 선 구름(停雲)
2. 시절의 운행(時運)
3. 무궁화(榮木)
4. 장사공에게 드리다(贈長沙公)
5. 정시상에게 화답하다(酬丁柴桑)
6. 방 참군에게 답하다(答龐參軍)
7. 농사를 권하다(勸農)
8. 아들에게 명하다(命子)
9. 돌아온 새(歸鳥)
제2권 오언시(五言詩)
10. 몸과 그림자와 정신(形影神)
11. 중양절 한가로이 지내며(九日閑居)
12. 전원의 거처로 돌아오다(歸園田居)
13. 사천에서 노닐며(遊斜川)
14. 주속지, 조기, 사경이 세 젊은이에게 보여 주다. 이때 세 사람은 모두 성의 북쪽에서 예의를 강의하고, 책을 교감하고 있었다(示周續之租企謝景夷三郞時三人共在城北講禮校書) 15. 먹을 것을 빌다(乞食)
16. 여러 사람들과 주씨 무덤가의 측백나무 아래에서 노닐며(諸人共遊周家墓柏下)
17. 초나라 가락의 원망하는 시를 방 주부와 등 치중에게 보이다(怨詩楚調示龐主簿鄧治中)
18. 방 참군에게 답하다(答龐參軍)
19. 5월 아침에 지어 대 주부에게 화답하다(五月旦作和戴主簿)
20. 연일 오는 비에 홀로 마시면서(連雨獨飮)
21. 거처를 옮기다 2수(移居二首)
22. 유시상에게 화답하다(和劉柴桑)
23. 유시상에게 답하다(酬劉柴桑)
24. 곽 주부에게 화답하다 2수(和郭主簿二首)
25. 왕 무군의 자리에서 객을 전송하다(於王撫軍座送客) 26. 은진안과 작별하며(與殷晉安別)
27. 양 장사에게 주다(贈羊長史)
28. 세모에 장 상시에게 화답하다(歲暮和張常侍)
29. 호 서조의 시에 화답해 고 적조에게 보여 주다(和胡西曹示顧賊曹)
30. 사촌 동생인 중덕을 슬퍼하며(悲從弟仲德)
제3권 오언시(五言詩)
31. 처음 진군장군의 참군이 되어 곡아를 지나며 쓰다(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
32. 경자년 5월 중에, 도성에서 돌아오다가 규림에서 바람에 막히다 2수(庚子歲五月中從都還阻風於規林二首)
33. 신축년 7월 휴가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밤에 가는 도중에 짓다(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途中作) 34. 계묘년 초봄에 농막에서 회고하다 2수(癸卯歲始春懷古田舍二首)
35. 계묘년 12월 지어 사촌 동생 경원에게 주다(癸卯歲十二月中作與從弟敬遠)
36. 을사년 3월에 건위장군의 참군이 되어서 도성으로 가다가 전계라는 지역을 거쳤다(乙巳歲三月爲建威參軍使都經錢溪)
37. 옛 살던 곳에 돌아와(還舊居)
38. 무신년 6월 중에 화재를 만나다(戊申歲六月中遇火)
39. 기유년 9월 9일(己酉歲九月九日)
40. 경술년 9월 중에 서쪽 밭에서 올벼를 수확하며(庚戌歲九月中於西田穫早稻)
41. 병진년 8월 중에 하손의 농막에서 수확을 하며(丙辰歲八月中於下潠田舍穫)
42. 술을 마시다(飲酒)
43. 술을 그쳐 볼까(止酒)
44. 술을 노래하다(述酒)
45. 자식을 책망하다(責子)
46. 깨달음이 있어 짓다(有會而作)
47. 연말 제삿날(蜡日)
제4권 오언시(五言詩)
48. 옛 시를 본뜨다(擬古)
49. 잡시(雜詩)
50. 가난한 선비를 읊다(詠貧士)
51. 두 명의 소씨를 노래함(詠二疏)
52. 세 좋은 신하를 노래함(詠三良)
53. 형가를 읊다(詠荊軻)
54. 산해경을 읽다(讀山海經)
55. 만가를 본뜨다(擬挽歌辭)
56. 구를 잇다(聯句)
책속으로
멈춰 지내는 곳은 읍내에 머물렀지만,
어슬렁어슬렁 스스로 한가롭게 그치네.
앉음은 높은 나무 그늘 밑에 그치고,
걷는 것은 사립문 안에 그치네.
맛있는 것은 채마밭 아욱에 그치고,
크게 기뻐함은 어린아이에 그치네.
평생 동안 술은 그치지 아니하나니,
술 그치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
저녁에 그치면 편히 잘 수가 없고,
새벽에 그치면 일어날 수가 없네.
날이면 날마다 그걸 그치고 싶으나,
몸의 순환이 그쳐서 다스려지지 않네.
居止次城邑,
逍遙自閑止.
坐止高蔭下,
步止篳門裏.
好味止園葵,
大歡止稚子.
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
暮止不安寢,
晨止不能起.
日日欲止之,
營衛止不理.
-<술을 그쳐 볼까(止酒)> 부분
흰머리가 양쪽 귀밑을 덮고,
피부가 다시는 실하지 않네.
비록 다섯 남자아이들이 있지만,
모두 종이와 붓을 좋아하지 않네.
아서는 이미 열여섯이건만,
게으르기가 정말 짝이 없네.
아선은 머지않아 열다섯이 되건만,
그러나 문장과 학술 좋아하지 않네.
옹과 단은 나이가 열셋인데,
여섯 더하기 일곱도 모른다네.
통이란 놈은 거의 아홉 살인데,
단지 배와 밤 따위만 찾네.
천운이 진실로 이 같다면,
잠시 잔 속의 술 권할 수밖에.
白髮被兩鬢,
肌膚不復實.
雖有五男兒,
總不好紙筆.
阿舒已二八,
懶惰固無匹.
阿宣行志學,
而不愛文術.
雍端年十三,
不識六與七.
通子垂九齡,
但覓梨與栗.
天運苟如此,
且進杯中物.
-<자식을 책망하다(責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