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동성파는 명실상부 청대를 대표하는 문인 집단이다. 여기서 동성(桐城)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남부에 있는 한 지역의 명칭이며, 동성파라는 호칭 역시 이 문파의 주축 인물들이 동성 출신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 대표 인물들로는, 방포(方苞, 1668∼1749), 유대괴(劉大櫆, 1698∼1780), 요내(姚鼐, 1732∼1815)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 세 사람은 모두 동성 출신이다. 관련 연구자들은 대개 방포를 동성파의 출발로, 유대괴는 그것을 성장시킨 인물로, 그리고 요내는 하나의 문파로 확립한 인물로 주로 거론한다. 이 중 특히 요내는 여러 글을 통해서 자신과 방포, 유대괴의 지역적, 학술적 인연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다. 이는 사실상 그들 간에 존재하는 학술적 연대 의식의 확인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동성이라는 지역을 넘어서서 하나의 학술적 집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요한 계보가 구축되었고, 동시에 그러한 사실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고 선전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여기에 더해 그들 모두에게 관통하는 문학 이론상의 공통점은 그 계보의 실질적인 내용을 채워 주고 있었다. 곧 학파의 시조인 방포가 주장했던 일련의 문장 이론들, 즉 문장은 아결(雅潔)하게 써야 한다든가 또는 의법(義法)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 등은 이후 지속적으로 동성파 문인들에게 수용, 계승되어 나갔다. 그렇기에 지역적 유대를 넘어선, 소위 ‘문통(文統)’, 다시 말해서 문장가의 계보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공통의 이론적 배경을 갖춘, 전통 있는 문학 집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방포로부터 요내, 그리고 요내의 문하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동성파나 청대 문단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갖추고 있다면, 요내 이후의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오여륜(吳汝綸, 1840∼1903), 설복성(薛福成, 1838∼1894) 등을 떠올리며 허전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해명하자면 동성파는 청대를 관통하며 오랜 시간을 지속했던 문파이고 그 영향력도 대단히 컸기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며 각 지역마다 많은 문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들만 해도 적지 않은 수다. 오히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문장 선집을 따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나, 현재 내게 주어진 임무는 동성파를 바로 이 한 권의 작은 책자에 욱여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 문인들의 작품을 한두 편씩 백화점처럼 벌여 놓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어서, 결국 차선책으로 증국번을 위시한 그 이후 동성파[이를 학계에서는 후기 동성파(後期桐城派)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상향파(湘鄕派)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대해서는 차후의 숙제로 남겨 두고, 우선은 동성파가 태동해 확립된 단계, 그래서 대개의 문학사에서 주요 작가로 꼽는 인물들을 망라함으로써 완성도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에서 다소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
200자평
청나라 때 안휘성 동성 지역의 문인들이 크게 문명을 떨쳤으니 이들이 바로 동성파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과거용 문체인 팔고문을 배격하고 당송 팔대가의 고문을 본받아 간결하고 진솔한 글을 쓰고자 했다. 방포, 요내, 유대괴 등 동성파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산문 48편을 골라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지은이
방포(方苞, 1668∼1749)
자는 영고(靈皐) 또는 봉구(鳳九)이고 만호는 망계(望溪)이며 안휘 동성 사람이다. 강희 50년(1711)에 대명세(戴名世)의 ≪남산집(南山集)≫에 서문을 썼다가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후에 복권되어 관직이 예부시랑(禮部侍郞)까지 이르렀다. 동성파의 비조로 떠받들어지며 저서로는 ≪망계문집(望溪文集)≫ 등이 있다.
유대괴(劉大櫆, 1698∼1780)
자는 재보(才甫) 또는 경남(耕南)이고 호는 해봉(海峰)이며 안휘 동성 사람이다. 동성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며, 저서로 ≪해봉문집(海峰文集)≫, ≪고문약선(古文約選)≫ 등이 있다.
요내(姚鼐, 1732∼1815)
자는 희전(姬傳)이고 호는 석포 선생(惜抱先生)이며 안휘 동성 사람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수관을 지냈고, 낙향해 강남 일대에서 서원 강학으로 일생을 보냈다. 동성파를 하나의 문파로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저서로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 ≪석포헌전집(惜抱軒全集)≫ 등이 있다.
매증량(梅曾亮, 1786∼1856)
자는 백언(伯言)이고 강소 상원(上元) 사람이다. 요내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고, 저서로 ≪백견산방문집(柏梘山房文集)≫이 있다.
관동(管同, 1780∼1831)
자는 이지(異之)이고 강소 상원(上元) 사람이다. 요내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고, 저서로 ≪인기헌시문집(因寄軒詩文集)≫ 등이 있다.
요영(姚瑩, 1785∼1853)
자는 석보(石甫)이고 호는 명숙(明叔)이며 안휘 동성 사람이다. 요내의 종손으로, 요내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다. 저서로 ≪중복당전집(中復堂全集)≫이 있다.
방동수(方東樹, 1772∼1851)
자는 식지(植之)이고 안휘 동성 사람이다. 요내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며, ≪한학상태(漢學商兌)≫, ≪소매첨언(昭昧詹言)≫ 등을 남겼다.
오덕선(吳德旋, 1765∼1840)
자는 중륜(仲倫)이고 강소 의흥(宜興) 사람이다. 요내에게 배웠고, 저서로 ≪문견록(聞見錄)≫ 등이 있다.
옮긴이
백광준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중국 난징대학 중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근래에는 근대 시기 동서 교류, 표상의 맥락, 중국 명·청 시기 문인의 삶과 담론의 문제 등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경계에서 중국을 읽다≫(공저), 번역서로 ≪원매 산문집≫이 있고, 논문으로 <19세기 초 서양 근대 지식의 중국 전파−‘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 in China’를 중심으로>, <현대 중국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소비와 해석−문화 표상으로서 ≪청명상하도≫ 읽기>, <후기 동성파(後期桐城派)의 지리 관념(地理觀念)−오여륜(吳汝綸)과 장유조(張裕釗)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차례
사랑과 그리움
돌아가신 어머니의 행장(先母行略)
풍대 유람기(游豐臺記)
형 방주 묘지명(兄百川墓誌銘)
아우 방림(方林)의 묘지명(弟椒涂墓誌銘)
낙향하는 왕약림을 떠나보내며(送王篛林南歸序)
작은할머님 장씨의 행장(章大家行略)
요내의 귀향을 배웅하며 주는 글(送姚姬傳南歸序)
학사 주균의 제문(祭朱竹君學士文)
죽은 아우 요우의 묘지명(亡弟君兪權厝銘)
후처 장씨의 묘지명(繼室張宜人權厝銘幷序)
당시 사회에 대한 목소리
끌채를 메운 말 이야기(轅馬說)
여관의 아이(逆旅小子)
옥중 수기(獄中雜記)
과실에 대해(原過)
노새에 관해(騾說)
한림론(翰林論)
향병이 군대를 도운 일에 대한 간략한 글에 부쳐(跋團勇助軍約記)
굶주린 마을에 관한 글(餓鄕記)
방동수에게 다시 보내는 서신(再與方植之書)
쥐잡기에 관해(捕鼠說)
여러 인물들
좌광두 선생의 일화(左忠毅公逸事)
남산집 서문(南山集序)
진전 묘지명(陳馭虛墓誌銘)
초염의 전기(樵髥傳)
장소화 전기(張復齋傳)
원매 묘지명(袁隨園君墓誌銘)
유대괴 선생 전기(劉海峰先生傳)
정신휘 회갑 축하시 서문(丁晨暉六十壽詩序)
자연과 장소에 남긴 글
안탕산 유람기(遊雁蕩記)
반야원도에 부치는 글(半野園圖記)
진도의 장서루에 관해(陳氏藏書樓記)
태산 등정기(登泰山記)
수원아집도 후기(隨園雅集圖後記)
영암 유람기(游靈巖記)
발산의 여하각에 부치는 글(缽山餘霞閣記)
여하각에 부치는 글(餘霞閣記)
소반곡 유람기(游小盤谷記)
오송강 어귀의 공적 검증 기록(吳淞口驗功記)
남산 유람기(遊欖山記)
문학과 학술에 관해
정약한에게(與程若韓書)
순안 방목여에게 주는 글(贈淳安方文輈序)
귀유광의 문집을 읽고(書歸震川文集後)
양삼형 문집 서문(楊千木文稿序)
예쟁의 시집 서문(倪司城詩集序)
노구고에게 쓰는 답장(復魯絜非書)
왕희손에게 보내는 답장(復汪孟慈書)
왕창 문집 서문(述庵文鈔序)
≪법언≫을 읽고(書法言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집이 가난해 옷이 없었다. 고목 하나가 서쪽 계단 아래에 버려져 있었는데, 매년 겨울이 되면 햇살이 처마 아래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가면 몹시 기뻐하며 서로 불러 나무 위에 줄줄이 앉았다. 햇살을 쬐느라 차츰차츰 옮겨 가다가 동쪽 담 아래에 이르렀다. 해가 서쪽으로 저물면 서로 끌며 방에 들어갔는데, 마음이 늘 참담했다. 형이 무호로 간 뒤로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 한 달 새에 끼니를 거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혹여 과자가 생기면 아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기어코 내게 먹게 했다.
방포, <아우 방림의 묘지명(弟椒涂墓誌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