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채봉감별곡≫은 작자 미상의 애정소설이다. 주인공이 부패한 권력층에 맞서거나 모범적인 남녀가 만나 진실한 사랑을 이루는 내용이다. 대개의 고전 소설과 유사하나, 인물 구성의 의도를 볼 때 이 소설은 큰 차별성을 갖는다.
채봉은 가사, 문예, 용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절세가인으로 당대의 모범적인 여인이다. 그러나 당대의 평범한 여인들처럼 그저 수동적이지 않다. 남성의 권력에 의한 신분 상승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주체적 여인이다.
부패한 관료 허 판서는 매관매직을 행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등 대표적인 악인이다. 권선징악의 구도에서 허 판서의 처벌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다만 비현실적인 힘이나 주인공이 큰 인물이 되고 그 죄가 알려져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것이 전형적인 흐름이라면, ≪채봉감별곡≫은 평양감사 이보국을 등장시킨다. 이보국은 허 판서보다 더 높은 권력자이며 이상적인 관료다. 즉, 현실적인 힘이 발현된 것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탄탄히 하는 요소기도 하지만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여주인공의 주체적인 행동은 당시 여인들의 수동적이기만 한 모습에 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밑바탕이 된 여인상을 전부 깨부수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이 수용되던 시절에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이상적인 관료의 등장이 문제의 해결과 갈등의 해소를 가져오는 것은 부패한 관료들에게 벌을 내릴 어진 관료를 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아쉬운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남녀평등을 교육받지만 남녀 차별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아직도 유리 천장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신분제가 없어졌지만 직업, 학벌, 외모 등으로 또 다른 계급화가 생겼고, 공무를 돌보는 이들의 부패 소식은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리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성이 드라마 같은 남녀의 만남 속에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자평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성행한 애정소설이다. 여성 주인공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이룬다는 내용은 이전 시기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주인공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몸을 팔아 기생이 된다거나,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세태, 하릴없이 기생집에 모여 허송세월을 보내는 한량들의 모습 등을 통해서 당대의 혼란상을 읽어 볼 수 있다. 또한 독백이나 시가의 삽입 등 서술 기법에서 근대소설 태동기의 새로운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옮긴이
조윤형(趙允衡)은 한국교원대학교 제2대학 국어교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박사학위 논문이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 연구≫이며, 관련 소논문으로 <채봉감별곡의 교육적 성격(2004)>, <채봉감별곡의 이본 고찰(2005)> 등이 있다.
고소설 및 설화 교육 등을 주제로 한 다수의 연구 논문을 발표해 왔는데, 최근에는 우리 옛이야기들의 변용과 그 교육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수년간 중고등학교 및 대학(원) 등에서 학생들에게 문학과 국어를 가르쳐왔으며 현재 대전과학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국어교육학회․한국어교육학회․한국문학교육학회․한국독서학회․청람어문교육학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한국교육방송공사(EBS) 교재 개발 및 집필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차례
제1회 채봉이 김 진사 집에 태어나다
제2회 달빛 아래 장생을 만나다
제3회 장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다
제4회 김 진사, 서울에서 벼슬을 구하다
제5회 김 진사, 혼처를 정하고 내려오다
제6회 김 진사 내외, 채봉을 데리고 서울로 가다
제7회 채봉이 가던 중 도망해 돌아오다
제8회 이 부인이 채봉을 찾아 평양으로 오다.
제9회 채봉이 몸을 팔아 기생이 되어 다시 장생을 만나다
제10회 채봉이 이 감사 집에 들어가 섬기다
제11회 채봉이 가을밤 별당에서 ‘감별곡’을 짓다
제12회 채봉이 부모와 다시 만나고 장생과 혼례를 치르다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채봉이 얼굴을 붉히며 수건을 펴보니 그 속에 글이 적혀 있는데,
수건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으니
하늘이 내게 정다운 사람을 보내주심이라.
은근한 정을 참지 못해 사랑의 글을 보내오니
붉은 실이 되어 신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만생 장필성 근정-
이라 쓰여 있다.
소저 보기를 다하고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글 쓴 흔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취향이가 소저의 눈치를 살핀 후 쳐다보고 웃으며,
“무엇이라 글을 썼어요? 좀 일러주십시오.”
채봉이 태연한 얼굴로,
“읽으면 네가 알겠느냐? 수건을 못 찾았으면 그냥 올 것이지, 쓸데없이 이런 것을 받아 가지고 왔느냐. 남의 글을 받고 답장을 안 할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무렇게나 두어 자 적어주십시오. 그 양반이 지금도 서서 기다리십니다.”
채봉이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가 색간지에 글 한 구를 지어 취향에게 주며,
“이번은 처음 겪는 일이라 어쩔 수 없어 답장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글을 가져오지 마라.”
취향이 웃고 받으며,
“아가씨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어요? 에그, 글을 모르니 갑갑해라.”
소저 취향의 등을 탁 치며,
“있다가 밤에 일러줄 것이니 어서 갖다 주고 오너라. 그리고 그 양반이 아랫집에서 글을 지어 가지고 나왔다니, 다시 거기로 들어가는지 보고 오너라.
“예, 김 첨사 집에서 머물고 있다 그러네요.”
소저 말하기를,
“그러면 김 첨사 집과 어찌되는지 물어보아라.”
취향은 대답하고 장생이 있는 곳으로 나와 소저의 글을 전한다. 생이 급히 받아 보니 거기에는,
권하노니 그대는 양대의 꿈을 생각하지 말고
힘써 글을 읽어 한림에 들어갈지어다.
20∼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