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당대 프랑스의 사회 상황을 풍자한 콩트
볼테르가 ≪랭제뉘≫를 쓴 시기는 1760년대이지만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689년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는 두 시기의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뒤섞여 있다. 때문에 당대의 프랑스 독자들은 ≪랭제뉘≫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로부터 당시의 현실들과 관련된 은유적인 부분들을 찾으려 했고, 그러는 가운데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 작품이 그만큼 시사적인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얘기다. 볼테르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케넬 신부의 원고들에서 발췌한 실화(Histoire véritable tirée des manuscrits du Père Quesnel)’라는 부제를 붙인 것도 그러한 민감한 사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랭제뉘≫는 1767년 봄에 집필되고 7월에 인쇄되어 8월에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어서 파리에서도 출간되었으나, 파리에서는 경찰에 의해 즉각 회수되었다. ≪랭제뉘≫가 이렇게 프랑스 정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된 바처럼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다양한 풍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종교 갈등 상황을 묘사하면서 반목하고 있던 장세니스트들과 예수회 양쪽 모두를 포함해서 가톨릭교회 전체를 비난하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종교적 비판의 내용은 광신주의에서 비롯된 폭력, 예수회 신부들의 위선과 부패, 성경을 신이 구술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은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순, 장세니스트들의 형이상학적 논쟁 취향, 사랑이라는 자연적 감정에 반대하는 가톨릭교회의 반자연적 성향 등에 관한 것들이다. 또한 그는 왕의 봉인장 제도 및 궁정인들의 도덕적 타락, 군대 계급이나 행정직들을 사고파는 제도 등 정치적인 비판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왕이 마음대로 시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봉인장 제도의 폐해는 이 작품의 플롯에서 핵심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볼테르 자신도 이 제도의 희생자가 되어 두 차례나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을 만큼, 봉인장 제도는 18세기의 근본적인 문제이자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 사안이었다.
볼테르 식 ‘선한 원시인’ 신화
주인공 랭제뉘는 이야기 초반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휴런족 청년으로 소개된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유럽에서는 문명의 발전이 빚어낸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원시 상태에서 찾고자 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이로써 볼테르는 당시 유행하던 ‘선한 원시인(bon sauvage)’이라는 문학적·철학적 전통의 흐름을 타는 셈이다. 랭제뉘는 이 작품에서 유럽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 볼테르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는 문명을 희생시키고 원시적인 삶을 찬양하는 ‘선한 원시인’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는 작품에서 자신의 ‘선한 원시인’ 랭제뉘에게 문명을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이 휴런족 청년은 지식의 습득과 함께 정신적 성장도 하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오염되지 않았던 그의 자유롭고 순수한 정신이 교육으로 인해서 비로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선한 원시인’ 담론에 대한 볼테르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볼테르는 일찍이 <사교계인(Le Mondain)>(1736)이라는 시를 통해 문명의 이점들을 찬미한 바 있다. 즉, 그는 문명의 폐해를 벗어나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회복해야할 인간적 덕성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00자평
≪랭제뉘≫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볼테르의 콩트다. 그는 휴런족에 의해서 길러진 원시인 랭제뉘의 눈을 통해서 유럽 문명의 모순들을 비판한다. 문명 세계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정신을 지닌 ‘랭제뉘’가 빠르게 지적인 성장을 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볼테르는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훼손된 인간성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더불어 계몽과 이성의 신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지은이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cois Marie Arouet)다. 24세에 <오이디푸스(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작가로서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Zadig, ou la Destinée)≫(1747), ≪랭제뉘(L’Ingénu)≫(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Panthéon)에 안치된다.
옮긴이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파리 소르본대학교(파리4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으로 석사학위, 이어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Post-Doc)으로 볼테르의 철학콩트를 연구했다. 역서로는 ≪마음과 정신의 방황≫, ≪자디그, 또는 운명≫, ≪질 블라스 이야기≫,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노트르담 드 라 몽타뉴^ 수도원 원장과 그의 누이동생은 어떻게 해서 휴런족 청년을 만나게 되었나
제2장. 랭제뉘라는 이름의 휴런족, 친척들이 알아보다
제3장. 랭제뉘라는 이름의 휴런족 청년, 개종하다
제4장. 세례 받은 랭제뉘
제5장. 사랑에 빠진 랭제뉘
제6장. 랭제뉘가 애인에게 달려갔다가 격분하게 되다
제7장. 랭제뉘가 영국인들을 물리치다
제8장. 랭제뉘가 궁정으로 가는 도중 위그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
제9장. 랭제뉘가 베르사유에 도착해 궁에 받아들여지다
제10장. 장세니스트와 함께 바스티유에 갇힌 랭제뉘
제11장. 랭제뉘가 타고난 재능을 어떻게 발전시키나
제12장. 연극 작품들에 대한 랭제뉘의 생각
제13장. 아름다운 생티브 양이 베르사유로 가다
제14장. 랭제뉘의 지적 발전
제15장. 아름다운 생티브 양이 미묘한 제안들에 저항하다
제16장. 그녀가 예수회 신부에게 자문을 구하다
제17장. 그녀가 덕성 때문에 굴복하다
제18장. 그녀가 자기 애인과 한 장세니스트를 해방시키다
제19장. 랭제뉘, 아름다운 생티브 양,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모이다
제20장. 아름다운 생티브 양은 죽고, 그래서 생기는 일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렇다면 자네는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뭔가를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일 겁니다. 우리는 천체나 원소들 같은 ‘영원한 존재’의 힘 아래에 놓여 있으며, 그 영원한 존재가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고, 우리는 거대한 기계의 작은 바퀴들일 뿐인데, 그 거대한 기계의 영혼인 ‘영원한 존재’는 개별적 견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들에 의해서 작용한다는 것 말입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해 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것들은 모두 ‘암흑의 심연’입니다.”
“하지만, 형제여, 그것은 하느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드는 일이 될 텐데!”
“하지만, 신부님, 당신의 그 효능은총 또한 신을 죄의 창조자로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총을 거절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악에 떠넘기는 자라면 악의 창조자인 것이 맞지 않나요?”
-64~65쪽
랭제뉘는 여러 학문에서 빠른 발전을 했고, 특히 인간학에서 그러했다. 그의 정신이 그렇게 빨리 발달하게 된 원인은 그가 받은 원시적인 교육 덕분이기도 하고, 또한 거의 그만큼 강인한 영혼 덕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 편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해력은 착오에 의해 왜곡된 적이 없기 때문에 고스란히 올바름 속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주입된 생각들 때문에 평생토록 모든 일들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 보는 반면, 랭제뉘는 있는 그대로 보았다.
-88~89쪽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관이었다. 그는 그저 역겨워하며 눈을 돌렸다. 쾌락에서 자양분을 얻고, 인간의 불행을 관조하게 할 만한 장면은 그 어떤 것이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태도다.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