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영남에서 문장으로 빛나다
≪목재 시집≫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의 문집인 ≪목재집≫ 가운데 한시를 골라 번역하고 주해한 것이다. 그의 시는 문집 권1과 2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총 255제 380수이며, 교유 인물들의 문집에 수록된 시를 모두 포함하면 총 400여 수 가까이 된다. 이 책에는 그중 작가의 모습을 비교적 잘 드러낸 시 97수를 골라 옮겼다. 홍여하는 자가 백원, 호가 목재와 산택재다. 본관은 부림(缶林)으로, 지금의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일대다.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홍호인데, 그는 정경세의 제자로 퇴계에서 유성룡, 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 학맥의 위치에 있었고, 홍여하가 그 뒤를 이었다. 문장이 뛰어나 당시 영남 사림에서 우복 정경세, 동강 김우옹, 창석 이준과 함께 영남 문장 사대가로 꼽혔다.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문집 외에도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3권 7책, ≪휘찬여사(彙纂麗史)≫ 48권 22책, ≪해동성원(海東姓苑)≫ 등을 남겼다.
혼란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하다
홍여하가 활동한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시대를 고민했고 다양한 교류를 통한 활동으로 영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시대적 중간자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임·병 양난 이후 혼란 속 인위적 자연적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영남의 학풍을 진작하고 계승할 명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200자평
17세기 조선 학자 목재 홍여하의 시 97수를 엮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대격변 속에서도 영남의 학풍을 진작하고 계승하기 위해 애썼다. 혼란의 시대에 올바른 학자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애쓴 당대 지식인의 고민이 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은이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본관이 부림[(缶林, 부계(缶溪)]이며 부림 홍씨 15세다. 부림은 곧 그의 선향인데, 지금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일대다.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재상을 지낸 난(鸞)이고, 1세가 직장을 지맨 좌(佐)이며 5세 인석(仁裼)과 6세 문영(文永) 때 상주로 이거하고 다시 8세 득우(得禹) 때 함창으로 이거했는데, 5세 인석 이후를 함창파라 부른다. 성종과 연산군 때 양대(兩代) 홍문관 대제학 곧 문형(文衡)을 지낸 홍귀달은 홍여하의 5대조가 된다. 그리고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낸 홍호의 아들이 홍여하다. 홍호는 정경세의 제자로 퇴계에서 유성룡, 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맥의 위치에 있었다.
홍여하는 자가 백원, 호가 목재와 산택재다. 안동부 성동리, 즉 지금의 문경시 영순면 율리에서 홍호와 장흥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모친 고씨의 상을, 27세 때 부친상을 당했다. 35세 때 생원진사시와 식년 문과에 합격했다. 37세 봉교로 있을 때 송규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상진과 이원정을 추천한 일로 파직되었다. 다시 그해 응지 상소를 올렸다가 고상도 찰방으로 쫓겨났으며, 40세 경성 판관으로 있을 때 현종이 즉위해 응지 상소를 올렸는데, 북방 군정의 폐단과 함께 이후원에 대해 붕당의 행태가 심함을 지적하자 이조 판서로 있던 송시열이 이것은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여겨 상소한 뒤 사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인 측에서 이 상소가 윤휴 등이 조종한 것이라고 보아 크게 문제를 삼으면서, 그는 당쟁 속에 휘말려 들었다. 이때에는 제1차 예송이 터지기도 했다. 41세 때 병마사 권우의 일을 다시 문제 삼았다가 파직된 뒤에 충청도 황간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후 풀려나 고향 함창 율리로 돌아왔다.
율리로 돌아온 후 그는 산택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했다. 51세 때 예천 북쪽 복천촌에 존성재를 짓고 잠시 이거했다가 53세 때 다시 율리로 돌아왔다. 55세 때 숙종이 즉위해 병조 정랑과 사간의 관직을 내렸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예천의 흑송리에 장사 지냈으며, 이장 후 묘갈은 계당 유주목이 지었다. 1689년 갈암 이현일의 주청으로 통정대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93년 근암 서원에 배향되었다.
옮긴이
최금자는 동국대에서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시의 다양한 독법과 시화(詩話)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17세기 영남 지역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1차적으로 지역 고전 가운데 상주 지역 한문학의 전개 양상과 의미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지금은 경북 포항에서 시우고전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목재 홍여하의 한시 연구>, <목재 홍여하의 <술회(述懷)> 시에 반영된 사회 현실>, <조선 시대 시화집 소재 퇴계 시 비평 연구>, <목재 홍여하의 교유 양상 연구> 등이 있다.
차례
≪목재집≫ 서문
우연히 읊다
이국창에게 드리다
최방옹에게 주다
이택당에게 올리다
마음대로 읊어 이대방에게 장난삼아 드리다
대명전에서 봄날 아침 일찍 조회하다
<독락원> 시에 차운해 조용주 선생께 받들어 올리다
영가의 노래. 윤순보를 위해 짓다
북으로 노닐며
총석
동파의 시에 차운하다
꿈을 기록하다
천군 8수
속마음을 풀다
눈병으로 책을 내버려 두고 날마다 성성법만 일삼다
우연히 쓰다
스스로 탄식하다
기자
인을 말하다
생일날 황이곤, 정봉휘, 전명수 등 여러 공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모였다. 각각 시 한 수씩을 짓고 이어서 지난해 외로웠던 마음까지 표현했다
바위 모퉁이에 심어 놓은 대나무가 새 이파리를 틔워 한 수 짓다
역법, 시법, 사법을 평해 목내지와 이사징, 두 학사에게 부치다
외증조 ≪제봉집≫ 뒤에 삼가 쓰다
장대성에게 올리다
퇴계 선생이 동파에 화운한 시에 차운하다
흥이 나서 짓다
6월 9일 술 취해 눈에 비치는 것을 읊다
백련
계장을 만들다
옛 시를 본뜨다
내가 여름부터 술 마시기를 멈추었는데 올해 벼논이 수해를 입었고 앵무배도 깨져서 느낌이 있어 짓다
거부사
옛 이별의 노래
그물을 엮다
수락대에서
우복당에서
복천에 임시로 거처하다
도원이 ≪맹자≫ 일곱 편을 외우는데 하나 틀리지 않으니 숙부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했다. 이어서 주백손이 문광공에게 준 시의 ‘≪노론≫은 스무 편이라, 이골 난 듯 외울사 옥구슬이 쟁반을 구르도다’라는 구절을 외웠다. 내가 느낀 바가 있어 절구 한 수를 짓는다
비를 읊다
갬을 읊다
느낌이 있다
4월 17일 밤, 본 것을 기록하다
임인, 7월 그믐날 맑다
고향 마을
여러 벗들과 도남 서원을 찾아갔다
<포은전>을 읽고 느낌이 있어
청량산에서
섣달 그믐날 밤에
이호우를 추모하며
유자우의 <강정> 시에 차운하다
전가즉사
신해, 1월 5일 새벽에 일어나니 느낌이 있다
문희 사또 김빈여에게 편지로 주어 석밀과 송화를 구하다
안자
비 오는 가운데 매화는 채 피지 않았는데 대는 모두 시들다
이 참봉의 둘째 익문과 셋째 익승이 찾아 줌에 고마워서
황원보·유자강·정봉휘·이선명·전명노 등 여러 분들과 우복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병 때문에 가지 못하자 황장께서 시를 보내왔다. 삼가 차운하다
주역본의
경서의 구두에 이언이 깨뜨리는 것이 많아 느낌이 있다
흥취를 느끼다
가을날 감회를 풀다
눈이 어두워져서
자식을 훈계하는 글
우연히 짓다
느낌이 있어
7월 그믐, 밤비가 내리다
주자절요를 읽고 느낌이 있어
일을 느끼다
상민이 ≪논어≫ 읽는 것을 보고
즉사
우연히 짓다
안태화의 <삼강>에 화운하다
나를 경계하다
단천을 지나다
초봄
우연히 짓다
저녁에 날이 개다
마을에 화기가 끊겼다가 밥 짓는 연기를 보고 느낌이 있다
흥이 나다
나를 경계하다
태수의 분매를 읊다
유곡역 누각에서 김천휴를 보내면서, 그 편에 한양 여러 임께 부치다
학봉 선생의 묘도비를 살펴보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이계칙을 추모하며
가을장마
시잠
청잠
침잠
식잠
좌잠
입잠
보잠
와잠
사자잠
거실잠
기마잠
부록
목재기 경인년
해설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역법, 시법, 사법을 평해 목내지와 이사징, 두 학사에게 부치다
남아 대업을 처음 천명으로 받았을 때
이 동한에 태어난 것, 또한 허사가 아니로다.
만 리 강산은 우공의 바깥이요,
천년의 예악은 기자의 홍범구주 여운일세.
큰 선비가 역을 논의함에 묘리에 이른 것 많거니와
시인이 시를 말함에 혹여 나의 시흥을 일으켜 주네.
다만 사가(史家)의 길에 착오가 있나니
심법을 발휘해 모름지기 바로잡아야 하느니.
評易詩史法 寄睦來之 李士徵 二學士
男兒大業受命初 生此東韓亦不虛
萬里山河禹貢外 千年禮樂箕疇餘
碩儒譚易多臻妙 騷客言詩或起余
祇有史家門路錯 發揮心法正須渠
비를 읊다
온 천지가 구름 끼더니 낮에도 어둑어둑
시원하게 쓸어버리려도 한바탕 바람 부를 수 없네.
누가 알리오? 만 겹의 구름 너머는
예전처럼 푸른 하늘에 해가 붉게 비친다는 것을….
(인욕이 덮고 가릴 때에도 천리 본체는 이제껏 사라진 적이 없었다.)
詠雨
晦冥天地晝濛濛 快掃難呼一陣風
誰識萬重雲霧外 碧空依舊日輪紅
(人欲掩蔽之時, 天理本體, 未嘗泯息也.)
자식을 훈계하는 글
밥은 거칠고 옷은 헌솜으로 지어 과분한 사치를 끊고
오직 부지런하고 신중함을 좇으며 허망한 과시는 말지니.
명예는 이름을 찾는 선비에게서 유독 줄어들고
재앙은 이익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많이 난다네.
화려한 작약은 열매를 맺기 어렵나니
절조 있는 솔과 대가 꽃을 이루기 쉽다오.
정녕 재차 자손들에게 말하노니
누군가 해하는 마음은 도와 멀어진다네.
訓子篇
麤糲縕袍絶汰奢 只循勤謹莫虛誇
聲譽偏減要名士 災患多生好利家
芍藥繁華難結實 松篁節操肯成花
丁寧更向雲孫道 忮害爲心去道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