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무정부주의자의 그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 사법부의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한 사내 때문에 경찰서 간부들이 모두 긴장한다. 사내는 경찰 간부들의 빈틈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퍼붓고, ‘무정부주의자의 그 사건’에 감춰진 진실이 경찰 간부들의 입을 통해 하나둘 밝혀진다. 다리오 포의 대표작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에 나오는 ‘무정부주의자의 그 사건’이란 무정부주의자였던 한 철도 노동자가 폭발 테러범으로 지목되어 취조를 받던 중 경찰서 창문으로 떨어져 죽은 일을 말한다. 당시 사법 당국은 그의 자살이야말로 그가 폭탄 테러의 진범이라는 자백이라며 사건을 덮어 버렸고 언론은 그를 괴물로 몰아붙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뒤 폭탄 테러의 진짜 범인이 잡혔고, 무정부주의자의 죽음도 자살이 아닌 의문의 사고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중은 초유의 사법 살인 사건에 분노했다.
다리오 포는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에서 죄 없는 노동자를 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모자라 사건을 은폐, 조작한 경찰 당국을 조롱하며 신랄하게 풍자한다. 재치 있는 입담으로 경찰 간부들을 쩔쩔매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미친 사내’는 분노한 이탈리아 민중을 대변한다. ‘미친 사내’의 기지는 사실을 은폐하려던 경찰의 허점을 폭로하며 공포를 조장해 민중 위에 군림하던 경찰을 한순간 조롱거리로 전락시킨다. 다리오 포는 풍자극을 무기 삼아 경찰 당국의 사법 살인에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이는 “풍자야말로 민중이 통치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해 온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말해 온 다리오 포의 평소 생각과도 맥을 같이한다. 다리오 포의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는 이처럼 ‘코메디아델라르테’라는 이탈리아 희극 전통에 기반해 웃음과 풍자로 공권력에 묵직하고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다.
웃음과 풍자로 무장한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의 진가는 언제 어디서나 현재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부정한 권력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다리오 포가 ‘풍자의 효과’라고 강조한 바이자 극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했다. 다리오 포는 이처럼 현대 사회의 부정과 부패, 악습에 포커스를 맞춘 보편적인 주제, 코메디아 델라르테라는 전통적 희극 기법을 계승해 현대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극작 기법, 무엇보다 권력에 대항해 언제나 약자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노력을 인정받으며 199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권위에 격렬하게 도전하면서도 예술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한쪽 발은 무대에 한쪽 발은 무덤에 걸쳐 놓고 산다’던 다리오 포의 진정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는 이런 다리오 포의 진정성이 발휘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200자평
노벨상 수상 작가 다리오 포의 대표작이다. 밀라노에서 한 철도 노동자가 취조 경찰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사망한 실제 사건이 모티프가 되었다. 다리오 포는 이 작품을 통해 철도 노동자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법 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취조 중에 발생한 의문사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다리오 포는 사법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풍자극 형식에 담아내며 경찰국가, 사법 정의의 허점을 재치 있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지은이
다리오 포(Dario Fo, 1926∼2016)는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 준 이탈리아의 대표 작가다. 역장인 아버지와 농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리오 포는 대학에 입학한 후 생계를 위해 전시회장 세트를 장식하는 보조사 노릇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다니며 착취가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법과 16∼17세기의 주된 연극의 흐름이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 열중하다가 이후 연극에 구체적인 흥미를 갖고 진로를 전환한다. 연극인으로서 다리오 포는 흥행을 보장해 주는 당시의 제작 배포 체계의 조건에 따르며 한때 금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흥행과는 곧 단절을 고하고 일관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1965년에 다른 어떤 쟁쟁한 극단들보다도 많이 공연하고 많은 수입을 거뒀다. 70편이 넘는 그의 작품들 중 대다수가 노동자나 관객들이 직접 요청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었다. 1970년에는 공산당에서 탈당해 극단 ‘라 코무네’를 조직해 활동했다. 사회의 부정부패, 압제를 풍자적으로 고발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인 결과, 포는 1980년 미국 입국 비자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권력층에 대항해 싸우며 늘 힘없는 자들 편에 서려던 그의 실천적 노력은 1997년 노벨상 수상이라는 성과로 이어진다. 2016년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스테로 부포> 공연을 치러 냈던 다리오 포는 10월 13일 새로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날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장지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이탈리아어과 학사 및 석사,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번역서로는 골도니의 ≪여관집 여주인≫,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엔리코 4세≫(≪피란델로 희곡선 1≫), ≪바보≫, ≪항아리≫, 피란델로 유작 ≪산의 거인족≫(예술신화극),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이 있다. 저서로는 ≪동시대 연출가론≫(공저)과 ≪장면 구성과 인물 창조를 위한 희곡 읽기1, 2≫(공저)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부
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미친 사내 : 그자들이 나를 진짜 감사 나온 판사로 믿게만 된다면… 내가 바보 같은 짓만 안 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인데! 어디 좀 보자, 우선, 걸음걸이부터 보자… (그는 약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해 본다.) 아냐, 이건 재판소 서기 걸음걸이야. 관절염은 있지만 위엄이 풍기는 그런 걸음걸이라야지! 그래 이거야. 목은 좀 구부리고… 은퇴하는 서커스 말처럼… (한 번 해 보다가 그만둔다.) 아냐, 마지막 질주를 하고 “슬라이딩하는” 것처럼 하는 게 더 낫겠어. (해 본다.) 나쁘진 않군! 푸딩 넣은 무릎처럼 흐물흐물 걸어? 아니면 메뚜기처럼 빳빳하게. (해 본다. 발뒤꿈치와 앞꿈치를 시소처럼 움직이며 짧고 빠르게 걷는다.) 큰일 났다, 안경… 아냐, 안경은 필요 없어. 오른쪽 눈을 반쯤 감고 이렇게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읽는 거야. 말은 되도록 안 하고, 잔기침을 약간 하고, 어흠, 어흠! 아니지, 기침은 안 하는 게 좋아… 무슨 이상한 버릇 같은 건 없어도 될까? 그건 이따가 닥쳐서 해 보자. 온화한 태도로 콧소리를 낼까? 부드럽게 나가다가 초반에 갑자기 날카롭게 “안 되지! 국장, 당신 그만둬야겠구만,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이 파시스트 형무소의 소장이 아니야… 그걸 항상 기억해야지!” 아냐, 아냐, 정반대 스타일로 나가야 해, 냉정하고 똑 부러지고, 단호한 어조에, 단조로운 목소리로, 근시에다 약간 슬퍼 보이는 시선… 안경은 꼈지만 한쪽 알만 쓰도록, 이렇게.
-33∼34쪽
미친 사내 : 직업이 철도 기술자인 한 무정부주의자가, 은행 폭파 사건에 가담을 했는지 안 했는지 혐의를 받고 신문을 받기 위해 이 방에 있었어요, 그 폭파 사고로 16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죠! 그리고 여기 당신이 한 말들이 그대로 적혀 있군요, 국장님. “그의 진술에는 상당히 근거 있는 혐의들이 있었다”라고요. 당신이 이렇게 말했습니까?
국장 : 예. 하지만 그건 처음에 그런 것이고… 판사님… 그게 나중에는…
미친 사내 : 지금 우리 처음 부분을 보고 있어요… 차차 정리를 해 나갑시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무정부주의자는 발작 증상이 일어나, 이 발작 증상이라는 말도 계속 국장님이 쓰신 표현이죠, 발작 증상이 일어나 창문으로 뛰어내려 땅바닥에서 몸이 박살나 부서졌음. 자, 그런데 이 발작 증상이라는 게 뭡니까? 방디우라는 사람은 이 “발작 증상”을 정신적으로 정상인 사람이라도 극심한 걱정이나 절망적인 고통이 야기되면 자살의 고뇌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분노 형태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국장과 형사반장 2 : 맞습니다.
-53쪽
미친 사내 : 잠깐… 그런데 여기서 뭔가 그림이 안 맞아요! (경찰관들에게 서류 한 장을 보인다.) 자살자는 신발을 세 짝이나 신고 있었나요?
국장 : 무슨, 세 짝이라니요?
미친 사내 : 그렇소! 경찰 손에 그자의 신발이 한 짝 남아 있었다면… 이놈의 골치 아픈 사건 며칠 후에 저 친구가 직접 그렇게 진술을 했어요… (그는 그 서류를 보인다.) 여기 있소!
-113∼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