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나라 잃은 유학자의 고뇌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1853∼1920)의 자(字)는 태문(泰文)이고, 본관은 함안이다. 서천(西川)은 그의 별호다. 조정규가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사회는 계속되는 외세의 침범과 함께 서양 문물의 유입, 사상의 주입 등으로 변화가 컸던 시기였다. 특히 국권 피탈이라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백성의 삶이 짓밟혔다”라고 통곡하고, 자고산으로 들어가 ≪춘추≫를 강론해 ≪주역≫의 이치를 완색했다. 그러다가 오랑캐가 어지럽힌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기고, 만주에 들어갈 뜻을 세웠다.
중국 체험의 시적 구현
그는 1913년과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온다. ≪서천선생문집≫에 수록된 그의 <북정시>와 <북정일록>은 이 중국 여행의 산물이다. 그는 1913년 4월 16일 마산항을 출발해 6월 29일 집으로 돌아와 한천재에 들어가기까지 총 74일간의 여정을 자세히 글로 남기고, 특기할 만한 경험을 시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다녀갔던 장소와 인물에 대해서만 기록했던 반면, 한시에서는 다녀간 장소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공간과 한반도와의 연관성도 연상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기대 등도 한시로 표현했다. 이는 그가 평소 산문보다는 시를 선호하고, 또 시교설(詩敎說)의 입장에서 그가 체험한 것들을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실과 유가 문명 재건의 필요성
서천의 중국 체험은 중국에 대한 그의 동경과 자손들을 안주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한 중국의 현실은 달랐다. 공맹의 학문이 면면(綿綿)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상업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면 서양의 학문을 더욱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은 내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강상이 무너지고, 한 중국 안에서도 남과 북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조정규는 이러한 중국의 현실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고 시를 통해 중국의 ‘민낯’을 폭로한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실망을 딛고 유가 문명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이 근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 외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해 가는 위기에서 유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국권 회복의 방법이었다.
200자평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봉건과 근대, 개화와 수구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지역 선비 조정규는 유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했다. 서천 조정규의 문집 가운데, 그가 중국을 다녀오며 기록한 일기, 시, 필담, 편지글, 제문을 골라 소개한다. 근대 전환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현실 인식과 대응, 지역 학자들의 인맥 관계,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읽어 낼 수 있다.
지은이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1853∼1920)의 자(字)는 태문(泰文)이고, 본관은 함안이다. 서천(西川)은 그의 별호다. 1853년 10월 17일에 함안 안도 유암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언행이 예사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다. 학문은 대체로 가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고,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백성의 삶이 짓밟혔다”라고 통곡하고, 자고산으로 들어가 ≪춘추≫를 강론해 ≪주역≫의 이치를 완색했다. 1913년부터 중국 서간도를 거쳐 북경, 산동 지역 등을 두루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동포들의 생활과 독립을 지원했다. 봉천성에 남아 있던 전후 5년간 질병을 얻어 환국했는데, 병이 위독하게 되자 손수 ‘충효문(忠孝門)’이라는 세 글자를 쓰고, 그 아래에 “자손들은 영원히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으로 서로 전하라”라고 써 조카 용돈에게 주어 이를 당문(堂門)에 걸게 하고 마침내 절필(絶筆)했다.
경신년(庚申年, 1920) 7월 23일 신시(申時)에 창리(昌里) 본가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68세였다. 서산 아래 구수동(九水洞) 해좌(亥坐)에 전부인 묘 우측에 안장했는데, 친지들과 문인들로 흰 두건과 띠를 맨 자가 43명이었고, 장례식에 모인 자가 1000여 명이었다.
옮긴이
전설련(全雪蓮)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종가연구팀 연구원으로 있다. 논문으로는 <백하일기(白下日記)의 서술 방식(敍述方式)과 그 문학적(文學的) 성격(性格)>, <서천 조정규의 중국 체험의 시적 구현과 그 의의>, <대눌(大訥) 노상직(盧相稷) 도강록(渡江錄) 소재 잡저(雜著)의 서술 특징과 만주 인식> 등이 있고, 역서로는 ≪안자(晏子)≫(바닷바람, 2019)가 있다.
차례
북정시(北征詩)
1. 내가 중주로 가려고 하는데 송덕중이 시로 전별하니, 그 운에 따라 시를 지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 이태규가 북정서시를 준 데 대해 감사하며
3. 마산항에서 기차를 타다
4. 대구
5. 한양가
6. 송경가
7. 평양을 지나며
8. 용만을 바라보며
9. 안동현
10. 맹보순·권병하와 함께 원보산에 올라
11. 권병하에게 주다
12. 맹보순에게 주다
13. 맹(孟)·권(權) 두 벗과 이별하며
14. 봉황성을 지나며
15. 봉천으로 가는 길에서
16. 봉천부
17. 신민부로 가는 길에서
18. 심양을 지나며
19. 산해관에 올라
20. 천진행
21. 천진 천화잔(天和棧)에서 고향의 벗들을 생각하며
22. 연태
23. 이종예(李鐘豫)에게 드리다
24. 이종예에게 주다
25. 고숙(高塾)에게 답하다
26. 유채년(劉采年)에게 답하다
27. 유채년의 시에 부쳐
28. 국자감
29. 중화문
30. 신무문
31. 풍주
32. 만수산
33. 해전도
34. 만생원
35. 대종사
36. 고려빈
37. 두 벗을 전송하며 회포를 읊다
38. 요동관에서 이양래를 만나다
39. 조용훈에게 답하다
40. 공태보에서 성종호(成鐘頀)를 방문하다
41. 곡부로 가려던 때, 산리(山裏)의 앞산을 오르며 이승희, 이광룡, 이문주 제공과 족손 경래와 함께 읊다
42. 곡부에 간 날 동반자가 없음을 한탄하며
43. 황하가
44. 태산가
45. 주공묘(周孔廟)를 알현하다
46. 제학(提學) 공상림(孔祥霖)에게 드리다 3수
47. 북지
48. 봉천관에서 이승희에게 주다
49. 곽종석(郭鐘錫)의 파리 장서를 듣고 기뻐 읊다
50. 방가
북정일록(北征日錄)
4월
5월
6월
필담
이종예(李鐘豫)와의 필담
서(書)
제학(提學) 공상림(孔祥霖)에게 드리다
곡부 성탄일(聖誕日) 여러 선비[章甫]들에게 주다
제문(祭文)
공자묘에 드리는 제문
이승희에게 드리는 제문
부록
행장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마산항에서 기차를 타다(馬山港登汽車)
내가 기차 안에서 밖을 보니
달리는 것이 모두 번개 같구나
낮에는 날마다 만 리를 달리니
누가 서행하는 자의 고통을 알겠는가
我觀汽車上 走者皆電物
白日日萬里 誰知徐者疾
안동현(安東縣)
압록강 물은 넓기가 바다와 같고
원보산의 빛은 따뜻하기가 봄과 같네
중국에는 안동이라는 큰 현이 하나 있는데
현령과 도태(道台) 여러 관직을 겸했네
양국 상인들의 서로 소통하는 곳
누가 알았으리, 옛날의 황량한 만(灣)이었던 것을
러일 전쟁이 일찍이 언제였던가
만 리의 백골이 들판의 봄풀 속에 가득하네
상세(上世)의 어진 이들은 전쟁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앉아서 사해(四海)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여겼던 것을
鴨江之水大如海 元寶山光暖似春
中有安東一大縣 縣尉道台兼雜官
兩國商人通貨處 孰知在昔爲荒灣
俄日戰場曾幾日 萬里白骨春草原
上世仁人不貴戰 坐令四海民吾民
공자묘에 드리는 제문(곡부)
2467년 을묘(1915) 8월 27일에 후학 조선인 조정규(趙貞奎)·이광룡(李光龍)은 심의(深衣)와 고관(古冠)에 목욕재계를 하고 지성(至聖) 선사(先師)이신 공부자(孔夫子) 앞에 재배하고 경건하게 고하옵니다.
오호라! 부자께서는 천지(天地)이시며 일월(日月)이시옵니다. 천지가 보존되면 부자님의 도(道) 역시 더불어 존재하고, 일월이 밝으면 부자님의 도 역시 함께 밝아집니다. 지금 공자님의 도가 어두워지고 또 장차 없어지려 하니, 또한 천지일월(天地日月)이 천지일월이 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지는 천지이고 일월은 일월이듯이, 부자의 도 또한 장차 만세의 문명이며, 그 책임은 후인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정규 등은 평생토록 책 속에서 공자님의 교훈을 친히 듣고,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느꼈습니다. 몸소 국가가 무너지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 우리의 문화가 장차 타락하고, 천하가 오랑캐와 금수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한 부의 춘추마저도 강명할 곳이 없어서, 만 리 바다를 건너와 성묘(聖廟)에 배알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서 음덕(陰德)으로 은밀히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감히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