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성스러운 술꾼의 죽음
안드레아스는 폴란드 슐레지엔 출신의 불법체류자로 일정한 거주지 없이 파리 센강의 다리 아래를 전전하는 알코올중독자다. ‘주소는 없지만 명예는 있는’ 그의 앞에 어느 날 한 신사가 나타나 선뜻 200프랑을 빌려준다. 그러면서 돈을 갚고 싶으면 생 마리 드바티뇰 성당의 성녀 테레제의 상 앞에 바치라는 말을 남긴다. 이후 안드레아스는 성녀 테레제에게 돈을 갚으려 애를 쓰나 그의 마음과 달리 약속 이행은 자꾸만 미뤄진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사람의 애수가 절절히 느껴지는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요제프 로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더욱 저민다. 요제프 로트가 생애 마지막 넉 달을 바쳐 집필한 작품으로 그의 사후에 발표되었다. 독일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ᐨRanicki)는 이 짧은 이야기의 “완결성과 완벽함”에 경탄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의 흉상
작가가 성장기를 보낸 동(東)갈리치아의 마을 로파티니를 배경으로 한 짧은 소설이다. 주인공 모르스틴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옛 봉건 체제의 귀족이다.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오스트리아인’으로 묘사되는 모르스틴은 스스로를 어떤 나라, 어떤 민족에 속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라 이름이나 영토의 지도는 계속 바뀌었지만 6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합스부르크 왕조야말로 그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왕조는 몰락하고 그가 지켜 온 명예와 자부심도 함께 스러진다. 소설 마지막, 프란츠 요제츠 황제 흉상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로트가 출장 중 정신분열을 일으켜 실종되어 버린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200자평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 동유럽의 유대인 작가로서 어느 한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던 요제프 로트가 바라본 시대의 단면을 담은 단편집이다.〈성스러운 술꾼의 전설〉은 로트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주인공 안드레아스는 망명지 파리에서 알코올중독으로 끝내 사망에 이른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황제의 흉상〉의 모르스틴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자신의 세계마저 잃어버린다.
지은이
요제프 로트(Joseph Roth, 1894∼1939)는 오늘날 폴란드 남부와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 동갈리치아의 소도시 브로디에서 태어났다. 브로디는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와해된 뒤에 폴란드 땅이 되었다가 1939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귀속됐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민의 90퍼센트가 유대인으로 구성된 브로디에 근거를 둔 유대계 상인 집안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결혼 당시 함부르크 회사에서 곡물 거래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출장 중에 정신 분열을 일으켜서 정신병원에 이송된 후 실종된 것으로 전해진다.
로트는 이후 외가의 도움으로 학교 교육을 마친다. 김나지움에서 독일어로 교육을 받고, 갈리치아의 수도 렘베르크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후, 1914년 여름 학기에 빈 대학에 등록한다. 빈 대학에서 독문학 공부를 시작한 로트는 교수직을 꿈꾸지만 좌절되고, 가정교사 일과 장학금으로 생활하면서 1916년 첫 단편 〈모범생(Vorzugsschüler)〉을 발표한다.
전쟁 초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던 로트는 곧 군에 자원입대 후 참전하고, 1917년부터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브로디가 속한 리비우 지역에 종군 기자로 파견된다. 1918년 사회주의 잡지인 《앞으로(Vorwärts)》에 ‘붉은 로트(der rote Roth)’라는 이름으로 글을 게재했고, 1929년에는 2년간 뮌헨의 국수주의적 신문에 좋은 보수를 받고 기고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후 로트는 세계사의 격동기 한가운데에서 언론과 창작을 오가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평생을 여러 지역과 도시, 여러 장소를 전전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호텔이나 여관에서 거주했다. 가진 것이라곤 여행 가방 몇 개가 전부였고, 밤낮을 카페와 술집에서 술과 담배로 보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망명길에 나섰는데 1939년 파리의 카페에서 유대인 작가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1893∼1939)가 미국에서 망명 중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진다. 이후 빈민 구호소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실제로는 복통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결국 폐렴으로 죽음을 맞았다.
대표작으로 소설 《거미줄(Das Spinnennetz)》(1923), 《호텔 사보이(Hotel Savoy)》(1923), 《반란(Rebellion)》(1924), 《욥》(1930),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sch)》(1932), 《타라바스(Tarabas)》(1933), 《어느 살인자의 고백(Beichte eines Mörders)》(1936), 《엉터리 저울추(Das falsche Gewicht)》(1937), 《카푸친 황제 묘(Die Kapuzinergruft)》(1938) 등이 있다.
옮긴이
진일상은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19세기 초 당시 주류 예술과 거리를 두고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2006년 클라이스트의 단편을 우리말로 옮긴 《버려진 아이 외》로 한·독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다수의 연구 논문 외에 역서로 카프카의 《변신》,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엘제 양》,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 테오도어 폰타네의 《마틸데 뫼링》, 클라이스트의 드라마 《암피트리온》, 《깨어진 항아리》 등이 있다.
차례
성스러운 술꾼의 전설
황제의 흉상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빛나는 파리의 저녁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에게 속하지 않은, 서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밤은 그들 앞에 빛나는 사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스러운 술꾼의 전설> 중에서
2.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 술꾼 모두에게 이렇게 가볍고 아름다운 죽음을 주시기를!
–<성스러운 술꾼의 전설> 중에서
3.
로파티니를 다시 찾은 고향으로 환영하는 대신 모르스틴 백작은 고향의 문제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낯선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 이제, 이 마을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폴란드에 속하는데, 여기가 아직 나의 고향인가? 대체 고향이란 무엇인가? 어린 시절에 마주친 지방경찰과 세관원의 특정 제복인가, 전나무와 소나무, 늪지와 초원, 구름과 냇물 같은 것은 같은 고향이 아닌가? 그런데 지방경찰과 세관원은 바뀌었고, 전나무와 소나무, 냇물과 늪지는 같은데, 이게 고향인가? 백작은 계속 질문했다. 이곳이 고향인 이유는 이곳이 내가 사랑한 수많은 다른 곳처럼 주군의 소유였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계사의 부자연스러운 변덕이 내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기쁨도 파괴했다.
–<황제의 흉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