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혼란을 바로잡은 통일 왕조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는 제기(帝紀) 5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50권, 총 85권으로 되어 있다.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사기(史記)≫·≪한서(漢書)≫ 등과 함께 중국의 정사인 24사(史) 중 하나로 꼽힌다.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통일 왕조다. 수나라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양제(煬帝), 남과 북의 교류를 촉진한 대운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를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는 581년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건국부터 618년 양제 양광(楊廣)이 멸망하기까지 불과 37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수나라의 멸망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와 유사하다. 2대에서 멸망했다는 점, 멸망한 후 한나라와 당나라라는 강한 왕조가 탄생했다는 점, 오랜 기간 이어진 난세를 통일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대제국을 형성했던 왕조의 흥망성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흥미로운 내용과 교훈을 제공한다. 여기에 수나라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서≫를 읽는 것은 이처럼 흥망과 치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식화지>의 구성과 내용
≪수서≫ <식화지>는 ≪수서≫에 수록된 십지(十志) 중의 여섯째 편이다. ‘식화(食貨)’는 원래 음식물과 재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나 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경제 전반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그래서 ‘식화지’라고 하면 한 나라의 경제 관련 제도, 즉 인구·전답·부세 등의 내용을 기록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서≫ <식화지>는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총론에 해당한다. 상고시대부터 수나라까지 음식과 재물의 중요성을 말하고, 황제(黃帝)와 전욱(顓頊) 시대부터 수나라까지 역대의 군주들이 어떻게 세금을 거두어 정책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폐단을 나라의 흥망과 연관 지어 간략하게 기술했다. 둘째 부분은 본론으로, 남조와 북조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북조에 대해서는 남조와 달리 아주 상세하게 ‘식화’ 관련 제도를 상세하게 기술했다. 특히 북제 후주(後主)와 수 양제의 무리한 토목 공사로 인해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고 심지어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한 상황을 들어 교훈을 준다. 셋째 부분은 각 나라의 화폐와 그 제조 및 유통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다. 남조의 오수전(五銖錢)과 육수전(六銖錢), 북주의 포천전(布泉錢)과 오행대포전(五行大布錢), 수문제 때의 오수전(五銖錢) 등이 언급된다.
<형법지>의 구성과 내용
≪수서≫ <형법지>는 ≪수서≫에 수록된 십지(十志) 중의 일곱째 편이다. 위진남북조와 수나라의 형벌 제도 전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편이다.
<형법지>는 서술 내용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총론 부분으로, 형법의 필요성과 효용 및 형법 제도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했다. 둘째 부분은 남조 양나라에서 수나라까지의 형법 제도를 기술한 것인데, 남조와 북조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양 무제 때의 ≪양율(梁律)≫, 양 원제 때의 ≪율(律)≫ 30권과 ≪영률(令律)≫ 40권, 북주 무제 때의 ≪대율(大律)≫, 수 고조의 ≪개황률(開皇律)≫ 등이 거론된다. 법 집행이 가혹해지면 형법 제도를 간소화하고 이에 다시 느슨해지면 혼란이 이는 등 역사적 흐름 속에 법률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 이 책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이십사사(二十四史)≫ 교점본 중 ≪수서(隋書)≫와 한어대사전출판사본(漢語大詞典出版社本) ≪이십사사전역(二十四史全譯)≫ 중의 ≪수서(隋書)≫를 텍스트로 삼아 번역했다.
∙ 이 책은 ≪수서(隋書)≫ 권24∼권25에 해당하는 <식화지><형법지>를 번역한 것이다.
200자평
국내 최초의 수나라 역사서, ≪수서≫
대운하를 판 나라,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살수대첩으로 무너진 나라,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수나라다. 상고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역사가 ≪사기(史記)≫에 담겨 있다면,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역사는 ≪수서(隋書)≫에 담겨 있다.
<식화지><형법지>는 ≪수서≫에 수록된 십지(十志) 중 두 편의 편명이다. <식화지>는 ≪수서≫ 권24에, <형법지>는 권25에 수록되어 있다. <식화지>는 한 나라의 경제 관련 제도, 즉 인구·전답·부세 등의 내용을 기록한 편이다. <형법지>는 말 그대로 형벌과 법에 관한 제도와 내용을 기록한 편이다. 다른 사서의 <식화지><형법지>가 한 나라의 경제 전반이나 형벌만을 기록한 것인 반면 ≪수서≫<식화지><형법지>는 위진남북조에서 수나라에 이르러 약 300년에 걸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위징(魏徵)
당나라 초기의 명재상이다. 자는 현성(玄成)이고, 거록군(巨鹿郡) 하곡양현(下曲陽縣) 사람이다. 일찍이 수(隋)나라의 위공(魏公) 이밀(李密)을 따라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년)에 당나라에 귀순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비서감(秘書監) 등을 지냈고, 고적(古籍)을 정리하고 ≪수서(隋書)≫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후에 시중(侍中)·태자태사(太子太師)에 임명되었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직언을 잘했고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태종(太宗)을 보좌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했다. 정관 17년(64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는 ≪수서≫를 비롯해 ≪정관정요(貞觀政要)≫·≪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이 있다.
영호덕분(令狐德棻)
당나라 초기의 대신이자 사학자다. 자는 계형(季馨)이고, 의주(宜州) 화원(華原) 사람이다.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했고 글을 잘 지었다. 수나라 말에는 약성현령(藥城縣令)으로 있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에게 귀순했고, 예부시랑(禮部侍郎)·태상경(太常卿) 등을 지냈다. 당 고조에게 양(梁)·진(陳)·북주(北周)·북제(北齊)·수(隋)나라의 정사를 편찬할 것을 처음으로 주청했고, 직접 ≪주서(周書)≫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 건봉(乾封) 원년(666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는 ≪오대사지(五代史志)≫·≪태종실록(太宗實錄)≫·≪능연각공신고사(凌煙閣功臣故事)≫ 등이 있다.
옮긴이
권용호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중국 난징대학교 중문과에서 고전 희곡을 전공했으며, 위웨이민(兪爲民) 선생의 지도 아래 <송원남희곡률연구(宋元南戱曲律硏究)>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고전 문학의 연구와 번역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거시적 관점에서의 중국 문학 연구와 중국학의 토대가 되는 경전의 읽기와 번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저역서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세 차례 선정된 바 있다(2001년, 2007년, 2018년). 저서로는 ≪아름다운 중국문학 1≫, ≪아름다운 중국문학 2≫, ≪중국문학의 탄생≫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는 ≪중국역대곡률논선≫, ≪송원희곡사≫, ≪중국 고대의 잡기≫(공역), ≪그림으로 보는 중국 연극사≫, ≪초사≫, ≪장자내편 역주≫, ≪꿈속 저 먼 곳−남당이주사≫(공역), ≪송옥집≫, ≪서경≫, ≪한비자≫, ≪경전석사역주≫, ≪수서 열전 1∼3≫, ≪수서 경적지≫, ≪수서 지리지≫, ≪수서 제기≫, ≪수서 백관지≫ 등이 있다.
차례
권24 지 제19(志第十九)
식화(食貨)
권25 지 제20(志第二十)
형법(刑法)
부록 : ≪수서(隋書)≫ 전체 구성과 전체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개황 13년(593년), 황제는 양소에게 도성을 나가 기주(岐州) 이북에 인수궁(仁壽宮)을 지을 것을 명했다. 양소는 산과 골짜기를 메워 큰 누대와 높은 궁실을 지었다. 노역이 가혹해 상당수의 정부(丁夫)가 사망했다. 과로로 쓰러진 사람들은 구덩이에 밀어 넣어 매장한 후, 흙과 돌로 덮어서 그 위를 평지로 만들었다. 죽은 사람을 만(萬)으로 헤아렸다. 궁전이 완성되자 황제가 직접 행차했다. 당시 마침 여름이라서 죽은 사람들이 길에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양소는 이들을 전부 불태워 없앴다. 황제는 이를 알고 언짢아했다. 새로 지은 궁전에 들어가 들러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또 양소를 충신이라고 말했다.
-39쪽
관리들은 법이 두려워 구휼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은 더욱 어려움에 처했다. 처음에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가 점차 나뭇잎을 먹었다. 나무껍질과 나뭇잎을 다 먹고 나면, 흙을 삶거나 볏짚을 가루로 빻아 먹었다. 이후에는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
-55쪽
(북제 문선제) 천보(天保) 6년(555년) 이후, 황제는 결국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잔혹하고 폭압적인 짓을 일삼았으며, 술주정을 부리며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발설했다. 큰 솥, 긴 톱, 가루로 만드는 방아 같은 형구를 만들어 뜰에 늘어놓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친히 사람을 찢어 죽이거나 좌우의 시종에게 명해 잘게 저며서 먹게 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었다. 당시 상서복야로 있던 양준언(楊遵彦)은 어사(御史)에게 먼저 사형수를 결정하게 한 다음 이들을 의장대 안에 배치토록 했다. 황제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면 즉시 끌고 나와 그 명에 부응했다. 이들을 (‘황제에게 바치는 죄수’라는 의미에서) ‘공어수(供御囚)’라고 했다. 3개월이 지나도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사형을 면해 주었다. 황제가 금봉대(金鳳臺)에 행차해 불계(佛戒)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사형수를 불러내어 대자리를 날개 삼아 뛰어내릴 것을 명하고, 이를 ‘방생(放生)’이라 했다. 사형수들이 떨어져 모두 죽자, 황제는 웃으며 즐거워했다.
-100~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