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국내 최초의 수나라 역사서, ≪수서≫
대운하를 판 나라,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살수대첩으로 무너진 나라,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수나라다. 상고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역사가 ≪사기(史記)≫에 담겨 있다면,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역사는 ≪수서(隋書)≫에 담겨 있다. 그리고 ≪사기 열전≫만큼이나 다채로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수서 열전≫에서 펼쳐진다. 수나라에는 현명한 신하가 없고 뛰어난 장군이 없었을까? 왜 건국한 지 40년도 되지 않아 몰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국내 최초로 전체를 번역 출간할 ≪수서≫의 첫 시작은 ≪수서 열전≫이다.
혼란을 바로잡은 통일 왕조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는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사기(史記)≫·≪한서(漢書)≫ 등과 함께 중국의 정사인 24사(史) 중 하나로 꼽힌다.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통일 왕조다. 수나라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양제(煬帝), 남과 북의 교류를 촉진한 대운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를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는 581년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건국부터 618년 양제 양광(楊廣)이 멸망하기까지 불과 37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수나라의 멸망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와 유사하다. 2대에서 멸망했다는 점, 멸망한 후 한나라와 당나라라는 강한 왕조가 탄생했다는 점, 오랜 기간 이어진 난세를 통일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대제국을 형성했던 왕조의 흥망성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흥미로운 내용과 교훈을 제공한다. 여기에 수나라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서≫를 읽는 것은 이처럼 흥망과 치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수서≫의 특징
≪수서≫는 사서로 중요한 덕목인 통치자들에 대한 포폄에 충실했다. 이것은 ≪수서≫가 황제든 대신이든 그 과실을 숨기지 않고 포폄한 것에서 두드러진다. 개국 군주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공로와 함께 공신들을 대함에 각박했고, 시서(詩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도(大道)에 어둡고 여인들의 말을 들었다고 부정적인 면도 함께 기술했다. 양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꾸미는 데 능했고 골육을 죽이고 충신들을 제거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당나라의 신하가 된 수나라의 관원들에 대한 포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나라의 대신으로 당나라의 신하가 된 우세남(虞世南)은 형 우세기(虞世基)의 실정(失政)을 기록했고, 역시 수나라의 신하로 당나라의 신하가 된 배구(裴矩)와 하조(何稠) 등도 그들이 수나라에서 저지른 착오와 실정들을 기록했다. 이러한 점들은 ≪수서≫의 집필 방향과 사서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열전>의 구성과 가치
≪수서≫ <열전>은 ≪수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자, ≪수서≫ 전체 85권 중에서 권36에서 권85까지, 총 50권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열전은 구성상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문제(文帝)와 양제(煬帝)의 후비(后妃)·형제·아들에 관한 것으로, 황제의 일가친척 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권36, 권43, 권44, 권59가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부분은 신하들 관련 기록이다. 권37에서 권42, 권46에서 권58, 권60에서 권70 및 권85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부분은 인물의 행적과 성취 등에 근거해 열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권71에서 권80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 넷째 부분은 수나라 주변의 이민족들을 동이(東夷)·남만(南蠻)·서역(西域)·북적(北狄) 네 부분으로 나눠 기록한 것으로, 권81에서 권84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중 <동이>에는 고구려(고려)·백제·신라·말갈이, <북적>에는 고구려와 큰 영향을 주고받았던 돌궐과 거란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전>은 당시 수나라 조정의 고구려에 대한 입장과 인식,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고구려·수 전쟁의 전개 양상, 당시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사와 관련된 자료는 <열전> 전체에 걸쳐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 고구려 원정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열전도 있고, <내호아전(來護兒傳)>에서는 612년 제2차 전쟁 때 대동강까지 진격해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는 과정과 614년 제4차 전쟁 때 비사성을 함락하고 평양성으로 진격하려다 철군하는 과정이 나와 있기도 하다. <고려전>에서는 고구려의 형성과 관직 및 고구려인들의 풍속, 또 수 문제가 평원왕에게 서신을 주며 입조할 것을 요구하는 과정과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수나라 공격 과정 및 양제 때의 3차에 걸친 고구려 침공이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사 관련 자료는 ≪삼국사기≫ 외에 이렇다 할 사료가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수서≫ <열전>에 실린 고구려사 관련 기록들은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200자평
·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한 ≪수서 열전≫은 중화서국(中華書局)본 ≪수서≫와 한어대사전출판사(漢語大詞典出版社)본 ≪이십사사전역(二十四史全譯)≫ 중의 ≪수서≫를 텍스트로 삼아 번역했습니다.
· ≪수서 열전≫은 ≪수서≫ 권36∼권85에 해당하는 <열전>을 번역한 것으로, 3권으로 나누어 출간합니다. 2권에는 권56∼권70을 수록했습니다.
지은이
위징(魏徵)
당나라 초기의 명재상이다. 자는 현성(玄成)이고, 거록군(巨鹿郡) 하곡양현(下曲陽縣) 사람이다. 일찍이 수(隋)나라의 위공(魏公) 이밀(李密)을 따라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년)에 당나라에 귀순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비서감(秘書監) 등을 지냈고, 고적(古籍)을 정리하고 ≪수서(隋書)≫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후에 시중(侍中)·태자태사(太子太師)에 임명되었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직언을 잘했고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태종(太宗)을 보좌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했다. 정관 17년(64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는 ≪수서≫를 비롯해 ≪정관정요(貞觀政要)≫·≪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이 있다.
영호덕분(令狐德棻)
당나라 초기의 대신이자 사학자다. 자는 계형(季馨)이고, 의주(宜州) 화원(華原) 사람이다.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했고 글을 잘 지었다. 수나라 말에는 약성현령(藥城縣令)으로 있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에게 귀순했고, 예부시랑(禮部侍郎)·태상경(太常卿) 등을 지냈다. 당 고조에게 양(梁)·진(陳)·북주(北周)·북제(北齊)·수(隋)나라의 정사를 편찬할 것을 처음으로 주청했고, 직접 ≪주서(周書)≫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 건봉(乾封) 원년(666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는 ≪오대사지(五代史志)≫·≪태종실록(太宗實錄)≫·≪능연각공신고사(凌煙閣功臣故事)≫ 등이 있다.
옮긴이
권용호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중국 난징대학교 중문과에서 고전 희곡을 전공했으며, 위웨이민(兪爲民) 선생의 지도 아래 <송원남희곡률연구(宋元南戱曲律硏究)>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고전 문학의 연구와 번역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거시적 관점에서의 중국 문학 연구와 중국학의 토대가 되는 경전의 읽기와 번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세 차례 선정된 바 있다(2001년, 2007년, 2018년). 저서로는 ≪아름다운 중국 문학 1≫, ≪아름다운 중국 문학 2≫, ≪중국 문학의 탄생≫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는 ≪중국 역대 곡률 논선≫, ≪송원희곡사≫, ≪중국 고대의 잡기≫(공역), ≪그림으로 보는 중국 연극사≫, ≪초사≫, ≪장자 내편 역주≫, ≪꿈속 저 먼 곳−남당이주사≫(공역), ≪송옥집≫, ≪서경≫, ≪한비자≫, ≪경전석사역주≫ 등이 있다.
차례
권56 열전 21
노개(盧愷)
영호희(令狐熙)
설주(薛冑)
우문필(宇文㢸)
장형(張衡)
양왕(楊汪)
권57 열전 22
노사도(盧思道)
종형(從兄) 노창형(盧昌衡)
이효정(李孝貞)
설도형(薛道衡)
종제(從弟) 설유(薛孺)
권58 열전 23
명극량(明克讓)
위담(魏澹)
육상(陸爽)
후백(侯白)
두대경(杜臺卿)
신덕원(辛德源)
유변(柳䛒)
허선심(許善心)
이문박(李文博)
권59 열전 24 양제의 세 아들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
아들 연왕(燕王) 양담(楊倓)
아들 월왕(越王) 양동(楊侗)
제왕(齊王) 양간(楊暕)
조왕(趙王) 양고(楊杲)
권60 열전 25
최중방(崔仲方)
우중문(于仲文)
형 우의(于顗)
종제(從弟) 우새(于璽)
단문진(段文振)
권61 열전 26
우문술(宇文述)
운정흥(雲定興)
곽연(郭衍)
권62 열전 27
왕소(王韶)
아들 왕사륭(王士隆)
원암(元巖)
유행본(劉行本)
양비(梁毗)
유욱(柳彧)
조작(趙綽)
배숙(裴肅)
권63 열전 28
번자개(樊子蓋)
사상(史祥)
원수(元壽)
양의신(楊義臣)
위현(衛玄)
유권(劉權)
권64 열전 29
이원통(李圓通)
진무(陳茂)
아들 진정(陳政)
장정화(張定和)
장윤(張奫)
맥철장(麥徹杖)
아들 맥맹재(麥孟才)
심광(沈光)
내호아(來護兒)
어구라(魚俱羅)
진릉(陳稜)
왕변(王辯)
곡사만선(斛斯萬善)
권65 열전 30
주라후(周羅睺)
주법상(周法尙)
이경(李景)
모용삼장(慕容三藏)
설세웅(薛世雄)
왕인공(王仁恭)
권무(權武)
토만서(吐萬緖)
동순(董純)
조재(趙才)
권66 열전 31
이악(李諤)
포굉(包宏)
배정(裴政)
유장(柳莊)
원사(源師)
낭무(郞茂)
고구(高構)
장건위(張虔威)
동생 장건웅(張虔雄)
영비(榮毗)
형 영건서(榮建緖)
육지명(陸知命)
방언겸(房彦謙)
권67 열전 32
우세기(虞世基)
배온(裴蘊)
배구(裴矩)
권68 열전 33
우문개(宇文愷)
염비(閻毗)
하조(何稠)
유룡(劉龍)
황긍(黃亘)·황긍의 동생 황곤(黃袞)
권69 열전 34
왕소(王劭)
원충(袁充)
권70 열전 35
양현감(楊玄感)
이자웅(李子雄)
조원숙(趙元淑)
곡사정(斛斯政)
유원진(劉元進)
이밀(李密)
배인기(裴仁基)
남북조 시대 주요 국가 연호표
책속으로
을지문덕은 우문술 군영의 군사들 얼굴에 배가 고픈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우문술의 군사들을 지치게 만들려고 했다. 이에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고 달아났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이때 우문술은 여러 차례의 승리에 안주하고, 안으로 장수들을 다그쳐 결국 진격했다. 동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뒤로하고 주둔했다. 을지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며 우문술에게 청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돌아간다면, 고원(高元) 폐하께서 그대들의 왕이 있는 곳에 가서 재배할 것이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쳐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데다 평양의 지세가 험해 힘을 다할 수 없음을 알고, 저들의 거짓 항복에 군사를 물렸다. 군사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적들이 후군을 공격했다. 이에 손쓸 틈도 없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구군(九軍)은 대패하고 낮밤으로 450리를 걸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처음에 요하(遼河)를 건넌 구군은 30만 5000명이었는데 요동성(遼東城)으로 돌아온 군사는 2700명 정도였다. 크게 화가 난 양제는 우문술 등을 옥리에게 넘겨 처리토록 했다. 동도에 이르러 삭탈관직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우문술>, 961~962쪽
요동 전쟁 때, 누선(樓船)을 이끌고 창해(滄海)로 나갔다. 패수(浿水)로 들어가 평양(平壤)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마주했다. 진격해 고구려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승세를 타고 곧장 평양성 아래까지 나아가 그 성곽을 공격했다. 이에 군사들을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자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고원(高元)의 동생 고건무(高建武)가 돌격대 500명을 동원해 내호아의 군사들을 중간에서 공격했다. 이에 내호아는 패하고 바닷가에서 진을 치며 다시 적들과 교전할 기회를 기다렸다. 후에 우문술 등이 패했다는 것을 알고 결국 철군했다.
<내호아>, 1088~10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