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슈나벨레봅스키 씨의 회상
주인공 슈나벨레봅스키는 원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리로 곧장 가지 못하고 도중에 독일 함부르크와 쿡스하펜, 그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먼저 여행한다.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향락에 흠뻑 빠져 원래 의도인 신학 공부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낯설고 생경한 풍경의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멈추지 않는다. 독자는 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 일상의 순간을 마주하고 빗나간 탐욕과 맹목적 의지에 휘둘리는 인간 삶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슈나벨레봅스키 씨의 회상〉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태를 빌려 시대를 관찰하고 징후를 드러낸 작품이다. 주인공 슈나벨레봅스키는 근대 유럽 사회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거나 풍자하는데, 이는 곧 하이네 특유의 사회 비판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일견, 즉흥적이고 무모한 언행과 공상을 일삼지만 사회의 부정과 도덕적 타락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돈키호테를 떠오르게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하이네의 위트와 세련된 감성,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에 자기도 모르게 웃게 될 것이다.
바헤라흐의 랍비
라인강 변의 작은 마을 바헤라흐와 대도시 프랑크푸르트를 배경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살, 제식 살인 등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소설이다. 기독교의 절대적 권위 아래 무지와 편견에 휘둘린 15세기 중세 서구인의 모습을 면밀하게 그려 낸다.
유월절 축제 전야, 주인공 랍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집 안으로 공동체 사람들을 맞아들여 선조가 걸어온 길을 기념하며《아가다》 구절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낯선 두 남자가 방에 들어와 동족임을 밝히며 예식 참여를 희망한다. 아브라함은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득 경전을 읽던 랍비의 얼굴이 겁에 질린다. 랍비는 곧 태연한 척 경전을 계속 읽어 나가나 잠시 후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이 시작되자 아내 사라를 은밀히 밖으로 불러낸다. 그 길로 랍비 아브라함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을을 빠져 나간다.
200자평
하인리히 하이네는 괴테, 실러와 더불어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낭만적 시인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그런 한편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바탕으로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사회문화를 비판하고 조롱했던 현실참여 작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두 단편은 이러한 하이네의 문학 세계 특징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미완임에도 작품의 성격과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극적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져 독자를 하이네의 문학 세계로 흠뻑 빠져들게 한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괴테, 실러와 더불어 독일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 하인리히 하이네는 낭만주의풍의 시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여러 작곡가가 그의 시를 노랫말로 삼아 아름다운 성악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서정시인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하이네는 ‘3월 이전’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서 신문과 잡지 기사를 비롯하여 소설, 드라마, 수필, 여행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당대의 현실을 질타했던 참여 지식인이자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회 비판, 즉 독일의 정치와 정신세계에서 나타나는 반동적 요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에 직면하게끔 했고, 프랑스 7월 혁명(1830)에 열광했던 그는 결국 1831년 독일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곧 파리의 살롱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조르주 상드, 외젠 들라크루아,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리스트 등 당시 파리 문화계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하이네는 늘 독일을 그리워했고 그리움은 매번 고통으로 남았다. 그의 작품은 독일에서 검열과 압수의 대상이었고, 프로이센 정부는 하이네를 추방할 것을 프랑스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향수병에 더해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이네는 1856년 2월 17일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행 화첩》, 《노래의 책》, 《로만체로》, 《파우스트 박사》, 《고백록》, 《망명 중의 신들》, 《루트비히 마르쿠스》, 《1853년과 1854년의 시》, 《루테치아》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옮긴이
김희근
독일 뮌스터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하이네의 메시아적 전망》, 《성과 속, 그 사이에서의 문학연구》, 역서로 요제프 로트의 《거미줄》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슈나벨레봅스키 씨의 회상
바헤라흐의 랍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나는 파도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은으로 만든 경쟁자인 그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에 오랫동안 선 채로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울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색깔은 탁하고 빛을 잃어 흐릿했다. 큰 슬픔이 밀려왔다. 밀물이 차올랐다. 탁 소리와 함께 부러진 알로에와 수양버들이 파도에 떠밀려 내려갔다가 되돌아왔지만, 하얀 거품 속에서 반원을 그리며 맴돌면서 무섭도록 격렬하게 위로 솟구쳤다. 노 저을 때의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친 파도에 떠밀리며 다가오는 한 척의 작은 배를 발견했다. 네 개의 흰색 형체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을 한 죽은 사람들이었다. 수의를 입은 그들은 배에 앉아서 안간힘을 쓰며 노를 젓고 있었다. 배의 한 가운데에는 창백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수선화의 향기로 만든 것처럼 매우 연약했다. 그녀가 뭍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배는 유령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의 노 젓는 노예들과 함께 다시 심해로 돌아갔다. 판나 자드비가가 내 팔에 안겼다. 그녀는 울다가도 웃음을 지었다.
–<슈나벨레봅스키의 회상> 중에서
2.
꿈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이 잠시 멈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다, 과거와 미래에만 관심을 둘 뿐 현재의 삶 속 순간 안에서 영원을 생각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럴 거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끔찍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두 개의 목발, 즉 공간과 시간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영원한 무의 세계에 갇힐 것이다.
–<슈나벨레봅스키의 회상> 중에서
3.
봄밤에 정겹고 물 맑은 라인강에서 작고 가벼운 배에 오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위안을 얻기 마련이다. 분명 그렇다. 나이 지긋하고 마음 좋은 아버지 같은 라인강은 자식들이 우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자식들을 팔로 안아 이리저리 흔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주며, 가장 값진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니벨룽겐의 거처마저 알려 주겠다고 약속할지도 모른다. 눈물 젖은 아름다운 사라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녀를 괴롭히던 고통도 속삭이듯 흐르는 파도 소리에 사라졌다. 밤은 이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바헤라흐의 랍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