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신자(愼子)≫ 출현의 사회적 배경
중국 역사상 춘추와 전국 시기는 대변혁 시기로서 일대 전환기에 해당한다. 정치상 주(周) 왕조의 명맥은 유지되었지만 천자(天子)가 제후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해서 왕실은 쇠락했다. 경제적으로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사회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넓은 토지가 개간되었고, 급속한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사상과 문화 방면에서는 공자 같은 사상가의 출현으로 사학(私學)이 발전해, 교육과 문화가 귀족의 독점에서 벗어나 대중화되는 데 공헌했다. 춘추 시기 백가쟁명의 분위기는 전국 시기에 더욱 발전하면서 사상은 상호 영향을 주었고, 각 사상들의 통합 국면이 출현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사상가는 주로 부국강병을 통한 중국 통일의 이론 모색에 매진하기도 했다.
신도의 도가(道家) 사상
신도의 자연 숭상 사상은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자가 주장한 “무위(無爲)”가 인위적인 것을 반대하며 소극적으로 자연적인 혜택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신도의 자연 상태란 사람이 자연을 이용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신도가 숭상하는 자연 사상은 도가에 근거했지만 노자의 소극적인 도가 사상의 일면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또한 신도는 “자연 순응”의 용인(用人) 사상을 주장했고 이와 연관 지으면서 ‘자연의 규칙을 준수하고 백성의 정서에 순응한다’는“인순(因循)”의 개념을 도출했다. 신도는 이런 자연 규율을 준수해 직무를 수행하고 동시에 민심에 순응하면 국가는 곧 흥성하지만, 이런 자연 규율을 어기면 국가는 위태롭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용인(用人)과 관련해서 군주는 무위(無爲)를, 신하는 유위(有爲)를 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창했다. 신도의 “군무사(君無事)” 하며 “신유사(臣事事)” 한다는 사상은 노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사상의 계승과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노자가 언급한 무위 사상이란 주로 치국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지만 포괄적인 원칙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신도의 용인(用人) 사상은 노자의 무위 사상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비교적 구체적인 방법과 시책의 제시라 할 수 있다.
신도의 법가(法家) 사상
신도는 치국의 문제에서 법제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편으로는 권세의 작용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군주가 법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세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는 법제의 관철은 물론이고 법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도 부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권세는 특정한 조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의 “중세(重勢)”는 법치 사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며, 초기 법가의 중세파(重勢派) 관점은 후기 법가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법가를 집대성했던 한비(韓非)는 <난세(難勢)> 편을 저술하면서 신도의 중세(重勢) 사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고, 중세 사상에 영향을 받아 법(法)·술(術)·세(勢)를 결합해서 비교적 완전한 법가 이론 체계를 수립해 국가와 백성을 통치하는 이론 체계를 완성하기도 했다.
신도는 국가 통치에 유일하게 법치만을 근거로 해야 하는 것은 오직 법치의 실행을 통해서 상벌의 객관적인 표준의 도출과 상하의 화목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법치의 실행을, 사사로운 원한을 제거하고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 상하가 화목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로 삼았다. 또한 법치로써 사사로운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제의 가장 큰 공로로 여겼다. 신도는 입법(立法)을 사행(私行)과 대립시키면서, 입법으로 사사로움을 제어함으로써 법치의 공정성과 배타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군주”와 “존현(尊賢)”을 대립시켜 “군주가 직위에 있으면 현자는 존중받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법치(法治)와 인치(人治)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주장으로, 신도 사상의 한계다.
200자평
도가에서 출발한 신도의 사상은 전국 시기라는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법치를 옹호하게 된다. 신도는 치국의 문제에서 법제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권세의 작용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러한 신도의 중세(重勢) 사상은 후기의 법가 이론이 성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신도의 도가적 사상, 법가적 사상을 볼 수 있다.
지은이
신도는 중국 전국(戰國) 중기의 사상가다. 그의 사상은 자연을 숭상했던 도가 사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부국강병과 약육강식의 통일 전쟁이 전횡하는 전국 시기에 자연 순응의 무위로는 영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명한 군주는 치국에 오직 법치를 근거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법가를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법치를 주장했다. 특히 신도는 법치로써 사사로운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제의 가장 큰 공로로 여겼고, 법치를 통한 민심의 통일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당시 백가쟁명 중 어떠한 학파에 속했었는지 시대별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를 도가(道家)로 분류했고, 반고(班固)의 ≪한서≫와 ≪통지(通志)≫, 그리고 ≪선진제자합편(先秦諸子合編)≫ 등에서는 그를 법가(法家)로 구분했다. 반면에 청대의 ≪사고전서(四庫全書)≫와 현대의 ≪자서백가(子書百家)≫·≪백가전서(百家全書)≫ 등에서는 그를 잡가(雜家)로 분류하기도 했다.
옮긴이
조영래는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경희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 ≪신자≫, ≪제갈량 문집≫이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중국 역사지리 문헌의 문헌학적 분류와 그 기원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1. 위덕(威德)
2. 인순(因循)
3. 민잡(民雜)
4. 지충(知忠)
5. 덕립(德立)
6. 군인(君人)
7. 군신(君臣)
8. 일문(逸文)
발(跋)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날아가는 뱀이 안개 속에 노닐고, 날아가는 용이 구름을 타는데, 만약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면 이들은 지렁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은 이들이 의지할 바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인이 어리석은 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그의 권력이 약하기 때문이고, 어리석은 자가 현인에게 굴복하는 것은 현인의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당요(唐堯)는 필부(匹夫)일 때는 옆집 사람도 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왕에 즉위해서는 명령을 내리니 반드시 실행되고, 금지하니 멈추게 되었다. 이처럼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복종시킬 수 없지만, 권세와 지위는 충분히 현인을 굴복시킬 수 있다.
-6~7쪽
목공이 문을 만들 때 잘 열리기만 하면 좋다고 여기는 것은 문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문이란 먼저 닫힌 다음에 비로소 잘 열려야 한다.
-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