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탈리 사로트가 쓴 마지막 희곡 작품으로 1982년에 발표되었다. 사로트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로 스스로 명명한 ‘트로피즘(tropisme, 굴성)’이라는 개념이 이 희곡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식물이 햇빛, 바람, 주변 식물 등 여러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특정한 방향으로 휘어지거나 굽어지듯 인간 행동과 감정 역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움직인다. 사로트의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두 남자가 상호작용하며 행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심리 변화, 감정 흐름, 욕구의 촉발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트로피즘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인물의 내면과 언어의 발현, 그리고 그렇게 인물들이 주고받는 자극과 그 반응으로 인해 발전되는 상황을 주된 구성으로 삼고 있다.
사로트에게 글쓰기란 눈에 보이는 인물의 외적 행동을 종이 위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경험한 내적인 움직임을 포착해 관객(독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감각의 확장만이 드라마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받는 다양한 자극들을 무심코 넘겨 버리거나 지나치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어떤 순간을 멈춰서 확장시킨 다음 그 안에 충분히 머물면서 탐구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삶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사건’을 펼쳐 보이기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한다. 내면을 보여 주는 도구는 언어와 대화다. 두 남자의 비논리적인 대화,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순간순간 취하는 행동에 따라 변화되는 상황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관객은 극 중 인물에게 동일화되면서 동시에 객관화된다. 사로트가 드라마 속에서 확장해 보여 주고자 했던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임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우리가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넘어갔던 일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로 남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를 한국 초연한 극단 사자자리 대표이자 옮긴이 이광호가 해외 주요 프로덕션의 무대상 특징을 짚고 텍스트를 어떻게 무대화하면 의미가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해설한 부록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200자평
나탈리 사로트가 “트로피즘”으로 명명한 작가 특유의 문학적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 사소한 언쟁이 계기가 되어 점점 두 남자 내면의 감정이 폭발해 가기 시작한다. 누보로망 양식의 선구자이자 현대 프랑스 연극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탁월한 극작가로 평가되는 사로트는 야스미나 레자, 플로리앙 젤레르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1999)
1900년 7월 18일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공부한 뒤, 베를린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 후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1932년 《트로피즘(Tropismes)》이라는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해 7년 뒤인 1939년에 출판했다. 1940년 반유대 법률로 인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사로트는 문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대표작 《황금 열매(Les Fruits d’or)》, 《저 소리 들리세요?(Vous les entendez?)》, 자전적 소설 《어린 시절(Enfance)》을 비롯해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달리 내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작품들이다. 누보로망(Nouveau Roman) 선구자 격으로서 추상적 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현대성과 혁신성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로트의 특징적인 글쓰기 방식은 극문학 작품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침묵(Le Silence)〉, 〈거짓말(Le mensonge)〉, 〈아름다워라(C’est beau)〉, 〈이스마(Isma)〉, 〈그녀는 거기에 있다(Elle est l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불리는 것(Ce qui s’appelle rien)〉 등의 희곡을 발표하며 프랑스 현대 연극사에서 혁신적이며 탁월한 극작가로 자리 잡았다. 1999년 10월 19일 파리에서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이광호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렌 2 대학에서 연극학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파리 10 대학에서 연극학 준박사 과정(DEA)을 마쳤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제주국제대학에 출강했고 현재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극단 사자자리 대표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를 2023년 6월에 제작, 연출해 공연했다.
최성연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을 졸업, 연극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 작가로 등단했으며, 극작, 연출, 연기를 병행하며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2012년 서울연극제 대상, 희곡상을 수상한 〈그리고 또 하루〉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부록 : 텍스트에서 무대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자 2 : 음… 네가 네 우월함을 드러낼 때, 난 정말 그렇게 세련된 방식은 처음 봤어. 너무나 영리하지. 그게 자랑이라는 걸 절대로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거든. 그건 그냥 원래 거기 자연스럽게 있었던 것처럼 보여. 마치 호수나 산 같아서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고 있어.
남자 1 : 그게 무슨 말이야? 은유법 쓰지 말고 그냥 좀 말해 봐. 설득력 그 자체가 뭔데?
남자 2 : 행복. 행복이지. 다양한 형태의 행복. 게다가 굉장히 큰 행복.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행복의 종류들… 불우한 사람들이 쇼윈도 너머로 넋을 잃고 바라보는 그런 행복…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