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세기 초 미국 시문학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두 번째 시집 《엉겅퀴에 열린 무화과》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빈센트 밀레이는 1920∼1930년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낭송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청중은 그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에 신문들은 그녀에게 ‘포잇 걸(Poet Girl)’이라는 찬탄의 수식어를 선사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셀러브리티였지만 빈센트 밀레이는 무엇보다 여성의 몸과 마음의 자유와 독립을 노래한 페미니스트였으며, 동시에 다양한 사회사건에 참여한 정치시인이었다.
《엉겅퀴에 열린 무화과》는 그녀의 시집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특히 이 책의 첫 시 <첫 번째 무화과>는 여성 시인의 시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 시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여성의 세속적인 성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묘사한 탓이다. 빈센트 밀레이는 이 시집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사회 통념을 유쾌히 거부하며 파격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당시 성별에 따른 평판을 걱정하던 여성 시인들은 남성의 어투로 말하기가 다반사였다.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시가 즐비한 가운데 빈센트는 이 시집에서 당대 다른 여성 시인들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빈센트는 당시 여성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태도로 연인의 아름다움에 흥분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매달리거나 고집하지 않고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놓아준다. 빈센트는 또한 여성이 그저 재미로 변덕스러울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녀의 시에서 여성은 떠나겠다는 협박과 잊어버렸다는 망각으로 연인을 애태운다. 빈센트는 절망한 처녀나 버려진 아내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이 찾아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사랑이 지나가면, 겁쟁이는 할 수 없는 사랑을 했다고 기뻐하며 추억한다. 빈센트의 여성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심각한 내적 분열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그들 중 아무도 본인이 문란했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배신당했다고 울지 않는다.
빈센트 밀레이는 이처럼 시를 통해 사랑할 때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사실에 실체를 부여했다. 빈센트는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다. 빈센트에게 평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빈센트를 시로써 사랑의 평등함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이 시집의 제목 “엉겅퀴에 열린 무화과”는 〈마태복음〉 7장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에서 따온 표현이다. 본래 이 말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나오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나오는 것이니, 거짓 선지자의 거짓말을 경계하라는 뜻을 지녔다. 하지만 원뜻과는 달리 빈센트는 “엉겅퀴에 열린 무화과”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을 통해 여성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다양한 고통과 어려움을 노래했다. 실제로 밀레이는 자신의 시를 “무화과”라고 즐겨 불렀다. 엉겅퀴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빈센트 밀레이가 찬란히 열매 맺은 ‘무화과’들을 만나 보자.
200자평
그리니치빌리지의 절대 뮤즈이자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인 시인 빈센트 밀레이의 두 번째 시집. 이 시집에서 빈센트 밀레이는 여성의 세속적인 성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묘사하며 전통적인 여성성과는 다른 파격적인 여성성을 제시한다. 이번 책은 특히 밀레이의 시 세계를 한층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도울 자료로 193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문학 비평가 칼 밴 도렌(Carl Van Doren, 1885∼1950)의 비평서 《각양각색(Many Minds)》(1924)을 발췌 번역 해 부록으로 실었다.
지은이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1892년, 메인주의 바닷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밀레이 자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노래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시를 읽었다. 빈센트는 평생 동안 어머니와 많은 양의 편지를 교환했는데, 편지에서 종종 자신이 새로 쓴 시를 소개하며, 어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빈센트는 일찍이 학교에서 글쓰기에 큰 재능을 보인다. 10대 초반에 아동잡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1906년 열네 살의 빈센트는 《세인트 니콜라스》에 시 <숲의 나무(Forest Trees)>를 게재한다. 이 시는 빈센트가 잡지에 게재한 최초의 작품이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1917년 첫 시집 《르네상스와 다른 시들》이 출간된다. 빈센트의 후원자들은 시집 출간에 맞춰서 낭송회 일정을 잡아 주었다. 스무 곳이 넘는 도시를 방문하며 30회 이상의 낭송회를 열었다. 신문은 그녀를 미국의 포잇 걸(poet-girl)이라고 불렀다. 이후 《엉겅퀴에서 나온 무화과(A Few Figs from Thistles)》(1920), 《또 다른 사월(Second April)》(1921), 그리고 《하프 짜는 여자의 노래(The Ballad of the Harp-Weaver)》(1922)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문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1927년 사코·반제티 사법살인 사건 이후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한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미정부의 프로파간다 조직인 전시작가연대(Writer’s War Board)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36년 여름 자동차 사고가 있었다. 사고의 여파로 빈센트는 피아노를 치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 사고후유증 때문에 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1950년 집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시집 《눈 속의 수사슴(The Buck in the Snow and Other Poems)》(1928), 《치명적 인터뷰(Fatal Interview)》(1931), 《이 포도의 와인(Wine from These Grapes)》(1934), 희곡 <아리아 다 카포(Aria Da Capo)>, <한밤중의 대화(Conversation at Midnight)> 등을 발표했다.
옮긴이
김영훈은 현재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영어영문학과에서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미국 대중문화가 주 연구 분야이고, 지금까지 포스트네트워크 시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해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영문학의 한국화와 한국학의 세계화가 공유하는 영역을 탐사하며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대중문화의 이식과 변이의 역사, 그리고 현대 한국 보수 문화의 감수성의 기원으로서의 미국 대중문화라는 연구 주제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대표 논문으로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하는 국제 학술지 《Journal of American Studies》에 게재된 〈Rogue Cops’ Politics of Equality in The Wire〉가 있다. 한국학과 관련된 논문으로는 A&HCI 등재지 《Interdisciplinary Study of Literature》에 게재된 〈Yoshikawa Eiji’s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Its Ethical Values in South Korea〉 그리고 《Popular Music and Society》에 게재된 〈Revisiting the South Korean Youth Culture and T’ongkit’a Music〉이 있다. 역서로는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음》(인간사랑, 2014), G. 브루스 보이어의 《트루 스타일》(푸른숲, 2018), 빈센트 밀레이의 《또 다른 사월》(지식을만드는지식, 2023)이 있고, 공저로는 《교사의 재발견》(학지사, 2016)과 《캐나다 아동문학》(한국문화사, 2023)이 있다. 202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차례
첫 번째 무화과
두 번째 무화과
기억
목요일
불가능하지 않은 그대에게
맥두걸 거리
숲 가장자리에서 노래하는 여자
그녀의 노래를 엿듣는다
죄수
탐험하지 않는 자
성인
참회자
다프네
이웃이 그린 초상화
철야
명랑한 처녀
캐슬린에게
S. M.에게−만약 그가 죽음에 이르렀다면
철학자
네 편의 소네트
부록 : 젊음과 날개−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소개
책속으로
1.
<첫 번째 무화과>
내 양초는 양쪽에서 타들어 가네,
이 밤을 못 넘기겠지,
그러나, 아, 나의 적이여, 오, 나의 벗이여,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가!
2.
<목요일>
그리고 내가 너를 수요일에 사랑했다고,
그게,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목요일에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이건 분명 사실이야
그리고 왜 네가 내게 와 불평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래, 내가 너를 수요일에 사랑했어, 그렇지만,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