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주체’에 언어학적 지위를 부여한 뱅베니스트 언어학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넘어 포스트휴먼과 만나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에밀 뱅베니스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소쉬르와는 다른 독자적 언어학 체계를 구축했다. 언어학자로서는 독특하게 ‘주체’ 개념에 주목한 뱅베니스트는 “‘나’는 ‘나’라고 말하는 자다”라는 정의로 구조 아래 억압되어 온 주체 개념에 ‘말하는 주체’라는 언어학적 지위를 부여했다. 뱅베니스트의 주체 이론은 그 범용성 덕분에 언어학을 넘어 철학,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책은 ‘말하는 주체’, ‘상호 주체성’, ‘담론’, ‘문자’, ‘동물의 언어’ 등 열 가지 키워드를 통해 뱅베니스트 언어학의 핵심 개념을 살핀다. 인공지능과의 의사소통을 고민하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도래했다. 과연 기계는 스스로를 ‘나’로 의식하고 인간과 나란히 ‘언어적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뱅베니스트 언어학을 통해 답변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에밀 뱅베니스트(Émile Benveniste, 1902∼1976)
1902년 시리아 알레포에서 태어난 뱅베니스트는 1913년 프랑스로 이주해 1924년 프랑스 귀화 시민이 된다. 사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으로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란어족에 능통한 언어학자로 거의 모든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다뤘다. 실뱅 레비의 추천으로 소쉬르의 제자 앙투안 메이예 밑에서 연구하며 파리고등연구원과 콜레주드프랑스를 거점으로 강의했다. 1927년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메이예에게서 파리고등연구원 자리를 물려받아 브레알, 소쉬르, 메이예로 이어진 파리학파의 계승자가 된다. 대표 저서로 ≪인도유럽사회의 제도·문화 어휘 연구 1, 2≫(1969), ≪일반언어학의 여러 문제 1, 2≫(1966/1974), ≪마지막 강의: 콜레주드프랑스(1968∼1969)≫(2012) 등이 있다.
200자평
에밀 뱅베니스트는 20세기를 지배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넘어 ‘주체’ 중심의 새로운 언어학을 구축했다. 뱅베니스트에게 주체란 스스로를 ‘나’로 인식하고 ‘나’로서 말하는 자다. 이 명제로부터 비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시작된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적 주체’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이 책은 뱅베니스트 언어학의 핵심 개념을 열 가지 키워드로 소개하고 그 현대적 가치를 조명한다.
지은이
서종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4대학에서 인지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미오시스연구센터 교수를 지내고 있으며, 언어연구소 소장과 세미오시스연구센터 센터장을 겸하고 있다. 프랑스학회 부회장(2021)을 지냈으며, 십여 년 전부터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HK) 사업에 참여해 언어학과 더불어 기호학, 문화학 등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후각과 냄새 그리고 언어적 표상”, “텍스트 언어지식의 구조화”, “벵베니스트 다시 읽기: 언어와 주체성”, “발화행위와 ‘담지작용’: 대화적 기능을 중심으로”, “문자 체계와 기호의 표상성: 소쉬르에서 벵베니스트로”, “선전 포스터와 이미지 언어”, “식탁 위의 기호들: 음식과 말, 그리고 사회”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소셜 미디어 속의 기호적 실천과 담론≫, ≪이미지, 문자, 해석≫, ≪내러티브와 자아≫, ≪세미오시스의 매체성과 물질성≫ 등이 있다.
차례
“그는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는다.그는 단지 의미할 뿐이다”
01 말하는 인간
02 말하는 주체
03 상호 주체성
04 해석, 해석체와 피해석체
05 담론
06 시간
07 기호의 필연성
08 문자
09 동물의 언어
10 포스트휴먼, 언어, 주체
책속으로
뱅베니스트의 주체 개념은 순수하게 언어적이다. 뱅베니스트는 주체 개념에 철학의 사변적 특징 대신 온전히 인간 언어에서 관찰되는 담론적 특징을 담았다. 담론 개념은 언어 이론에 대한 뱅베니스트의 공헌 중 가장 참신한 것으로, ≪일반언어학의 여러 문제≫ 특정 장의 명시적 주제인 동시에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논제기도 하다. 담론은 살아 있는 의사소통의 맥락, 즉 상호 주체적 상황 속에서 말하는 주체가 언어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매번 다르다.
-“그는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의미할 뿐이다.” 중에서
‘지금’, ‘여기서’, ‘나’라고 말할 때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 주체의 특권적 지위를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뱅베니스트가 주체성을 ‘화자가 자신을 주체로 자처하는 능력’으로 정의했을 때 주체성은 단순히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느낌’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혹은 나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하루하루 다를 수도 있다.
-“02 말하는 주체” 중에서
뱅베니스트는 논문 “언어 기호의 본질”을 마무리하며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 언어학에서 “사실상 확정된 명백한 진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호의 진정한 본질을 복원해 … 소쉬르를 넘어 소쉬르적 사고의 엄밀성을 굳건히 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새로운 논쟁을 야기했다. 이러한 역사 흐름에서 뱅베니스트의 논문이 촉발한 논쟁은 소쉬르의 연구에뿐 아니라 인문과학에서 구조주의의 방향 설정과 전개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07 기호의 필연성” 중에서
폰 프리슈가 벌이라는 사회적 곤충의 생태를 연구해 동물의 의사소통에 대한 인간 이해의 근본적 변화를 일구어 냈다면, 뱅베니스트는 수천 년을 이어 온 서구 사상의 조류와 별개로 언어학자로서 인간과 언어의 관계, 인간 언어의 본질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벌의 ‘언어’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은 아쉽게도 진전된 형태의 관심과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09 동물의 언어” 중에서
기계가 자신을 ‘나’라고 의식하고 마침내 ‘나’라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시점이 바로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 시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모델로 만든 것이므로 자신의 창조주의 모든 것을 그대로 모사하고 학습하며, 심지어 말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뱅베니스트의 언어적 주체 이론에 근거해 말하자면 데카르트적 코기토에서 벗어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장 문자적 의미에서 ‘말하는 주체’라고 해야 한다. 이때 기계는 마침내 인간처럼 ‘언어적 주체’가 된다.
-“10 포스트휴먼, 언어, 주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