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켈리와 나>: “마침내 켈리백을 손에 넣은 오후”, 자살을 기도하는 영화배우의 마지막 하루를 그리고 있다. 유명 서양 명품 브랜드들이 언급된다. 그렇지만 명품다운 ‘럭셔리한 분위기’가 연출되진 않는다. 명품조차도 우울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소도구로 이용된다.
<모니카의 일기>: 자신을 버린 친모와 자신을 돌보지 않은 계모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중년 여성이 젊은 시절 낙태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꿈과 현실, 기억과 현실,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다 결국 자기 분열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백세 서신>: 타이완 현대사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쑹메이링(宋美齡)의 만년을 그렸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한 그녀는 1975년 남편의 사망 이후 근 30년간 혼자 지내다 2003년 10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은 100세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 그녀가 쓰는 서신을 근거로 전개된다. 작가는 쑹 여사가 남긴 여러 서신을 십분 활용하여 역사적 사건 너머에서 그녀의 삶이, 더욱이 만년에 이른 그녀의 정서가 어떠했을지 추적하고 있다.
<옥수수밭에서의 죽음>: 워싱턴 특파원인 화자가 현지 옥수수밭에서 숨진 어느 화인 남성의 사인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고국,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가 병이 되어 버린 남자에게 집 근처의 옥수수밭은 자신이 살던 타이완 남부의 사탕수수밭으로 화한다. 작가는 남자의 아내와 딸, 회사 동료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을 인터뷰하는 과정을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인공지능 보고서>: 자신이 만든 인조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어느 남자 과학자의 이야기다. ‘인지 1호’로 명명된 ‘나’는 언어를 배우고 자아를 인식해 가는 과정을 시작으로 감각과 지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한계를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인조‘인간’인 ‘나’는 창조와 성장, 그리고 사랑과 그 이후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데 연번에 따라 남겨진 이 기록이 그대로 소설의 스토리다. 우리는 이 인조인간의 고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라든지 인간과 인간이 만든 로봇의 근원적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와 대>: ‘대와 소’가 아닌 ‘소와 대’라는 제목에서부터 의미하는 바가 있다. 수록작 가운데 가장 짧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소 사변적인데, 여기에 ≪어린 왕자≫에 대한 오마주가 돋보인다.
<기로 위 가정>: “정말 뜻밖이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이 날 찾아올 줄이야”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의 구미를 확 당긴다. 화자와 인물의 설정부터 독특한 이 단편을 통해 핑루는 남녀의 사랑과 부부가 이룬 가정의 의미에 대해 묻는 한편, 인생 속 선택의 문제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잇고 있다.
<애정이중주>: 사랑과 시간, 그리고 사랑과 죽음을 대립축으로 일견 복잡한 수학 명제를 풀어 가는 듯한 작품이다. 시간에 맞서, 죽음을 초월해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여성 화자의 논리가 어떠한 전개를 거쳐 뜻밖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유쾌하게 읽어 갈 수 있다.
200자평
타이완 여성 작가 핑루의 작품집이다. 심리학과 수리통계학을 공부했고 통계 분석가, 일간지 주필, 칼럼니스트 등을 거친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 이런 경력은 소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여타 타이완 여성 작가들과는 차별되는 역동적 다채로움을 형성하고 있다.
지은이
핑루의 본명은 루핑(路平)이다. 1953년 6월 17일에 타이완 가오슝(高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온 가족이 타이베이(臺北)로 이사했다. 타이완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아이오와대학 수리통계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미국우정공사(USPS)에서 통계분석가로 일했으며, 타이완의 가장 권위 있는 종합 일간지 ≪중국시보(中國時報)≫ 주필을 지냈다. 이후 주미 특파원으로 일하며 ≪미주시보주간(美洲時報周刊)≫ 주필을 역임했다.
타이완으로 귀국한 후 ≪중시만보(中時晚報≫ 칼럼 주임을 지냈으며, 타이완대학 언론대학원(台灣大學新聞研究所)과 타이베이예술대학 예술행정관리대학원(台北藝術大學藝術管理研究所)에서 교편을 잡았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타이완과 홍콩 두 지역의 예술과 문화 교류를 목표로 홍콩에 설치된 광화문화센터에서 주임으로 일했다. 2014년 3월 전 민주진보당 주석 린이슝(林義雄), 중앙연구원 부연구원이자 법학 교수인 황궈창(黃國昌) 등과 함께 비정부단체 ‘공민조합’을 발기하여 ‘즐거운 참정’을 기치로 활동 중이다.
핑루는 1983년 <옥수수밭에서의 죽음>으로 타이완에서 발행하는 중문 일간지 ≪연합보(聯合報)≫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소설상을 수상했으며, 시보문학상(時報文學獎) 최우수 극본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 쑨원(孫文)-쑹칭링(宋慶齡) 이야기를 그린 ≪걸어서 하늘 끝까지(行道天涯)≫(1995)와 2002년 출판된 타이완 국민가수 덩리쥔(鄧麗君)의 수수께끼와 같은 죽음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린 ≪그대 언제 다시 오려나(何日君再來)≫ 등이 있다. 단편소설집으로 ≪백세 서신(百齡箋)≫, ≪금서계시록(禁書啟示錄)≫, ≪모니카의 일기(蒙妮卡日記)≫ 등이 있으며, 근작 장편소설로 2011년에 출판된 ≪동방의 동녘(東方之東)≫과 이듬해 9월에 출간된 ≪파사의 섬(婆娑之島)이 있다. 소설 외에도 사회·문화·인권 등을 제재로 한 평론과 문화비평 관련 칼럼을 다수 썼다. 산문집으로 ≪마음을 읽는 책(讀心之書)≫과 ≪홍콩에서의 지난날들(香港已成往事)≫ 등이 있다.
옮긴이
고찬경은 동아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청(顧城) 전기 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 2월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의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학위논문 작성과 중국 현대문학 작품 번역에 힘쓰는 한편, 신라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중국의 현대시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해서 중국 외의 지역에서 그 창작의 지경을 넓혀 가고 있는 화인화문시(華人華文詩歌)에 관한 연구와 작품 번역을 병행하고 있다.
번역서로 2011년 2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판한 ≪예웨이롄 시선(葉維廉詩選)≫과 2012년 9월에 출판한 ≪홍콩 시선 1997∼2010(香港詩選 1997∼2010)≫이 있고, 공동 번역서로 2008년 9월 실천문학사에서 출판한 ≪목욕하는 여인들(大浴女)≫이 있다. 논문으로 <중국인의 20세기 후반 삶의 조건과 개인 욕망의 양상 ― ≪목욕하는 여인들(大浴女)≫의 장우(章嫵)와 인샤오탸오(尹小跳)를 중심으로>(≪인문과학연구≫ 제5호, 동아대 석당학술원, 2013. 2)가 있으며, 서평으로 <다시 쓰는 중국 현대문학사, 그 터 위에 피어난 꽃>(≪코기토≫ 제67호,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2010. 2) 등이 있다.
최근에는 부산대 현대중국문화연구실에 소속되어 중국 현대문학 연구와 문학작품 번역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 ≪옥수수밭에서의 죽음≫의 번역 또한 이러한 활동의 성과물 가운데 하나다.
차례
켈리와 나
모니카의 일기
백세 서신
옥수수밭에서의 죽음
인공지능 보고서
소와 대
기로 위 가정
애정이중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너무 모질었지만, 그녀로서는 보통의 아내들처럼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남편을 역성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순간, 그녀는 한 글자도 쓰지 않은 만년필을 내려놓고 자신이 어떻게 수차례 남편을 무시함으로써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는지 떠올렸다. 영어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사실 그녀는 남편이 느끼는 극도의 불안함을 알면서도 일부러 도발을 감행했다. 때로 미국인 청년과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매력이 여전히 통하는지 테스트해 보기도 했다. 카이로 회담 당시 처칠 옆에 자리하게 된 남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곤경에서 구하려 들지 않았다. 남편은 뻣뻣한 군복 차림으로 두 손은 청천백일기가 새겨진 군모를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양 꽉 잡고 있었다. 그는 영어를 알아듣는 척했지만, 참석한 이들 모두 그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교태 섞인 미소를 짓고 수시로 눈웃음을 치며, 앞코가 뚫린 하이힐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절름거리는 다리를 툭 찼다.
그녀는 남편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또한 두 사람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이 때문에 부부로서의 관계조차 복잡해졌다. 그가 그녀에게 찬성하는데, 그녀가 그에게 찬성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인 것일 수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그렇게까지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훗날 그녀는 꿈에 남편의 손목에 맺힌 피멍과 소리 없이 잇따라 경련이 일던 입술을 수도 없이 보았다. 큰 힘을 가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도대체 그녀는 얼마큼 기운을 몰아 쓴 걸까? 당시 어르신이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문까지 떠도는 마당에 이를 불식시킬 호기가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 11기 3중전회를 마친 주석단 대표를 롱민종합병원(榮民總醫院)으로 불러 직접 총재를 뵙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