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외제니 그랑데≫는 낭만주의 시대에 속해 있던 발자크를 사실주의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작가로서의 성공을 확실히 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몇 번의 출간과 재출간을 거쳐 ≪인간 희극≫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작품을 한데 모아 재배열하고자 한 발자크의 의도에 따라, 1976년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펴낸 플레야드 총서의 제3권에 <지방 생활 정경>의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외제니 그랑데≫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다시 왕의 통치 체제로 돌아선 왕정복고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소뮈르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낡고 음침한 한 저택을 무대로 펼쳐지는 10년 동안의 이야기는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는 신흥 부르주아지의 탄생 과정에 대한 실증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순진한 시골 처녀가 어느 날 파리에서 온 사촌 오빠를 만나면서 사랑에 눈뜨고, 그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가혹한 시련을 당하게 되며, 끝내는 사랑에 배신당하면서도 첫사랑의 순수한 영혼을 잃지 않는 한 편의 서글픈 연애소설로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외제니의 아버지 그랑데 영감은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수전노의 전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랑데 영감은 아내의 지참금을 바탕으로 뛰어난 투기 실력을 발휘하여 막대한 재산을 일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딸에게까지 수전노의 생활을 강요하며 황금에의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결혼 적령기에 달한 외동딸과 사돈을 맺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로부터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려고 그들의 호의를 마음껏 이용한다. 한편 그의 외동딸 외제니가 사랑하게 되는 남자는 그녀의 사촌인 샤를 그랑데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멋쟁이 파리지앵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파산하게 되고, 그 치욕을 면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이러한 불행은 외제니와 그랑데의 사랑에 불을 지피는 동시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된다. 무일푼이 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가 7년 만에 부자가 되어 돌아오지만, 더 이상 헌신적 사랑을 맹세하던 순진한 청년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랑데를 향한 외제니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이 번역서는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펴낸 플레야드 총서 제3권의 ≪Eugénie Grandet≫를 원본으로 하였다. 전체 내용의 절반이 조금 넘는 분량으로, 외제니와 샤를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스토리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발췌했으며, 소설의 서두와 결말 부분을 살림으로써 발자크 글쓰기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했다.
200자평
≪고리오 영감≫과 함께 발자크의 사실주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 발자크는 이 작품에서 황금만능주의와 약육강식의 생존 법칙으로 사회의 주역이 되는 부르주아 남성들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남성적 억압과 사회적 소외를 겪으며 예속적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세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각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지은이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이다. 그는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소설, 여섯 편의 희곡과 수많은 콩트를 썼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발자크의 어머니는 발자크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양육을 맡겼고, 여덟 살 때 기숙학교로 보낸 뒤 6년 만에 쇠약해진 심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러한 ‘불행한 기혼녀’와 그 여성이 지닌 냉정한 모성이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프다. 이와 함께 많은 작품의 여주인공에게서 발자크에게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준 여인들의 단편적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시대에 사실주의의 문을 연 작가로 문학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발자크는 1841년에 그동안 자신이 써낸 모든 작품과 앞으로 써낼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인간 희극≫이란 총서를 기획한다. 등장인물만 2천 명이 넘는 ≪인간 희극≫은 1789년 대혁명 직후부터 1848년 2월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정치·경제·사회적 영역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또한 파리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까지 아우르면서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 발자크다운 야심의 산물이다. 그중에서도 ≪외제니 그랑데≫를 포함하여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마법 가죽≫, ≪루이 랑베르≫, ≪사라진 환상≫, ≪세라피타≫, ≪미지의 걸작≫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옮긴이
조명원은 전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파리 7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으며,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 후 연수를 수행했다. 전북대학교, 홍익대학교를 비롯한 대학에서 강의했다. 주 저서로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한 발자크 작품 연구>(박사학위논문), ≪색깔 있는 문화-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젠더≫(공저), ≪살롱 카바레 카페≫(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담론의 장르≫(공역)가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외제니 그랑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그리운 아네트…’, 그것을 보자 그녀는 현기증이 일었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고, 두 다리는 바닥으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리운 아네트라고…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구나.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뭐라고 썼을까?’ 이런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지나갔다. 그녀는 불꽃이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그리운 아네트’라는 문구를 사방에서, 심지어 방바닥 위에서까지 읽었다.
2.
그래요, 친애하는 사촌 누이. 불행하게도 나에게 환상의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오. 그러니 어쩌겠소. 수많은 나라를 이리저리 떠돌면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지요. 떠날 때는 어린애였지만 돌아올 땐 어른이 되어서 왔다오. 오늘 나는 전에는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자유요, 사촌. 나 역시 마찬가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