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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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사상의 억압에서 벗어난 표현 기법
1901년, 요사노 아키코가 발표한 첫 가집(歌集)인 ≪헝클어진 머리칼≫은 작가 자신의 연애, 갈등, 성애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다. 지방 문학회 회원으로 습작을 시작한 아키코는 자신의 스승이자 당시 문학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뎃칸에 대해 존경과 연모의 감정을 키워갔다. 이미 처자가 있었던 뎃칸의 이혼, 절친한 시우 야마카와 도미코와의 미묘한 삼각관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가출과 동거를 거쳐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이 책은 봉건적 인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세간의 통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녀 간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여성의 의지와 감정을 미적, 긍정적으로 드러낸다. 발간 당시 이 가집은 “참신한 성조와 기발한 사상을 노래해 문단의 적요를 깨트린 시단 혁신의 선구”로 환영받으며 젊은 남녀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 문단을 넘어서는 사건이자 현상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기성 가단의 원로들과 교육자들의 문란하고 부도덕하다는 비판은 오히려 명성을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아키코가 처음 <묘조>에 투고한 1900년 4월부터 약 1년 반 사이에 창작된 399수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각 장에는 <연지보라(臙脂紫)>(98수), <연꽃 배(蓮の花船)>(76수), <흰 백합(白百合)>(36수), <스무 살 아내(はたち妻)>(87수), <무희(舞姫)>(22수), <봄날(春思)>(80수)과 같이 소제목이 붙어 있고, 단카들은 각각의 주제에 맞추어 처음 창작 당시의 상황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새롭게 배치되었다. 편년체 편집을 원칙으로 하던 기존의 가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기적 구성을 통해 작품의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는 효과를 획득함으로써 주제별 편집 방식이라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 책에서는 초판본의 장 구성과 작품 배열 순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399수 중 140수를 번역해 수록했다. 옮긴이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의미 번역을 우선하되, 축어적 번역으로 충분한 의미 전달이 어려운 경우에는 학계의 해석을 참조해 각 작품이 표현하는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각 단카에 대한 해제는 전혀 달지 않았고 지명이나 작품의 전거가 있는 경우 등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주석을 첨가했다. 대신 각 장의 서두에 덧붙인 짤막한 해설에서 가집 전체를 관류하는 중심 이미지들을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단카 특유의 정형률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5․7․5․7․7의 음절 수를 맞추고자 노력했다. 단, 한 줄로 이어 쓴 원문과 달리 번역은 3∼5줄로 행을 나누어 표기했다. 같은 음수율 속에서도 5개의 구가 끊어지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내재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점 또한 단카의 매력이므로 각각의 구조를 고려해 보다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꾀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시각적 단조로움을 피해 가집 특유의 분방한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했다.
200자평
≪묘조(明星)≫의 여왕, ‘정열의 가인’으로 칭송받은 일본 근대 시인 요사노 아키코의 첫 단카 모음집 ≪헝클어진 머리칼(みだれ髮)≫의 전체 399수 중 약 35%에 해당하는 140수를 골라 옮겼다.
그녀는 유부남이었던 스승 요사노 뎃칸과의 스캔들로도 유명했는데, 이 가집에는 이러한 파격적인 연애 체험을 고스란히 반영해 관능의 향기와 자유분방함이 살아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시했던 여성의 육체와 관능, 자유연애에 대한 의지와 감정을 자유롭게 그린 이 가집은 봉건사상에서 벗어나 근대 여성의 자아를 해방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젊은이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우에다 빈은 ≪헝클어진 머리칼≫ 발간 당시 “참신한 성조와 기발한 사상을 노래해 문단의 적요를 깨트린 시단 혁신의 선구”라고 극찬했다. 일본의 전통 정형시 단카 형식을 개인의 감정을 솔직히 노래한 현대시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할 만하다.
지은이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 1878∼1942)는 사카이(堺)의 전통 과자점 스루가야(駿河屋)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2세 무렵부터 가업을 도와 장부를 기록하거나 대나무 껍질로 단팥묵을 포장하는 등 일에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후일 유년 시절을 회상한 글에서 그녀는 “밤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밤 12시에 꺼지는 전등 아래서 겨우 1시간 또는 30분 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내가 읽은 책들은 여러 가지 공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고 술회했는데, 답답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부친의 장서였던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베갯머리 서책(枕草子, 마쿠라노소시)≫, ≪영화 모노가타리(榮華物語)≫ 등 고전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소녀 아키코는 암울한 현실의 저편에 있는 감미로운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독서 목록에는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가 보내오는 당시의 최신 문예 잡지와 신소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진학한 사카이 여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봉건적 여성 교육을 주로 하는 학교였으나, 아키코는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체감하고 가부장적 구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의식을 키워갔다.
그녀의 재기는 1899년 서일본 지방 문학청년들의 모임인 관서청년문학회 입회를 통해 싹트기 시작해, 요사노 뎃칸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일시에 분출되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인 ≪헝클어진 머리칼≫은 근대적 자아에 눈뜬 새로운 여성의 목소리를 대담하고 분방하게 표현한 것으로,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초기 일본 낭만주의의 거점이었던 문예지 ≪묘조≫의 여왕으로 활약하며 일본 문학사상 ‘정열의 가인’으로 기록된다. 결혼 후에는 소설, 시, 평론, 고전 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한편,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가는 정력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사이 작풍은 초기의 격정적인 어조는 퇴색되었으나 낭만적 미질을 유지하는 가운데 점차 내면적인 깊이를 더해 고요한 자기 관조와 사색적 서정을 내포해 가게 되었다. 1912년 뎃칸과 함께한 유럽 여행 이후에는 여권 신장 운동 체험을 바탕으로 넓은 사회적 시야를 갖고 부인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학원(文化學院)을 창립(1921)해 초대 학감에 취임하는 등 문학은 물론 교육 활동에 있어서도 폭넓은 족적을 남겼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함께 널리 회자되는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반전시로 일컬어지는 장시 <너는 죽지 말거라(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1904)를 들 수 있다. 아키코는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시의 가치를 믿었으며 전 생애를 다해 사랑을 노래한 작가로 기억된다. 1942년 뇌일혈 투병 중 사망하기까지 그녀가 남긴 가집은 20권, 약 5만 수다.
옮긴이
박지영(朴智暎)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원 비교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논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자기 인식에 대한 고찰>을 씀으로써 단카와 인연을 맺은 이후로 메이지(明治)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 단카의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박사논문 <근대 한일 정형단시의 비교 연구>에서는 단카와 더불어 같은 단시형 문학인 우리 시조의 발전 과정을 고찰했다.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문학 장르가 현대의 전자미디어 시대에 스스로를 변용시키며 발전해 가는 양상을 탐구하는 것이 최근의 관심사이며, 나아가 문학을 통해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를 모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 <비평으로서의 단카>(<일본언어문화>, 2006.4), <마사오카 시키와 선(禪)>(<세계문학비교연구>, 2007.12) 등이 있고 역서로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6) ≪일본 명단편선 3 근대를 살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 등이 있다.
차례
연지보라(臙脂紫)
연꽃 배 (蓮の花船)
흰 백합(白百合)
스무 살 아내(はたち妻)
무희(舞姫)
봄날(春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진홍빛 장미 겹겹이 꽃잎 같은
이 내 입술로
영혼의 향기 없는 시는 읊지 않으리
くれなゐの薔薇のかさねの唇に靈の香のなき歌のせますな
미친 듯 내게
불꽃같이 가벼운 날개가 돋아
황망히 떠나왔네
백삼십 리 여행길
狂ひの子われに焰の翅かろき百三十里あわただしの旅
신께 한 약속
어긴 채 다시 여기
그대 만났네
또다시 헤어져도
괴로움은 없으리
神にそむきふたたびここに君と見ぬ別れの別れさいへ乱れ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