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율리에 아씨(Fröken Juliöé)〉(1888)는 스트린드베리의 대표적 희곡으로 ‘유전’과 ‘환경’이라는 당시 자연주의 예술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불안함, 초조와 죄책감, 의무와 체면이 욕망과 혼란스럽게 뒤얽힌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이분법적 선택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철학적인 작품이다.
백작의 딸 율리에와 백작의 하인 얀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서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달려간다. 율리에는 몰락해 가는 귀족의 모습을, 얀은 호시탐탐 신분 상승을 꾀하는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렇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의 갈등, 귀족과 하인이라는 계급의 갈등, 이상과 현실, 욕망과 사회적 체면, 빈부의 격차 등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담아내고 있다.
작품의 제목을 그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미스 줄리”나 “줄리 아씨”로 하지 않고 원어 제목에 맞게 “율리에 아씨”로 정했다. 등장인물도 “줄리”와 “장” 대신 “율리에”와 “얀”으로 했다. 또 다소 고어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것이 신분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영어 번역본 중에는 “Miss Julie” 대신 신분에 맞게 “Lady Julie”나 “Countess Julie”로 옮긴 경우도 있다. 사실 하인들이 율리에를 부를 때 어떤 호칭을 사용할지를 생각할 때 “아씨”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아가씨”와 달리 “아씨”에는 분명 높임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0자평
스트린드베리는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켜 <율리에 아씨>를 썼다. 실화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비극으로 완성했다. 인물의 행동이 오직 하나의 주된 동기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고전주의적 연극 전통을 거부하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지은이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Johan August Strindberg, 1849∼1912)
1849년 1월 2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웁살라 대학에서 화학, 의학, 법학 등을 공부했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870년 작은 마을에 교사로 부임한 뒤 여가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79년 자연주의 계열의 첫 소설 《붉은 방(Röda rummet)》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전도유망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1880년대 스트린드베리는 여러 모로 불안한 시기를 보냈다. 세 번 결혼하고 이혼했는데, 특히 배우 시리 폰 에센과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스트린드베리에게 치명적이었다. 시리와의 결혼과 이혼은 스트린드베리 후기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트린드베리의 가장 유명한 희곡은 1880년대부터 1890년대 사이에 쓰였다. 〈미스 줄리〉(1888), 〈아버지〉(1887), 〈채권자들〉(1889) 등이 이 시기에 쓰였으며, 그로부터 몇 년 뒤 〈꿈 연극〉(1901)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은 이후 스웨덴 연극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스트린드베리는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스트린드베리는 다방면에서 대담한 실험을 통해 현대 연극의 초석을 다졌다. 초기 작품들은 자연주의와 심리적 사실주의 경향을 고도화하는 데 기여했다. 여성 캐릭터 묘사와 성역할 탐구에서도 스트린드베리는 선구적이었다. 우울증, 편집증, 환각 등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스트린드베리는 1912년 5월 14일 스톡홀름의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가 63세 일기로 사망했다. 스트린드베리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을 의미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현대 연극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스트린드베리와 그의 작품은 여전한 찬사 속에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옮긴이
오세곤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현대 희곡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논문 : 장 주네의 희곡 연구)를 마쳤다. 《배우의 화술》, 《예술강국, 문화대국》, 《연기화술클리닉》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연극 분야 고등학교 교육과정(2009, 2015, 2022) 개발과 여러 종의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 집필을 주도했으며,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과 《엄중한 감시》, 시집 《사형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왕은 죽어 가다》, 《살인놀이》, 《알마의 즉흥극》, 《신붓감》, 장 아누이의 《반바지》, 스트린드베리의 《율리에 아씨》, 하벨의 《청중》,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 등 여러 작품을 번역 출판했다. 〈왕은 죽어 가다〉, 〈우리 읍내〉, 〈체홉의 수다〉, 〈술로먼의 재판〉, 〈갈매기〉, 〈보이첵〉, 〈가라가라〉, 〈가라자승〉, 〈타이터스〉, 〈보이지 않는 하늘〉, 〈오 행복한 날들〉, 〈하녀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1996년 가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2020년 8월까지 연극무용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20년 9월부터는 같은 대학교 명예교수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율리에 아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율리에 : 난 못 가. 여기도 못 있어. 도와줘! 피곤해. 너무 피곤해. 명령을 해! 어떻게 하라고! 생각도, 행동도 못하겠어…
얀 : 스스로도 한심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잘나시고, 하느님보다 더 도도하신 분이? 좋습니다. 명령을 하죠. 방으로 가서, 옷을 입고, 여행 경비를 챙긴 다음, 이리 오세요.
-91쪽
얀 : 어버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죠?
율리에 : 아니… 끔찍이 사랑했어… 증오도 했지만. 분명 그랬어. 못 느꼈지만. 하지만 날 동성 혐오자로 키운 건 아버지야. 반 여자 반 남자로. 과연 누구 잘못일까?… 아버지, 어머니, 나? 내 잘못? 아니, 내 건 없어. 생각은 모두 아버지 거고, 감정은 모두 어머니 거야… 만인이 평등하다는… 최근의 생각도 … 실은 그 남자 거지. 약혼했던. 그래서 멍청이라고 놀렸지만. 그러니 잘못인들 내 거겠어? 모든 걸 예수한테 맡겨? 크리스틴처럼?… 아니, 자존심이 강해서, 너무 똑똑해서 안 돼… 지적인 아버지 덕분에. 부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거짓말이야. 아니면 크리스틴도 천국에 못 가. 은행에 저금이 있으니까. 그럼 다 누구 탓이지? 하긴, 누구 탓이건 무슨 상관이야? 비난도 내가 받고, 결과도 내가 감수할 텐데…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