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한국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이며 저항시인이자 민중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22년 1월 ≪백조(白潮)≫ 창간호에 <말세(末世)의 희탄(欷嘆)>을 발표하면서 등단해 1941년 <서러운 해조(諧調)>에 이르기까지 63편의 시와 평론, 감상, 번역, 창작, 동시, 시조 등을 남겨 놓았다. 그는 일제 강점의 암울한 시기인 초기 시단에 등장해 감상적·낭만주의적 경향의 시를 쓰다가 1924년 후반 프로 문학에 가담하면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저항시, 민중시를 쓰게 된다. 또한 1926년 이후에는 저항의식과 더불어 자연을 소재로 해서 향토적 정서를 담은 시를 창작했다. 그의 시는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중시로서 또는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예술성을 획득함으로써 바람직한 민족시의 한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월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출생해 유폐된 이방인으로 살다가 1929년 11월 3일, 29세에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이장희는 1924년 ≪금성(金星)≫ 3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양주동, 유엽, 백기만과 함께 문예지 ≪금성≫에 관여하면서 이장희는 당대의 시단이 사회적, 현실적 경향에 흐르는 것에 반대하고 유미적, 심미적 경향의 시를 쓰게 된다.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40여 편의 시를 창작했다. 그는 철저하게 외부 세계에서 고립된 채 시 창작에서 자신만의 독창적 방법을 고수하면서 결벽주의자로서 삶을 마감했다. 극약을 먹고 자살하기까지 그는 소극적이고 비사교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부모나 이성 관계뿐만 아니라 교우 관계에서도 뜻이 통하지 않으면 ‘속물’이라고 하며 배격했다. 따라서 고월과 접촉했던 교우는, ≪금성≫ 동인들, 양주동, 백기만, 유엽, 김영진, 현진건, 이상화, 오상순, 이경손 등에 불과했다.
상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감각적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시각적 이미지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총체적 공감각을 사용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일정한 음악적 리듬을 살린 그의 시 세계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평가받는다.
200자평
한국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자 저항시인, 민중시인인 이상화와 <봄은 고양이로다>로 등단해 유폐된 이방인으로 살다 간 유미주의자 이장희의 시를 함께 모았다. 다르지만 닮았던 두 벗의 치열한 민족의식과 예술의식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은이
이상화(1901∼1943)는1901년 대구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의 2남으로 출생했는데, 가정은 부유했으나 7세 때 부친이 별세해, 어머니의 인자하고 후덕한 성정과 백부 이일우의 엄격한 훈도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 이일우는 인품과 재력을 갖추었으며, 민족정신을 선도하고 국민 계도에 앞장선 지사로서, 이상화로 하여금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한문 수업을 받게 했다. 백부를 통해 이상화는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화의 형인 이상정이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가계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이상화는 17세에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함께 대구에서 ≪거화(炬火)≫라는 습작집을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구에서 백기만과 더불어 독립운동 거사 모의에 참여하나 사전에 누설되어 서울로 피신, 박태원의 하숙에 기거하게 된다. 이해 10월 서한보의 장녀 서온순과 결혼했다.
1922년, 빙허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된 이상화는,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To___>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마음의 꿈>을 게재하게 된다. 이들 시에는 식민지의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오는 좌절, 권태, 우울, 애수 등이 불덩이 같은 정열로 분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는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도일했는데 도쿄 체류 기간인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는 문단에 대단한 주목을 불러일으킨다. 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낭만적 상상력과 유미주의의 극한” 또는 “낭만적 에로티시즘의 정화” 또는 한국 데카당스 문학의 전형으로 미학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에는 당시 이상화가 대구에 본처를 둔 상태로 유보화와 사랑에 빠진 일 등 20세 초 청년기에 체험한 사랑과 열정, 일제의 질곡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강박 관념, 불안 심리, 성애의 원죄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조기에는 ‘데카당이즘’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절망을 다룬 시편들을 주로 창작한다.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1924년 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1925년 2월, 무산 계급 문예 운동 단체인 ‘파스큘라’에 참석하고, 1925년 8월 결성된 카프에 가담하면서 창작기의 절정기를 이룬다. 이상화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시 34편, 평론 7편, 단편 2편, 감상문 4편 등 50여 편의 각종 시문을 남겼다. <가장 비통한 기욕> <이해를 보내는 노래> <빈촌의 밤> <조소> <가상> 등에는 일제의 압제와 착취 아래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의 빈궁상을 보여 주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과 저항의식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화는 <무산 작가(無産作家)와 무산 작품(無産作品)>과 같은 급진적인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카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이상화의 한계 지워진 계급투쟁 의식은 <가상> <조소>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비를 다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6년 가을, 연인이었던 유보화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1927년, 이상화는 향리인 대구로 낙향해 카프나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서울 생활을 청산한 이상화는 대구에서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애정 행각을 벌이고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해 작고하기까지 14년간 침묵기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신간회에서 출판 간사직에 있던 이상화는 여러 차례 가택 수색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낙향기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침체는 그가 처한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화가 1934년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은 것도 실의와 좌절의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부터 약 3개월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난 후, 이상화는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해,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사회에 봉사하게 된다. 이에 대륜중학의 건립에 이상화의 숨은 공로가 지대했다고 전한다. 이상화의 이러한 사회적 헌신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민족의 광복을 성취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충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의 아호 ‘백아(白啞)’는 어둡고 불구적인 식민 치하의 고통을 실의와 자조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40년, 이상화는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며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프랑스 시 평역 등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43년 4월 25일, 불치의 병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타계한다.
이장희(1900∼1929)는 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
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
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
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엮은이
장현숙은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이화여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황순원 소설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천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황순원 문학연구≫(푸른사상사, 2005), ≪현실인식과 인간의 길≫(한국문화사, 2004), ≪한국현대소설의 숨결≫(푸른사상사, 2007) 등이 있으며, 편저로 ≪황순원 다시 읽기≫(한국문화사, 2004), ≪한국소설의 얼굴≫(전 18권, 푸른사상사, 2009, ≪초판본 김현승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초판본 김용성 작품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등이 있다.
≪현실인식과 인간의 길≫에는 김유정·김동리·황순원·은희경에 대한 논문이 다수 실려 있으며, ≪황순원 다시 읽기≫에는 개성적인 황순원 소설을 발췌해 수록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붙여 이해를 돕고자 했다.
≪한국소설의 얼굴≫에는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2000년까지의 한국 현대 소설에서 대표 작품을 발췌해 수록하고 각 편마다 해설을 붙였다. 이 전집을 발간하면서 역사와 시대 현실 속에서 겪었던 당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근원을 이해하고 자아 정체성 찾기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논문들이 있으며 최근에는 황순원·김동리 문학 외에도 은희경·오정희·최명희·윤흥길 소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차례
≪이상화 시선≫
末世의 欷嘆
單調
가을의 風景
To
나의 寢室로
二重의 死亡
마음의 꼿
獨白
虛無敎徒의 讚頌歌
訪問拒絶
池畔靜景
斷章 五 篇
離別을 하느니
暴風雨를 기다리는 마음
바다의 노래
舊稿 二 章
街相
金剛頌歌
淸凉 世界
오늘의 노래
夢幻病
새 世界(번역시)
詩 三 篇
‘도−교−’에서
本能의 놀애
原始的 悒鬱
이해를 보내는 노래
詩人에게
慟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비 갠 아츰
달밤−都會
童女心草
病的 季節
地球 黑點의 노래
저므는 놀 안에서
비를 다고!
哭子詞
大邱 行進曲
叡智
반딧불
농촌의 집
逆天
나는 해를 먹다
己未年
서러운 諧調
≪이장희 시선≫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舞臺
봄은 고양이로다
憧憬
夕陽 丘
고양이의 꿈
겨울밤
靑天의 乳房
비 오는 날
沙上
비인 집
달밤 모래 우에서
연
겨울의 暮景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
夏日 小景
들에서
눈
가을ㅅ밤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
저녁
어느 밤
저녁
녀름ㅅ밤 公園에서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
여름밤
쓸쓸한 시절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獨白(이상화)
나는 살련다 나는 살련다
바른 맘으로 살지 못하면 밋처서도 살고 말련다
남의 입에서 세상의 입에서
사람 靈魂의 목숨까지 끈흐려는
비웃슴의 쌀이
내 송장의 불상스런 그 꼴 우흐로
소낙비가치 내려 쏘들지라도−
찟퍼불지라도
나는 살련다 내 뜻대로 살련다
그래도 살 수 업다면−
나는 제 목숨이 앗가운 줄 모르는
벙어리의 붉은 울옴 속에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怨恨이란 일홈도 얼골도 모러는
장마 진 내물의 여울 속에 빠저서 나는 살련다
게서 팔과 다리를 허둥거리고
붓그럼 업시 몸살을 처 보다
죽으면− 죽으면− 죽어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도−교−’에서−一九二二 秋(이상화)
오늘이 다 되도록 日本의 서울을 헤메여도
나의 꿈은 문둥이 살끼 가튼 朝鮮의 땅을 밟고 돈다.
옙분 人形들이 노는 이 都會의 豪奢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니치는 조선의 한울이 그리워 애닯은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
‘東京’의 밤이 밝기는 낫이다− 그러나 내게 무엇이랴!
나의 記憶은 自然이 준 등불 海金剛의 달을 새로히 손친다.
色彩와 音響이 生活의 華麗로운 아롱紗를 짜는−
옙분 日本의 서울에서도 나는 暗滅을 설읍게− 달게 꿈꾸노라
아 진흙과 집풀로 얽멘 움 미테서 붓처가티 벙어리로 사는 신령아
우리의 압헨 가느나마 한 가닥 길이 뵈느냐− 업느냐− 어둠뿐이냐?
거록한 單純의 象徵體인 힌옷 그 넘어 사는 맑은 네 맘에
숫불에 손 듼 어린아기의 쓰라림이 숨은 줄을 뉘라서 알랴!
碧玉의 한울은 오즉 네게서만 볼 恩寵 바덧단 朝鮮의 한울아
눈물도 땅속에 뭇고 한숨의 구름만이 흘으는 네 얼골이 보고 십다
아 옙부게 잘사는 ‘東京’의 밝은 웃음 속을 왼 데로 헤메나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별과 함 우는 흐린 호롱불을 넉업시 볼 뿐이다.
●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꼿가루와 가티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흔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가티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밋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폭은한 봄 졸음이 돌아라.
날카롭게 쭉 뻐든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눈은 나리네(이장희)
이 겨을의 아츰을
눈은 나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함으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가 하노라.
님이어 설은 비치
그대의 입설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나리어
우리 함끠 빌 때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