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표해록≫은 장한철(張漢喆)이 1770년 가을 제주 향시에서 수석을 하고 나서, 서울 예조에서 치르는 회시에 응시하려고 그해 겨울 뱃길에 올랐다가 풍랑을 잘못 만나 고생스럽게 표류하던 때의 일을 적은 것이다. 중세의 이야기들은 주로 집을 떠난 모험을 다루거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권력 다툼을 다루는데, 실제 겪은 일을 적고 있는 이 ≪표해록≫에는 자연이 주는 시련과의 맞섬 및 꿈속 여인과의 하룻밤 사랑 이야기가 긴밀하고도 자연스럽게 짜여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표해 문학의 전통은 15세기 말 최부의 ≪금남표해록≫을 필두로 20세기 초에 활자화된 이방익의 ≪표해가≫(창작은 18세기 말에 이루어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표해 문학은 사실을 전수하려는 체험자의 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는 유형이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는 때로는 사관(史官)의 엄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고통을 당하는 한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객관과 주관을 어느 문학 유형보다도 고르게 배치한 것이 우리 표해 문학의 특징이다.
표해 문학의 측면에서 볼 때, 장한철의 ≪표해록≫은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자세가 돋보인다. 장한철은 자신이 겪은 희한한 경험과 고난을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했다. 그때그때의 경험들을 기록한바, 그것은 ≪표해록≫ 이전에 기록해 두었던 ‘표해 일기’의 존재에서 알 수 있다. 비록 유구의 호산도에 표착해 저술했던 ‘표해 일기’는 청산도에 표도(漂到)했을 때 물에 젖어 떨어져 나가고 뭉개져서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표해록≫이 지어졌음을 감안하면, ‘표해 일기’의 존재는 ≪표해록≫의 저술에 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장한철의 ≪표해록≫이 지닌 표해 문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고통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는 점을 또한 꼽을 수 있다. ≪표해록≫에는 슬픔·원망·분노·두려움 등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표류하다가 노화도에 정박하지 못하고 떠나갈 때 배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1770년 12월 25일)이나, 표류하면서 목숨이 위태로움을 생각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1770년 12월 27일)에서는 슬퍼하는 감정이 역력하다. 닻을 내리려 했으나 바닥에 부착되지 못하고 선장이 여분도 준비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원망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1770년 12월 25일). 유구의 호산도에서 왜구에게 모욕을 당한 후에는 분노를 보이기도 한다(1771년 1월 1일).
장한철이 유가(儒家)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면이다. 유가, 특히 주자학에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한다. 감정에 동요가 생겨 수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신 그러한 감정을 중화(中和)하는 것을 강조한다. ≪표해록≫에는 그와 같은 유가의 경계 대신 인간 본연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는 유가, 유학이라는 철학적·교육적·학문적 외피를 입고 있는 인간도, 극한 상황에 이르면 그러한 외피 대신 인간의 본능이 저절로 드러나게 됨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자평
제주 선비 장한철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기록이다. 무인도에서 해적을 만나는가 하면 구조되었다가 다시 안남과의 민족 원한으로 버려지는 등, 로빈슨 크루소가 무색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사연을 그대로 적었다. 극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내 처음으로 국립제주박물관에 있는 장한철의 필사본을 직접 촬영하고, 이를 저본으로 삼아 그 정확성과 생생함을 더했다.
지은이
장한철(張漢喆)은 1744년 제주도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셋아버지, 장차방(張次方)] 밑에서 자랐다. 글공부를 좋아해 일찍이 향시에 몇 차례 합격했다고 한다. 1770년(영조 46년) 10월에는 향시에서 수석으로 합격을 하자, 마을 어른들과 관청에서 여비를 도와주어 서울 예조(禮曹)에서 실시되는 회시(會試)를 치르고자 뱃길에 올랐다.
그러나 느닷없이 풍랑을 만나 남쪽 큰 바다로 표류하면서 유구 지경까지 떠내려갔다가, 안남(월남) 상선을 얻어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멀리 한라산이 보이자 장한철 일행은 반가운 나머지 큰 소리로 떠들며 웅성대었다. 그러자 왕자들이 죽임을 당한 옛 원한을 지닌 안남 사람들에 의해서 이들은 돛도 없는 배에 실려 바다 한가운데 버려졌다. 다시 표류하다가 가까스로 전라도 완도군 청산도에 닿아 목숨을 건졌다. 모두 스물아홉 명의 일행 중에서 고작 여덟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몸을 회복하고서 이내 서울로 가서 회시를 치렀다. 그러나 낙방하고 곧장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마 ≪표해록≫은 표류 당시에 겪은 온갖 어려움을 회고하면서 이때 적어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지은이가 27∼28세 때인 셈이다. 1774년(영조 50년) 제주에서 베푼 승보 초시에 다시 합격하자, 특별히 회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는 은혜를 입는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1년 1월 30일 조에 보면, 홍문관 제학 이담에게 제주도의 과거 시험지[道科試卷]의 성적을 매기도록 했다. 1764년(영조 40년)의 전례에 따라, 강봉서·장한철·김경회 3인을 뽑아 급제를 내려 주었다.
‘보주 문과 방목’에 보면, 1775년(영조 51년) 32세의 나이로 문과 별시(別試) 병과(丙科) 27위로 급제했다. 장한철은 급제한 뒤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정조 원년(1776) 12월 성균관 학유(學諭)를 거쳐 학정(學正)·박사(博士)·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정조 4년(1780)에는 이조의 가낭청(假郎廳)을 지냈다. ≪승정원일기≫ 6월 25일 조에 보면, 이듬해 1781년에는 이조에서 외직에 진급시키도록 청함에 따라, 처음으로 강원도 상운역(祥雲驛) 찰방(察訪)으로 발령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승정원일기≫ 정조 7년(1783) 11월 10일 조에 보면, 임금이 지방 수령의 선정을 권장하는 뜻에서 상운찰방을 특별히 강원도 흡곡현령으로 발령 내도록 전교를 내렸다. 또 그해 9월에는 영조 임금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제사에서 장한철이 집박 전악(執拍典樂)의 임무를 맡아 노래를 불렀으므로, 1783년(계묘년) 예에 따라서 가자(加資)되었다. 정조 11년(1787) 5월 22일과 23일 조에, “강원도 감사 김재찬이 장계를 올려… 흡곡현령 장한철이 스스로 22석을 마련하여 진휼에 보탰다”고 했으므로, 꾸미지 않은 활[不粧弓] 한 장을 내려 주었다.
≪승정원일기≫ 정조 11년 11월 5일 조에 보면, 장한철을 제주도 대정현감으로 임명했다. 그렇지만 이듬해 10월 유배 죄인 김우진(金宇鎭)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고 해서 의금부로 끌려갔다. 정조 13년(1789) 3월 26일 조에 보면, 사복시 관원이 아뢰기를, 전 대정현감 장한철이 체임하면서 진상한 말 두 마리가 도착하자 전례에 따라 대궐 마구간에서 치도록 아뢰고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1일 조에 따르면, 정례적인 절차에 따라 이조(吏曹)에서 장한철의 죄를 줄여 주도록 요청하는 단자[張漢喆 歲抄單子]를 올리자, 임금이 관직에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蕩滌敍用]. 정조 16년(1792) 12월 18일 조에 따르면, 다시 장한철을 평시주부(平市主簿)로 임명했다.
장한철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장담(張紞)은 정조 19년(1795) 9월 1일 제주에서 열린 향시에서 시(詩) 부문에 삼하(三下)로 합격했다. 장담이 ≪표해록≫에 나오는 맏아들 장봉득(張鳳得)과 동일한 사람인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현재 장한철의 직계 후손들은 북녘 땅에 있는 강원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옮긴이
김지홍(1957∼ )은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학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석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를 졸업했고, 1988년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전임강사로부터 시작해서 현재 31년 동안 가르치고 있으며, 40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주요 저서로서 ≪국어 통사·의미론의 몇 측면: 논항구조 접근≫(도서출판 경진, 2010,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언어의 심층과 언어교육≫(도서출판 경진,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제주 방언의 통사 기술과 설명 : 기본구문의 기능범주 분석≫(경진출판, 2014,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언어 산출 과정에 대한 학제적 접근≫(경진출판, 2015,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고,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 번역서로 르펠트(1989)의 ≪말하기 : 그 의도에서 조음까지 1∼2≫(나남, 2008, 학술명저번역 총서 서양편 213∼214), 킨취(1998)의 ≪이해 : 인지 패러다임 1∼2≫(2인 공역, 나남, 2011, 학술명저번역 총서 서양편 292∼293)가 있으며, 한문 번역서로 ≪유희 언문지≫(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 ≪표해록≫(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최부 표해록≫(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국역 노상추 일기 1, 2, 3≫(5인 공역, 국사편찬위원회, 2017)이 있고, 거시언어학 총서로서 클락(1996)의 ≪언어 사용 밑바닥에 깔린 원리≫(도서출판 경진, 2009,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뽑힘), 머카씨(1998)의 ≪입말, 그리고 담화 중심의 언어교육≫(도서출판 경진,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에 뽑힘), 페어클럽(2001)의 ≪언어와 권력≫(도서출판 경진, 2011,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에 뽑힘), 페어클럽(2003)의 ≪담화 분석 방법 : 사회 조사연구를 위한 텍스트 분석≫(도서출판 경진, 2012), 페어클럽(1980)의 ≪담화와 사회 변화≫(경진출판, 2017), 위도슨(2004)의 ≪텍스트·상황 맥락·숨겨진 의도: 담화 분석에서 몇 가지 핵심 논제≫(경진출판, 2018) 등이 있다.
전자서신 jhongkim@gnu.ac.kr
목록
경인년(1770, 영조 46년) 10월
경인년(1770) 겨울
12월 25일, 바다에 해가 처음 떠오르자 남풍이 잠깐 읾
12월 26일, 흐림
12월 27일, 맑음
12월 28일, 맑음
12월 29일, 흐림
12월 30일, 비
신묘년(1771) 정월 초1일, 맑음
정월 초2일, 흐림
정월 초3일, 흐림
정월 초4일, 흐림
정월 초5일, 맑음
정월 초6일, 바람 불고 비가 내림
정월 초7일, 바람이 붊
정월 초8일, 맑음
정월 초9일, 맑음
정월 초10일, 맑음
정월 11일, 맑음
정월 12일, 추웠음
정월 13일, 맑음
정월 14일, 맑음
정월 15일, 저녁에 비가 내림
정월 16일, 맑음
정월 19일
2월 초3일
3월 초3일
5월 초8일
부록
≪표해록≫의 문학사적 위상 / 장시광
국립제주박물관에 있는 ≪표해록≫ 필사본의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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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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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때 배가 머물러 정박하지도 못했는데, 동풍이 크게 일었다. 그러자 배가 바람이 몰아가는 대로 끌려 서쪽 큰 바다로 표류해 갔다. 노화도를 돌아보니, 이미 잠깐 사이에 아득하게 멀어졌다. 사나운 바람과 모진 파도에 외로운 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높이 솟아오를 때면 푸른 하늘 위로 나가는 듯했고, 낮게 내려갈 때면 만 길 아래의 바다 바닥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노화도에서부터 바람을 만난 뒤, 스스로 자신의 운수가 지레 반드시 죽을 것으로 여겼다. 뱃멀미로 어지러워 아득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면, 오직 슬프게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짓만 일삼았다.
조금 지나 밤이 깊어지자, 사방이 칠흑 같아 동쪽 서쪽을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은 키질하듯 배를 흔들어 댔고 비도 퍼부어 댔다. 외로운 배가 파도 위에서 넘실거렸다. 우리가 탄 배에는 바닥으로부터 물이 많이 스며들어 왔다. 배 위에서는 항아리를 뒤집어 쏟아붓는 듯이 비가 내리쳤다. 배 안에 고인 물의 깊이가 이미 허리가 반이나 빠질 정도였다. 익사할 걱정이 급박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은 모두 누워 있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물을 퍼낼 뜻이 전혀 없었던 것은, 이렇든 저렇든 필시 끝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