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기도 양근에 살던 정생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고모부인 한양 권 상서의 집에서 자랐다. 어느 날 함께 공부하던 이들과 삼청동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한 여인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여인이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정생은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권 상서를 따라가 버리고 말았다. 여인은 출산 후 여종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결했다. 이후 정생은 과거에도 연거푸 떨어지고 정실과의 사이에 낳은 네 아들 중 셋이 연거푸 죽고 부인까지 죽었다. 권 상서 아들에게 기탁해 있는 동안 병이 들어 산사에 들어가 몸을 보했다. 그때 묘원 법사가 찾아왔다. 그는 정생의 아들이었다. 묘원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 아버지만을 모시며 효도하며 지냈다. 아버지의 병도 낫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도교적 수련 방식을 가르쳐서 득도하게 하기도 했고, 다양한 주제의 문답을 함께 나누기도 했으며,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탈신(脫身)하여 천상계의 여러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나중에 정생이 죽자, 묘원대사는 동생인 소정생과 함께 양근에서 좋은 묏자리를 선택하여 장례를 지내고,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유모의 묘까지 옮겨 와 합장하고 떠나갔다.
<정생전>은 전기소설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성을 보인다. 양반 남성과 중인 여성 간의 결합, 남성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배신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신분의 문제로 양반 자제인 남성이 다른 계급 여성을 배신하게 되는 모티프는 18세기 말 이후 소설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정생전>은 이른 시기에 이런 모티프를 보인다는 점에서 또 특별하다. 남성의 배신에 대해 여성이 저주와 복수를 하는 구성도 보기 드물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잡다한 지식이 나오고, 내용 설명 문답 등이 이어지는 의론형 대화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백과사전처럼 여러 지식이 나열되고 다양한 설명과 문답이 이어지는 것은 18∼19세기 장편 한문소설의 특징이다. <정생전>은 그런 성격을 보여 주는 초기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간 선학들의 논문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으나 번역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을 최초로 옮겼다. 자료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함께 실었다.
200자평
그간 선학들의 논문에서만 다루어졌던 작품을 최초로 옮겼다. 정생은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인연을 맺지만 임신한 여인을 저버리고 떠나간다. 여인이 아이를 낳고 목을 맨 뒤 정생에게는 불운이 잇따르는데…. ≪정생전≫은 남주인공의 배신과 귀신이 된 여주인공의 복수라는 스토리로 애정 전기 소설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작품 후반부에 도술(道術)소설의 면모를 보여 소설사의 변화를 살필 때 반드시 언급될 만한 작품이다.
지은이
김기(金琦, 1722∼1794)는 영·정조 시기 문인으로, 자는 치규(稺圭), 호는 기헌(寄軒) 혹은 서호(西湖)다. 1722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났다. 스승으로 모시던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1710∼1758) 사후 전북 무주에 은거했다. 어려서부터 재학(才學)에 뛰어났으나 18세에 과거장에 나갔다가 당시에 벌어지는 부정행위에 신물을 느껴 이후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충청도에 와서 우암 송시열의 현손(玄孫)인 송능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김익(金熤, 1723∼1790), 이정보(李鼎輔, 1693∼1766) 등과 교류했다. 무주에 들어간 후 역질이 돌아 가족 여럿이 몰사하여 매우 가난하게 되었을 때에 이를 안 주변 사람의 주선으로 그 지역 인재를 키워 내는 선생으로 활동하여 신돈항(愼敦恒) 등의 제자를 길러 냈다. 문집으로 ≪기헌유고≫가 남아 있다. 그의 문집에는 당대 경학, 병법, 상수학 등 다방면의 지식과 뛰어난 현실 인식이 담긴 글도 여럿이다.
옮긴이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퇴계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 전임연구원을 거쳐 지금은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조교수로 있다. 1702년 경북 선산에서 죽은 향랑을 둘러싸고 벌어진 열녀 이데올로기 관련 소설과 문헌들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조선 시대 문학, 역사, 문화와 관련한 여러 책을 썼다. ≪김소행의 글쓰기 방식과 삼한습유≫, ≪이상세계 형상과 도교 서사≫, ≪한국 전통의 돈의 문학사, 나눔의 문화사≫ 등의 연구서, ≪조선의 승부사들≫, ≪조선인의 유토피아≫, ≪나를 갈고 닦는 예절, 동자례≫, ≪백년 전의 충고, 만고기담≫, ≪나라가 버린 사람들≫ 등 대중서, ≪삼한습유≫(공역), ≪열녀 향랑을 말하다≫, ≪표암 강세황 산문전집≫(공역), ≪만하몽유록≫(공역), ≪박태보전≫ 등의 번역서를 냈다.
차례
정생전
원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 저는 수건으로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낭군이시여, 낭군이시여,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낭군의 덕 없음이 이렇게 심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황천에 돌아가면 옛날의 원혼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들이 제 몰골을 보고는 다들 눈을 부라리며 독을 머금어 낭군에게 쏘아 댈 것이니 낭군께서는 어떻게 면하시렵니까.”
−21쪽
천하에는 세 종류의 법문이 있는데 하나는 유가요 두 번째는 도가요 세 번째는 불가입니다. 하늘이 만민을 낼 때 주인이 없어 어지러우므로 임금을 세우고 스승을 세워 가르쳐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예악형정이 나오게 된 까닭이요, 이것이 이른바 유가라는 법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욕구가 있는데 그것이 칠정(七情)에 영향을 받아 선악으로 갈립니다. 각기 좋아하는 이를 좇아 정력을 쓰는 것에 날마다 골몰하다 보면 결국 삶을 잊고 진리를 잃어버려 요절하는 일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인(至人)이 이를 불쌍히 여겨 허무의 도를 가르쳐 어린아이 때와 같은 처음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도가의 법문입니다. 불가에 이르러서는 더욱 거대함이 있습니다. 대개 하늘보다 높은 것이 없고 땅보다 도타운 것이 없는데 하늘 위에 다시 하늘이 있고 땅 아래 다시 땅이 있으니, 이 천지가 곧 유색계(有色界)의 천지이고 저 천지가 곧 무색계(無色界)의 천지입니다. 무색계의 정신이 유색계의 기와 합하여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람이 생겨나고 동물이 생겨납니다. 사람과 동물이 생겨남은 유색계의 기가 신체가 되고 무색계의 정신이 심성이 됨을 통해서입니다.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신체는 훼손되어 유색계 속으로 돌아가고 심성은 나와서 무색계 위에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중에 선악과 업보에 따른 보응이 있어 착한 사람은 천당으로 올라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이 이치를 알지 못하여 망령되이 죄를 지어 그 도도한 물결에 빠지는 것입니다. 불자는 그것을 근심하여 공적(空寂)의 오묘한 이치를 보이고 그들로 하여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가 법문입니다. 오직 이 삼교가 서로 얽혀서 중생을 제도하니 서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70~72쪽
부자가 누울 자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고 몸을 펴고 누워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은 후 이불을 덮었다. 얼굴은 반쯤 드러내고 힘을 다해 정신을 모아 몸 밖으로 나왔다.
대사가 먼저 나와 들보 위에서 그 아비를 불렀다.
“아버지께서는 어서 나오십시오.”
노인이 대답하며 나오니, 벌써 상쾌해지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하늘로 날 듯했다. 대사가 앞에 서고 노인이 뒤에 서서 바람을 타고 가르며 표연히 서쪽을 향해 갔다.
−92쪽
기이하도다! 정생의 일이여. 평하는 사람들은 정생을 박정한 남자요 신의 없는 장부라 여긴다. 아이와 여자에게 신의를 잃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식이 살 수 없게 했으니, 머물 곳 없이 유리하다가 구렁에서 몸을 마치는 것이 이치상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년의 청복(淸福)을 어떻게 닦아 얻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천도(天道)는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의심해 볼 만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이는 생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시킨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대개 삼청동 신령(한 인물이 날 것)을 신승 무학이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침 때가 맞아 그런 것이니 누가 인연에 합당할 것인가. 여자는 지혜로운 성품이 있어 어머니의 혼령이 징조를 알려 주었고, 정생도 재주 있는 사람으로 문명(文明)을 타고났으니, 두 아름다움이 딱 맞아 이런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기이한 만남부터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116~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