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조명희는 1925∼1928년에 단편소설 12편을 창작했다. 처음에는 가난과 식민지 현실을 그렸고 <낙동강> 이후에는 주로 혁명적인 투쟁을 다루었다. 많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이런 차이가 보이는 것은, 1925년 8월에 카프가 창립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조명희는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서,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가지며 무산자 계급 운동에 가담하고, 식민지 통치에 억압받고 있는 빈궁의 민족적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카프의 방향 설정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땅속으로>(≪개벽≫, 1925. 2∼3)는 그동안 관념적 시를 주로 쓰던 조명희가 문학적인 변신을 선언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동경 유학 때에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동조하던 조명희는, 귀국 후 ≪시대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이 작품을 발표했으며, 이해 8월에 창립된 카프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시대일보≫의 사장은 홍명희였고, 학예부에는 김기진, 이기영, 최승일, 진학문, 염상섭, 나도향, 김동인, 이상화, 안석영, 김우진, 현진건, 최학송, 양백화, 방인근 등이 기자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명희가 카프의 창립 회원이 된 것도 이 ≪시대일보≫ 인맥과 연관해서 이해되기도 한다.
조명희의 초기 시나 희곡에서 그려진 세계는 온갖 비(非)가치만이 지배하는 곳으로 결코 진리에 이를 수도, 참된 가치를 실현할 수도 없는 속악한 곳이어서 오직 그에 대한 저주와 혐오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땅속으로>에서의 세계는 세계 내에서 가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인식 전환을 보여준다. 자기가 속한 현실 그리고 그 모두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일제의 성격 규정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드러낸다. 또한 자전적인 소설로서, 동경에서 유학하고 온 작가가 조선의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농촌 사람들>(≪현대평론≫, 1927. 1)은 <땅속으로>에 여전히 남아 있던 관념성이 제거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주의적인 작품이다. 이는 주인공의 설정이 지식인에서 당시의 기층민인 농민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전망 부재의 상태이기는 하지만, 현실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포석 문학 전체에서 약간 이질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결말은 당시 현실의 구조적 악에 대한 개인의 항거가 무기력하고 현실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낙동강>(≪조선지광≫, 1927. 7)을 비롯하여 이후에 쓰인 <춘선이>(≪조선지광≫, 1928. 1)와 <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혁명가·투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더 이상 가난과 빈궁의 원인을 식민지 현실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서 찾고, 가난을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계급적인 투쟁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국과 미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낭만적인 요소가 표현된다. 문제작으로 꼽히는 <낙동강>은 이론을 앞세워 카프계와 민족진영이 논전(論戰)을 벌이던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민요적인 그 지방 노래와 함께 재래의 과열된 이념이나 경제 투쟁 일변도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춘선이>는 가난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앞서 살핀 <농촌 사람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폭력이나 자살이 아니라 계급적인 투쟁으로 현실 문제에 대응한다. 또한 주인공이 떠나지 않고 조선에서 계급투쟁을 한다는 것도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포석의 마지막 작품인 <아들의 마음>은 일본에서 일하다가 다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중국에서 조선인 여자가 비행사로 성공했다는 것을 듣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며,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하기로 한다. 작가의 동경 대상은 미래 세계고, 그 미래 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다. 민족해방을 위해 일을 할 것을 강조하는 행위에는 “세계 무산계급 해방”을 위해서라는 구체적 목표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막연한 관념으로 제시될 뿐이다. 의지적 인물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써 <낙동강>에서 배경의 역할로나마 수용되었던 현실이 아예 배제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조명희는 소련으로 망명한다. 그 곳에는 일제의 검열이 없으므로 산문시 <짓밟힌 고려>에서처럼 마음껏 일제를 지탄하고 한반도의 처절한 수난상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도 그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온전한 자유로움이 보장되지 못했고 조명희는 곧 당과 작가동맹의 강압적인 지시에 의해 강렬하고 구호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이는 이후 조명희의 제자들인 고려인 문인들이 산출한 정치색이 짙은 송가문학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200자평
포석(抱石) 조명희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20∼1928년으로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동시를 포함한 시와 희곡, 수필과 평론 등을 모두 아울러, 한반도와 일본과 소련 등으로 옮겨 다니며 민족의 수난기를 관통한 작가 자신의 체험과 맞물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두 가지 모습, 즉 1925년 무렵을 경계로 한 초기의 관념적·신비적·종교적인 시와 희곡 그리고 후기의 현실주의적 소설을 보여 준다.
지은이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부친 조병행과 모친 연일 정 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대에 걸친 지배계급으로서의 가정환경은 조명희의 현실 인식의 밑바탕이 된다.
1907년경에 13세로 네 살 위인 여흥 민씨와 결혼했는데,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이 조혼은 이후 그가 가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무렵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여 셋째 형 집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유행하던 ‘영웅숭배열(英雄崇拜熱)’에 들떠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고보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붙들려 오게 되고 이때 포석은 ‘소일 격(消日格)으로 소설(小說)이란 것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 활동을 한다. 이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문학상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포석은 이 인연으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무정부주의 계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서 사상운동도 체험하게 된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학비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포석은 학비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이 그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할 때, 즉 귀국한 후이다. 1923년 초, 포석은 어려웠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학을 중도에 끝내고 귀국한다.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는 이즈음에야 그 ‘고통의 떡메’와 같은 현실은 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25년 무렵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그가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 연재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25년 8월 창립된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조명희의 창작 기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단편소설 12편과 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28년 여름 망명 직전에 포석은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데, 그 심경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에게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포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쯤 지나 한 학생이 쌀 한 가마를 들여주면서 ‘선생님이 떠나셨다’고 알려줘서야 가족들은 비로소 그의 가출을 알았으며, 망명 사실은 한참 뒤 포석에게서 단 한 번 온 편지로 알았다고 한다. 망명 후 포석은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 황명희와 재혼했다. 구한말 전후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의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의 한글 신문인 ≪선봉≫에 정기적인 문예 페이지를 마련했던 조명희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 문학을 지도했다. 강태수, 김기철, 김증송, 김광현, 조기천, 김두칠, 연성용, 태장춘 등이 포석의 제자다. 이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후로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에서 ≪선봉≫의 후신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글 문단을 형성해 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되기도 한 포석은 단편소설과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치는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직전, 익명의 편지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조명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56년 소련 정부 당국에 의해서 조명희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여 복권시킨 후에, 소련 과학원에서 한글판 ≪조명희 선집≫(1959)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린 데 이어 1992년에는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엮은이
이정선은 경원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최인훈 소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요즘은 조명희를 비롯해 구소련 지역 고려인의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재외 한민족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제 식민주의와 맞물린 우리의 근대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차례
낙동강(洛東江)
땅속으로
춘선이(春先伊)
농촌(農村) 사람들
아들의 마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대는 평시에 날더러, 너는 최하층에서 터져나오는 폭발탄이 되라, 하얏나이다.
올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겟나이다.
그대는 죽을 때에도 날더러, 너는 참으로 폭발탄이 되라, 하얏나이다.
올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겟나이다.’
이것은 뭇지 안어도 로사의 만장임을 알 수 잇섯다.
―<낙동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