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6개월간 8000리의 여정
최부는 성종 때 사람으로 1487년 제주 등 3읍의 추쇄 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다. 이듬해 정월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고향으로 급히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한다. 만리 타역 이국땅에서 도적을 만나기도 하고 왜구로 오해받기도 하며 갖은 고초 끝에 북경에 도착해 중국 황제를 만나고, 육로를 통해 6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성종이 이에 그가 거쳐 지나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적어 바치도록 했으니 바로 이 ≪최부 표해록≫이다. 제주에서 중국 강남까지, 중국 절강성 구동에서부터 북경까지, 그리고 북경에서 요동을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오기까지 그가 보았던 중국의 산천, 토산, 인물, 풍속을 모두 꼼꼼히 기록했다.
세계적인 여행기
이 책은 조선 시대에도 고전으로 취급되어, 여섯 차례나 간행된 바 있다. 조선 말엽의 ‘언해본’을 비롯해 현대어 번역까지 우리말 번역도 10종이 넘는다. 이것은 수십 종의 번역이 나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어 나올 ‘사서삼경’과도 비견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일찍이 제목을 달리하여 ≪통속 표해록≫으로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구두점을 찍고 주석을 붙인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미국에서도 출판되어 있다. 소설가 고 이병주 선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의 ≪하멜 표류기≫와 더불어 3대 여행기로 꼽았으며, 중국 학자인 거전자 교수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적인 3대 중국 기행기로 꼽았다. 이런 세계적 관심만으로도 독자들은 이 책의 진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선비의 마음가짐
이 책을 정독하면서 배울 수 있는 점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이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속성을 배울 수 있다. 둘째,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은 숙연히 우리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셋째, 최부가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방대한 학문 소양과 식견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반성되는 바 크다. 넷째, 일기체 형식의 견문 여행 기록에 대한 체제를 알 수 있다. 여기 기록된 개별 사건들과 그 서술 방식은, 또한 당시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무엇을 궁금하게 여겼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비록 일개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수차 제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그의 실용 정신에 대해서는 누구나 감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0자평
조선 선비 최부가 부임지인 제주도에서 뭍으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한 후 육로로 귀국하기까지, 약 6개월간 8000리 길의 여정을 기록했다. 당시 제주민들의 풍습, 중국 강남 지역에서 북경, 요동 지역에 이르는 중국 각지의 문화, 자연, 인심, 풍습 등을 직접 보고 겪은 것, 또는 물어서 들은 것을 토대로 자세히 서술했다. 그 가운데 드러난 최부의 사상과 행동을 통해 당시 조선 사대부의 사상과 신념도 확인할 수 있다.
지은이
최부(崔溥, 1454∼1504)는 1454년에 태어나서 갑자사화에 휘말려 1504년에 죽임을 당했다. 본관은 강진이고, 자는 연연이며, 호는 금남이다. 아버지는 진사 최택이다. 1487년에 제주 등 3읍의 추쇄 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다. 이듬해 정월에 거기에서 부친상 기별을 받고 고향으로 급히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했다가 6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 지나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적어 바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견문을 기술해 ≪표해록≫ 3권을 완성했다. 1497년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하고 책임을 망각한 공경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했기 때문에, 1498년 7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6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04년 10월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선생은 의연하여 형을 받을 때에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향년 51세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임금은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벼슬을 추증해 주었다.
옮긴이
김지홍은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그간 40여 권의 저역서 중에서 10종(∙)이 대한민국학술원 및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한국연구재단의 서양편 명저번역 2종(∙∙)을 출간했고, 한문 번역서로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된 것 이외에 몇 권이 있다.
저서
≪국어 통사・의미론의 몇 측면 : 논항구조 접근≫(경진출판, 2010)∙
≪언어의 심층과 언어교육≫(경진출판, 2010)∙
≪제주 방언의 통사 기술과 설명 : 기본구문의 기능범주 분석≫(경진출판, 2014)∙
≪언어 산출 과정에 대한 학제적 접근≫(경진출판, 2015)∙
≪제주 방언의 복합 구문 : 접속문과 내포문, 1∼2≫(경진출판, 2020)∙
≪제주 방언 통사의 몇 측면≫(경진출판, 2021)
언어와 현대 사상 번역서
무어(1953), ≪말철학에서 중요한 몇 가지 문제≫(경진출판, 2019)∙
심리학(언어의 산출 및 이해), 그리고 담화 분석 번역서
르펠트(1989), ≪말하기 그 의도에서 조음까지 1∼2≫(나남, 2008)∙∙
킨취(1998), ≪이해 : 인지 패러다임 1∼2≫(공역, 나남, 2009)∙∙
클락(2003), ≪언어 사용 밑바닥에 깔린 원리≫(경진출판, 2009)∙
머카씨(1998), ≪입말, 그리고 담화 중심의 언어교육≫(경진출판, 2010)∙
페어클럽(2001), ≪언어와 권력≫(경진출판, 2011)∙
페어클럽(2003), ≪담화 분석 방법 : 사회 조사연구를 위한 텍스트 분석≫(경진출판, 2012)
위도슨(2004), ≪텍스트, 상황 맥락, 숨겨진 의도≫(경진출판, 2018)∙
언어 교육 평가 및 현장 조사 연구 번역서
윌리스(1998), ≪언어 교육현장 조사 연구 방법≫(나라말, 2000)
루오마(2001), ≪말하기 평가≫(글로벌 콘텐츠, 2011)
벅(2001), ≪듣기 평가≫(글로벌콘텐츠, 2013)
앤더슨·브롸운·쉴콕·율(1984), ≪모국어 말하기 교육≫(공역, 글로벌콘텐츠, 2014)
브롸운·율(1984), ≪영어 말하기 교육≫(공역, 글로벌콘텐츠, 2014)
올더슨(2001)≪읽기 평가 1∼2≫(글로벌콘텐츠, 2015)
한문 번역서
유희(1824), ≪언문지≫(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최부(1489), ≪최부 표해록≫(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장한철(1771), ≪표해록≫(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노상추(1746∼1829) ≪국역 노상추 일기, 1∼3≫(공역, 국사편찬위원회, 2019)
차례
≪탐진 최씨 금남 선생 표해록≫ 유희춘 서문
≪금남집≫ 유희춘 서문
≪탐진 최씨 금남 선생 표해록≫
1487년 9월 17일, 경차관에 임명되고 11월 12일, 제주에 도착하다
1488년 정월 30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다
윤정월 1일, 개인 소유의 튼튼한 배를 빌려 오다
윤정월 2일, 관련 문서 이첩을 끝내고 떠날 준비를 갖추다
윤정월 3일, 배를 띄웠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다
윤정월 4일, 표류하여 큰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다
윤정월 5일, 사방으로 안개가 자욱이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윤정월 6일, 뱃사람들이 미신 때문에 짐 꾸러미 물건들을 용신에게 바치다
윤정월 7일, 큰 파도가 배 안으로 밀려들어 절반이 잠기다
윤정월 8일, 어디로 표류해 가는지 막연히 짐작해 보다
윤정월 9일, 멀리 희미하게 산 모습이 나타나다
윤정월 10일, 표류하면서 목숨을 이어갈 방책을 세우다
윤정월 11일, 급박히 암벽에 부딪칠 뻔하다가 큰 바다로 되돌아 나와 표류하다
윤정월 12일, 영파부 경계에서 해적을 만나다
윤정월 13일, 항해 도구도 없이 다시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다
윤정월 14일,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를 하염없이 떠다니다
윤정월 15일, 정처 없이 계속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다
윤정월 16일, 임해현 우두 바깥 바다에 이르러 정박하다
윤정월 17일, 결단을 내려 드디어 배를 버려두고 뭍으로 오르다
윤정월 18일, 천호 허청을 길에서 만나다
윤정월 19일, 도저소에 도착하다
윤정월 20일, 도저소에 머물다
윤정월 21일, 도저소에 머물면서 파총관의 요구에 따라 공초를 쓰다
윤정월 22일, 도저소에 머물면서 공초를 몇 줄 고쳐 쓰다
윤정월 23일, 드디어 도저소로부터 절강성 성도인 항주를 향해 길을 나서다
윤정월 24일, 건도소에 이르다
윤정월 25일, 월계 순검사에 도착하다
윤정월 26일, 영해현을 지나다
윤정월 27일, 서점역에 머물다
윤정월 28일, 연산역에 도착하다
윤정월 29일, 영파부를 지나다
2월 1일, 자계현을 지나다
2월 2일, 여요현을 지나다
2월 3일, 상우현을 지나다
2월 4일, 소흥부에 이르다
2월 5일, 서흥역에 이르다
2월 6일, 항주에 이르다
2월 7일, 무림역에 머무는데 학교 제조가 찾아와 여러 가지를 묻다
2월 8일, 무림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2월 9일, 무림역에 머물면서 비로소 양달에서 목욕을 하다
2월 10일, 무림역에 머물면서 북경까지의 갈 길을 듣다
2월 11일, 무림역에 머물면서 북경으로 올린 공문을 보다
2월 12일, 잘 돌봐준 무림역 관리 고벽에게 선물로 입은 옷을 벗어주다
2월 13일, 절강성 항주로부터 길을 나서다
2월 14일, 가흥부 숭덕현을 지나다
2월 15일, 가흥부 부성을 지나다
2월 16일, 소주부 오강현을 지나 소주부 부성에 이르다
2월 17일, 소주부 고소역 앞에 머물며 잠을 자다
2월 18일, 상주부 석산역에 이르다
2월 19일, 상주부 부성에 이르다
2월 20일, 진강부 여성역을 지나 진강부 부성에 이르다
2월 21일, 양자강에 이르다
2월 22일, 양주부 광릉역에 이르다
2월 23일, 양주부 부성을 지나다
2월 24일, 양주부 우성역에 이르다
2월 25일, 양주부 고우주를 지나다
2월 26일, 회안부 회음역에 이르다
2월 27일, 회안부 부성을 지나다
2월 28일, 회안부 삼차천포를 지나다
2월 29일, 회안부 고성역에 이르다
2월 30일, 회안부 숙천현을 지나다
3월 1일, 회안부 비주를 지나다
3월 2일, 서주부 방촌역을 지나다
3월 3일, 서주부 부성을 지나다
3월 4일, 서주부 탑응 부창을 지나다
3월 5일, 서주부 유성진을 지나다
3월 6일, 서주부 패현을 지나다
3월 7일, 곤주부 사하역을 지나다
3월 8일, 곤주부 노교역을 지나다
3월 9일, 곤주부 제령주에 이르다
3월 10일, 곤주부 개하역에 이르다
3월 11일, 곤주부 안산역에 이르다
3월 12일, 동창부 부성에 이르다
3월 13일, 동창부 청양역을 지나다
3월 14일, 동창부 청원역 앞에 이르다
3월 15일, 동창부 하진창 앞에 이르다
3월 16일, 동창부 무성현을 지나다
3월 17일, 동창부 고성현 앞에 머물다
3월 18일, 제남부 덕주를 지나다
3월 19일, 하간부 양점역을 지나다
3월 20일, 하간부 동광현을 지나다
3월 21일, 하간부 창주를 지나다
3월 22일, 하간부 흥제현을 지나다
3월 23일, 하간부 정해현을 지나다
3월 24일, 천진부 천진위를 지나다
3월 25일, 천진부 하서역에 이르다
3월 26일, 천진부 소가림리에 이르다
3월 27일, 천진부 장가만에 이르다
드디어 북경에 도착하다
3월 28일, 드디어 북경에 도착하여 회동관(옥하관)에 머물다
3월 29일, 병부로 가다
4월 1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홍려시 통역관 이상이 정황을 알려주다
4월 2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북경에 먼저 온 송문위 천호 부영을 만나다
4월 3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홍려시 통역관 이상이 다시 오다
4월 4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하왕이 집에 초대해 주다
4월 5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예부에 공문이 도착했음을 듣다
4월 6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유구국 사신을 따라온 사람들의 접대를 받다
4월 7일, 옥하관에 머물면서 병부에서 예부로 보낸 공문을 보다
4월 8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국자감 생원들이 찾아와 만나다
4월 9일, 옥하관에 머물면서 북경 사람 장원 등과 이야기를 나누다
4월 10일, 옥하관에 머물면서 귀국 허락 소식을 듣다
4월 11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중국에 귀화한 고려 사람이 찾아와 만나다
4월 12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우리말을 잘하는 이해라는 사람이 찾아와 만나다
4월 13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북경 사람 장기가 초와 장을 갖다주다
4월 14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손금이 먹을 것들을 갖다주다
4월 15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예부 관리가 우리 일행의 명단을 적어 가다
4월 16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교위 손웅이 귀국을 재촉해 주마고 약속하다
4월 17일, 옥하관에 머무는데, 귀국하는 유구국 사람들을 전별하다
4월 18일, 예부로 가다
4월 19일, 예부에서 내려주는 상을 받다
4월 20일, 대궐 안에서 은혜에 감사하는 절을 하다
4월 21일, 옥하관에 머물면서 귀국 허가 공문을 보다
4월 22일, 2주 전에서부터 아픈 조짐이 있었는데 결국 병이 나다
4월 23일, 옥하관에 머물면서 탕약을 얻어먹다
북경으로부터 귀국길에 오르다
4월 24일, 회동관(옥하관)으로부터 귀국길에 오르다
4월 25일, 하북성 백하를 지나다
4월 26일, 하북성 공락역에 이르다
4월 27일, 천진부 어양역에 이르러 우연히 사은사를 만나다
4월 28일, 하북성 양번역에 이르다
4월 29일, 하북성 옥전현을 지나며 길에서 중국 사신을 만나다
4월 30일, 하북성 풍윤현을 지나다
5월 1일, 하북성 신점 체운소에 이르다
5월 2일, 하북성 영평부 성의 남쪽에 이르다
5월 3일, 하북성 난하역에 머물다
5월 4일, 하북성 무령위에 도착하다
5월 5일, 하북성 유관역을 지나다
5월 6일, 하북성 천안역에 이르다
5월 7일, 하북성 산해관을 지나다
5월 8일, 요령성 전둔위를 지나다
5월 9일, 요령성 동관역에 이르다
5월 10일, 요령성 조장역 성에 이르다
5월 11일, 요령성 영원위를 지나다
5월 12일, 요령성 행산역에 이르다
5월 13일, 요령성 능하역에 이르다
5월 14일, 요령성 십삼산역에 이르다
5월 15일, 요령성 여양역에 이르다
5월 16일, 요령성 광녕역에서 황제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우리나라 사신을 뵙다
5월 17일, 요령성 광녕역에 머무는데, 관리들이 음식을 대접하며 위로해 주다
5월 18일, 지금까지 호송해 준 백호 장술조를 요령성 광녕역에서 작별하다
5월 19일, 요령성 광녕역에서 의복을 지급받고 우리 임금께 아뢰도록 요청받다
5월 20일, 요령성 반산역에 이르다
5월 21일, 요령성 고평역에 이르다
5월 22일, 요령성 재성역에 이르다
5월 23일, 요령성 안산역에 도착하다
5월 24일, 요양 재성역에 머무는데, 중국 귀화승 계면이 찾아오다
5월 25일, 요양 재성역에 머물면서 대접을 받다
5월 26일, 요양 재성역에 머무는데, 중국인 통역관이 찾아오다
5월 27일, 요양 재성역에 머무는데, 통역관이 찾아와서 싣고 갈 짐의 규모를 묻다
5월 28일, 요양 재성역에 머무는데 큰비가 내리다
5월 29일, 요동으로부터 귀국길에 오르다
6월 1일, 연산관에 이르다
6월 2일, 이승둔에 이르다
6월 3일, 팔도하를 건너다
마침내 우리나라로 돌아오다
6월 4일, 마침내 우리나라 압록강을 건너다
표류 및 귀국길에 대한 총정리
≪표해록≫ 유희춘 발문
≪표해록≫ 정중원 발문
≪금남집≫ 나두동 발문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비록 그 내용이 세 권에 지나지 않지만, 큰 바다의 변화를 그려내고 중국 절강성 구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는 길에서 보았던 산천·토산·인물·풍속들이 찬란하게 나열되어 있다. 선생의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 또한 가히 열에서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많이 얻어듣고 널리 보고자 하는 선비들로서 이 책을 구해 읽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탐진 최씨 금남 선생 표해록≫ 유희춘 서문>에서
이날 흐림. 서북풍이 크게 일어 또 끝이 없는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신과 배에 있는 사람들이 갖고 온 솜옷들은 모두 도적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오래 짠물에 젖었지만, 하늘이 또한 늘 흐려서 햇볕에 쪼여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곧 얼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배에 실었던 양식도 모두 도적들에게 빼앗겨 버렸으므로 곧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배는 닻과 상앗대를 도적들이 바다로 내던져 버렸고, 임시로 만들어 세운 돛도 바람에 헤어져서, 다만 바람에 따라 동쪽 서쪽으로 흘러가고 물결 따라 드나들었습니다. 사공들이 힘들여 배를 저을 도구가 없었으므로 이내 침몰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목이 막히고 메어서 능히 소리도 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윤정월 13일, 항해 도구도 없이 다시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다>에서
소주는 옛날에 오회(吳會)라고 불렸습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 있고, 세 개의 강과 오호를 끼고 있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 리나 뻗어 있습니다. 선비들이 못과 숲에 모여든 고기와 짐승처럼 많이 있으며, 바다와 뭍의 진귀한 보물들과, 깁·비단·금·은·구슬들과, 온갖 장인과 재주꾼들과 부유하고 큰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듭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하늘 아래 강남을 제일 번화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강남에서도 소주와 항주를 제일가는 고을로 여겼고, 그중에서도 이 성이 더욱 최고였습니다.
낙교(樂橋)가 성안에 있어서 오현(吳縣)과 장주현(長洲縣)의 현청 사이를 경계 짓습니다. 저자 가게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 퍼져 있으며, 강과 호수의 여러 물줄기가 그 안에서 두루 관통하여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누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창문(閶門)과 마두(馬頭 : 나루터) 사이에는 초 땅과 민 땅의 상선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습니다. 호수와 산의 아름답고 고운 경치가 갖가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신 등이 밤을 타서 고소역에 도착했고, 다음 날도 제대로 잘 관망하지 못했으며, 또다시 밤을 타서 성을 옆에 끼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백거이의 “일곱 개 제방, 여덟 개 문, 60군데 마을, 390개 다리”, 오늘에 와서 옛것을 허물고 새로 보탠 것, 그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자취들을 모두 다 자세히 적을 수 없습니다.
<2월 17일, 소주부 고소역 앞에 머물며 잠을 자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