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일본 모더니즘 시의 주류 ‘사계파’의 대표 시인 미요시 다쓰지의 데뷔 시집 《측량선》의 국내 첫 완역본이다. 신선한 리리시즘과 치밀한 언어 감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 시집은 서정성과 품격, 서구 상징시의 작풍을 겸비한 쇼와 시대의 대표 시집이기도 하다.
미요시는 그의 첫 시집인 이 책에서 특유의 사생적 방법으로 입체적인 언어의 음악성을 추구하여 현대 서정시의 전개에 전기를 마련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단가, 소네트, 산문시, 순수 서정시, 문어 시와 단가 등 여러 다양한 형식을 실험한다. 도쿄제국대학 불문과 출신이었던 미요시는 프랑스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의 시의 순수한 서정의 밑바닥에는 고독감, 비애, 슬픔의 시혼이 흐른다. 그러면서도 일본 서정과 고전적인 우미(優美)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인 ‘모노노아와레’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책을 번역한 김정신, 심종숙은 한국 시 및 일본 근현대 시, 비교문학의 연구자들인 동시에 시집을 여럿 써낸 시인이기도 하다. 두 시인 겸 번역가는 미요시 다쓰지의 시와 시 세계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충실하고 정확하게 원전을 옮기면서도 한국어로도 온전하게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미요시 다쓰지는 1920년 19세 때 만 1년간 북한의 회령에서 군 복무를 하고 다시 1940년에 한국의 경주 등지를 방문하여 한국과 관련한 시와 기행문을 여럿 남긴 것으로 국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 책《측량선》의 〈마을 3〉, 〈까마귀〉, 〈정원 1〉, 〈밤〉은 1920년 당시 군 생활을 회상하며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미요시의 시 세계와 조선과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곁텍스트로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200자평
고독감과 슬픔과 우울,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며 노래한 일본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 미요시 다쓰지의 데뷔 시집이다. 서정성과 품격, 서구 상징시의 작풍을 겸비한 쇼와 시대 대표 시집이기도 한 이 책은 현대적 시풍을 담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인 ‘모노노아와레’의 맥을 잇는다. 국내 첫 완역으로 선보인다.
지은이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1910∼1964)는 일본의 시인이자 번역가, 문예평론가다. 무로 사이세이와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근대 시와 동양 전통 시의 수법을 각각 받아들여 현대 시의 서정성을 지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여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1900년 오사카시에서 인쇄업을 하는 가정의 열 명 중에 장남으로 태어난 미요시는 유·소년기부터 다카야마 조규, 나쓰메 소세키, 도쿠토미 로카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1914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업인 인쇄업이 점차 몰락하여 중퇴하고 191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비가 국비인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에 진학했다. 1920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고 북한의 회령에 1년간 국경경비대로 근무하나 이듬해 홋카이도에 이르는 대탈주를 하여 퇴교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진학하여 문학으로 인생의 길을 전환했다. 시 창작을 시작한 이후 가지이 모토지로 등과 교류했고 후에 《아오조라》에 16호부터 참가하여 모모타 소지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1927년 7월 가지이 모토지로가 전지요양하던 이즈 유가시마에서 그를 병문안하던 중 문단의 주요 인물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히로쓰 류로,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만나 교류했다. 이즈 유가시마에서 올라와 10월, 시 잡지 《시와 시론》 창간에 관여했다. 이 무렵 사쿠타로의 여동생 아이를 만나 첫눈에 반하여 구혼했으나, 아이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1928년 결혼을 위해 간신히 얻은 일자리를 잃고 아이와의 약혼이 깨어진다. 절망한 미요시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완역하고 파브르의 《곤충기》 번역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약 10년간 번역한 분량이 원고지 2만 매에 이른다.
1930년 첫 시집 《측량선》을 간행했다. 1932년 각혈을 했고 맹우 가지이 모토지로가 사망했다. 5월에 병원 입원을 기하여 프랑시스 잠이나 한시의 기법을 시에 도입했다. 6월에 퇴원을 했고 8월에 두 번째 시집 《남창집》를 간행했다. 1934년 1월 기시다 구니오의 중매로 사토 하루오의 질녀 사토 지에코와 결혼하여 그해 12월에 장남이 태어났고 1937년 장녀가 탄생했다. 1940년 가을에 2개월간 서울, 경주, 부여 등지를 방문하고 시와 기행 수필을 남겼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의 승리나 일본 국가와 국민을 찬양하는 전쟁 시를 많이 제작하여 《승전보에 이르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일본문학보국회로부터 위촉을 받아 〈결전의 날이 왔구나〉 작사도 했다. 1942년 아이가 사별하자, 1943년 미요시도 지에코와 이혼하고 아이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945년 2월 아이가 도쿄로 도망쳐 돌아가 다시 이혼했다. 1949년 후쿠이 미쿠니초에서 도쿄 세타가야구로 거처를 옮겼다. 1953년 예술원상(《낙타의 혹에 걸터앉아》), 1963년 요미우리문학상(《정본 미요시 다쓰지 시 전집》)을 수상했다.
1964년 심근경색에 울혈성 폐렴 합병증으로 병사했다. 1979년 사후 13주기를 기념하여 유족들에 의해 미요시 다쓰지 기념관이 건립됐다. 2019년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쓴 마지막 원고 〈봄의 낙엽〉 자필 원고가 발견돼, 이듬해 2020년에 탄생 120주년에 맞추어 후쿠이현 후루사토문학관에 전시됐다.
옮긴이
김정신(金貞信)은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정주 시의 변모 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9년 2월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시에 나타난 공간의 표상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8월부터 경북대학교에서 문학의 이해와 한국문학의 이해 등을, 2008년부터는 대학 글쓰기 등을 가르쳐 왔으며, 현재는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연구원, 제주대학교 재일 제주인 센터 특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서정주 시정신》(국학자료원, 2002), 《한국 근·현대시 바로 보기》(새미, 2009), 《고통의 시 쓰기, 사랑의 시 읽기》(아모르문디, 2019)가 있고, 논문으로는 〈다문화 시대의 한국 현대시 고찰−하종오 시에 나타난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을 중심으로〉(2019), 〈한국 현대시 속 정신병동과 감옥 공간에 대한 고찰−이승하의 《감시와 처벌의 나날》을 중심으로〉(2021), 〈영화 기법을 통해 본 백석 시 연구−〈여우난곬族〉과 〈木具〉, 〈국수〉에 나타난 인물과 음식을 중심으로〉(2021), 〈최승자 시에 나타난 예언성과 우주적 상상력 번역 텍스트 《영혼의 집》이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에 미친 영향 관계를 중심으로〉(2022)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묘비묘비묘비》(시세계, 1992), 《이 그물을 어찌하랴》(문학의전당, 2008),《당신이 나의 배후가 되었다》(문학의전당, 2020)가 있다. 공역서로 《지에코초》(지식을만드는지식, 2020), 《일본 명단편선 7》(지식을만드는지식, 2021)이 있다.
심종숙(沈終淑)은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대구가톨릭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서 일본어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동 대학원 비교문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미야자와 겐지와 한용운의 시 비교연구−주체의 분열과 소멸, 복권을 중심으로〉이다. 그 외 주요 논문으로 《만해학 연구》에 〈미야자와 겐지와 한용운 문학의 個와 全體−타고르 사상의 수용과 근대 주체의 종말〉(2007)을 게재했다. 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부와 미네르바교양대학에서 가르쳤고 현재는 샘문평생교육원 샘문대학 겸임교수, 샘터문인협회 시창작분과위원장, 한국외대 일본연구소 초빙연구원,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이며 민족작가연합 공동 대표와 평론분과장, 노동자문예학교 강사로 시 창작을 가르치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심사위원, 황금찬시문학상 심사위원, 한용운문학상 심사위원, 공무원문인협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고, 청소년신문사 시 부문 문예대상 수상, 샘터문학 문학공로상, 한국청소년신문사 시문예창작대상, 2022 제4회 국가최우수 지역발전대상 대한민국현대문학발전대상을 수상했다. 2012년 《동방문학》 시 부문, 2013년 《동방문학》 평론 부문, 2022년 《문예세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저서로 평론집 《니르바나와 케노시스에 이르는 길》(신세림, 2016), 페이스북 단상집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기대어》(신세림, 2022), 《미야자와 겐지와 한용운의 시 비교연구》(학술정보출판주식회사, 2022), 《엘리아 전》(우리글, 2023)과 시집 《역(驛)》(메아리, 2019), 《그루터기에 햇순이 돋을 때》(신세림, 2021), 《까치와 플라타너스》(신세림, 2022)가 있다. 역서로는 《바람의 교향악》(열린, 1998), 《은하철도의 밤》(북치는 마을, 2004), 《바람의 마타사부로/은하철도의 밤》(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일본 명단편선》(공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21) 등이 있다.
차례
봄의 곶
유모차
눈
돌 위
소년
메아리
호수
마을 1
봄
마을 2
낙엽
고개
마을 3
추야농필
낙엽 그치고
못으로 향하는 아침 식사
겨울날
까마귀
정원 1
밤
정원 2
정원 3
조어
풀 위에
나는
제비
사슴
낮
MEMOIRE
Enfance finie
아베 마리아
꿩
국화
11월의 시야에서
나와 눈과
향수
사자
빵
해설
깊이 읽기−미요시 다쓰지의 시 세계와 조선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지만….
이 말은, 그러나 어느샌가 그것을 듣는 나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고, 날이 갈수록 내 기억과 섞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윽고 벌써 지금은, 일찍이 옛날에, 내가 사람을 죽인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드러냈다고 해도, 나는 어쩌면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지. 오늘도, 나의 무질서한 독서와, 창에 화려하게 핀 달리아 위에서, 새는 그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 그대도 내 방에 와서, 이 새의 말을 듣는 것이 좋아. 만일 그대가, 사람을 죽인 기억이 없고, 게다가 그 먼 회흔(悔痕)을 원한다면.
-〈조어(鳥語)〉 중에서
2.
태양은 아직 어두운 창고에 가려져 있었고, 서리가 내린 정원은 보랏빛으로 널따랗게 차가운 그늘 밑에 있었다. 그날 아침 내가 주운 것은 얼어 죽은 한 마리의 까마귀였다. 단단한 날개를 물레 모양으로 접어서, 회색빛 눈꺼풀을 감고 있었다. 그것을 던져 보니, 마른 잔디밭에 떨어져 맥 빠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용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맑아지는 하늘 어딘가에서, 또 까마귀가 우는 것이 들렸다.
-〈정원 1〉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