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몬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구직과 실직을 반복하는 젊은이다. 끊임없이 현재와 일상을 탈주하려는 지몬은 삶을 개선해 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책방 점원으로, 변호사 사무실의 업무 보조자로, 중산층 가정의 상주 하인으로, 실업자를 위해 운영되는 필사실의 필사자로, 그의 처지는 점점 더 궁색해진다. 형제자매들의 사정도 크게 나은 것은 아니다. 소설의 결말이 암시하는 바로 보건대 그의 삶은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몬은 장황하면서도 유려한 만연체 글과 말로써 당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임금 노동에 매달리느라 꿈꿀 여가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은 부조리하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삶의 태도만이 마땅해 보이지만 정작 지몬의 삶은 서서히 몰락해 가는 중이다. 책의 배경이 되는 100년 전 청년의 삶에 오늘날 청년의 삶이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로베르트 발저는 초기의 성공과 명망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그가 청년기에 쓴 첫 장편소설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냉소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카프카와 헤세가 그의 열렬한 독자였고, 페터 한트케, 마르틴 발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질은 카프카의 <관찰>이 로베르트 발저의 모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자평
카프카와 헤세가 그의 열렬한 독자였으며, 페터 한트케, 마르틴 발저 등 독일 현대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사람, 로베르트 발저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자신의 형제들을 모델로 해 쓴 자전적인 소설에서 발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지은이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는 1878년 4월 15일 스위스의 소도시 빌(Biel)에서 태어난다. 유년 시절 부친의 사업이 기울어 감에 따라 학교 성적이 매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학교를 그만둔다. 열네 살의 나이로 은행 도제로 보내져 3년을 일한다. 16세 때인 1894년 빌의 시립극장에서 있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도적 떼(Räuber)> 공연을 보고 연극에 대한 관심이 싹터 배우가 되려는 꿈을 키운다. 도제 생활을 마친 후 바젤에 거주하며 남몰래 연극 수업도 들으며 배우의 꿈을 키운다. 18세 때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연극 배우가 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19세인 1897년에 쓴 <미래!(Zukunft!)>라는 시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창작이고, 1899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들에 글이 실리며 왕성한 창작을 하게 된다. <재투성이 하녀(Aschenbrödel)>, <백설공주(Schneewittchen)> 등 발저의 대표적 촌극들이 이해에 쓰여진다. 1904년 라이프치히 인젤 출판사에서 발저의 첫 단행본 ≪프리츠 코허의 작문들(Fritz Kochers Aufsätze)≫이 나온다. 14세 때부터 은행 도제로 3년을 일한 후부터는 안정적인 직장 없이 출판사 광고 부서 필사원, 보험 회사 경리, 발명가의 조수, 은행 세일즈맨 등으로 ‘직장’을 옮기던 발저는 1905년 화가인 형 카를이 있던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베를린에서 하인학교에 다니고 이해 연말까지 오버슐레지엔에 있는 담브라우 성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1906년 6주 만에 첫 장편소설 ≪타너가의 남매들≫을 탈고해 1907년 베를린의 브루노 카시러 출판사에서 내게 된다. 같은 출판사에서 3년 연속 장편소설을 출간한다. 1917년 발저의 대표 산문 ≪산책(Der Spaziergang)≫이 출간된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발저는 ‘마이크로그램(Mikrogramme)’으로 불리는 526개의 짧은 산문들을 적어 내려간다. 1929년 1월 24일 발저는 베른 근처의 발다우에 있는 정신 치료 감호 시설에 들어가게 되며 정신분열 판정을 받는다. 1933년 6월 발저의 의지에 반하여 헤리사우 치료 감호 시설로 옮겨지게 되며 발저는 작가 활동을 전면 단념한다. 후견 절차가 시작된다. 1934년 법원에 의해 금치산자 판정이 내려지고 1956년 12월 25일 눈 속을 산책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옮긴이
김윤미는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에서 학사, 동 대학원에서 석사,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로베르트 발저의 촌극 <재투성이 하녀>−또 다른 “동그란 0”>, <음악 이해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로 본 에테아 호프만의 <돈 후안>(1813)>, <20세기 초 독일 소설의 바그너 수용>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법 분필≫(공역, 지만지, 2014)이 있다.
차례
타너가의 남매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저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까지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하다못해 저는 제가 어지간히 제 삶을 정돈했다고 말해 줄 수 있을 만한 양복 한 벌 몸뚱아리에 걸치지 못했어요. 인생에서 한 특정한 선택을 암시해 보이는 아무것도 당신은 저에게서 보실 수 없죠. 저는 여태 인생의 문 앞에 서 있으면서, 노크하고 또 노크합니다. 하지만 맹렬하지 않게요. 그러고는 제게 빗장을 열어 주고픈 누군가가 오는지 긴장한 채 귀 기울이죠. 그런 빗장은 좀 무겁죠, 그리고 바깥에 서서 두드리는 게 거지라는 느낌이 들면 누가 잘 오려 하지 않고요. 저는 오로지 귀 기울이는 자이자 기다리는 자일 뿐입니다. 그런 자로서 하지만 완성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기다리는 동안 꿈꾸는 걸 익혔거든요.
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