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58년에 출간된 엠리히(Wilhelm Emrich)의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은 카프카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수작(秀作)이다.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카프카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책이다.
이 책은 카프카 전문가인 브로트(Max Brod)의 카프카 해석(종교적 해석)에 도전하고 있다. 엠리히는 카프카 연구자들에게 종교적 해석(실존주의적 해석) 이외에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사회학적 혹은 사회비판적ᐨ정치적 해석을 소개한다. 물론 그는 이 세 개의 연구 방향이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 섞여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또 엠리히는 이 책에서 기존의 카프카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다. 기존의 카프카 연구는 되풀이해서 카프카 문학의 수수께끼를 그저 경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현상들로 해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 문학은 특정한 종교적 관념이나 신앙 내용 혹은 특정한 사회적 현상과 자서전적 현상의 반영, 표현, 상징, 알레고리가 아니며, 오히려 ‘보편성(das Universelle)’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엠리히는 이 책에서 수미일관 주장한다.
엠리히는 카프카 문학을 인간존재의 모형, 세계 전체의 상징으로 파악한다. 즉 그는 카프카 문학이 현대의 합리화 과정으로 인해 오히려 비합리적이 된 20세기 사회질서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엠리히는 베냐민(W. Benjamin)과 아도르노(Th. W. Adorno)의 생각을 차용했다. 그러나 아도르노와는 달리 그는 카프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카프카의 궁극적인 의도를 ‘자유로운 자아’로 이끄는 인식을 통한 자유의 획득으로 파악하고, 카프카를 유토피아적 도덕주의자로 부른다.
게다가 이 책은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다. 엠리히는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연결하고 있는 연관을 분석하고 비교할 때 비로소 부분적인 의미나 어떤 한 작품이 지닌 함축이 해명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석의 방향을 찾지 못했던 한국의 카프카 연구에서 엠리히의 이 책은 ‘나침반’이었다.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엠리히의 카프카 해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초판이 간행된 후 50여 년 동안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을 만날 수 없었다. 이 책은 1971년에 일본어로 번역됐다.
200자평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카프카. 그의 난해한 작품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명쾌한 나침반을 제시한다. 이 책은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연구 분석함으로써 카프카의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해 준다. 카프카 문학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연구이자 카프카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수작.
지은이
빌헬름 엠리히(Wilhelm Emrich, 1909~1998)는 1909년에 알자스 지방의 니더 요이츠에서 출생했다. 1949년에서 1953년까지 괴팅겐 대학 강사, 1953년에서 1959년까지 쾰른 대학교 독문과 교수 그리고 1959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베를린 자유대학교 독문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제자였다. 1933년에 사도 바울에 관한 논문으로 마르틴 조머펠트(Martin Sommerfeld)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후에는 집중적으로 괴테와 프란츠 카프카를 연구했다. 그는 카를 슈테른하임, 아르노 홀츠 그리고 리카르다 후흐의 전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나치 시대인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 도서관 관장, 독일 문헌·홍보 자문처 처장으로 독일제국 선전 부문에서 일했다. 엠리히는 나치 당원이었고, 나치당 세포조직의 우두머리였다. 또 반유대주의 서적들의 저자이기도 했다. 나치 정권에서의 엠리히의 이러한 행적은 엠리히가 사망한 직후 대학 동창인 친구 마우츠(Kurt A. Mautz)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1958년에 출판된 카프카 연구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이라는 명저가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엠리히는 문헌학적 연구를 수단으로 삼아 문학을 그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연결한 학자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문예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옮긴이
편영수는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의 제목은 <카프카 문학에 나타난 진실과 허위의 모티프 연구>다. 이후 LG 연암문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되어, 카프카 전문가인 카를하인츠 핑거후트(Karlheinz Fingerhut) 교수의 초청으로 독일 루트비히스부르크 대학교(Ludwigsburg PH)에서 수학했다.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키워드 가이드(‘카프카’, ‘독일문학’)로, 또 한국카프카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해설서와 독일 마르바흐(Marbach am Neckar)에 있는 독일문학 도서관(Deutsches Literaturarchiv)이 소장하고 있는 카프카 문학과 관련된 자료들에 해설을 달아 카프카 문학을 일목요연하게 개관할 수 있는 비판적 자료집을 만들기 원한다. 저서로는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 문학의 이해≫, ≪독일 현대작가와 문학 이론≫(공저), ≪동서양 문학고전 산책≫(공저), 역서로는 ≪카프카의 엽서≫, ≪카프카와의 대화≫, ≪실종자≫, ≪카프카 문학사전≫(공역)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보편적 주제
고전미와 현대미
<사냥꾼 그라쿠스>의 보편성
이승과 저승 사이
카프카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
고전주의의 보편성
19세기 보편성의 붕괴
카프카의 자연주의적 출발점, 그것의 높이기와 낯설게 하기
한계의 제거와 법 사이에서의 카프카의 투쟁
완전한 인식과 책임성
보편적 진실에 이르는 길
보편적 도덕: 종교적인 것과의 관계
사유와 존재: 카프카와 하이데거
존재와 진실의 치명성
문학과 우주의 파국
파국의 극복
제2장 알레고리와 상징을 넘어서
알레고리와 비유 설화
상징
파괴적 의식
구체적인 것의 주장
사물들의 분노
제3장 낯선 사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인간의 자아
수수께끼의 형상 오드라데크
카프카의 비유 세계의 구원의 기능
목적에 구속받지 않는 실존: 유년과 노년
사고의 배후에 숨은 전체성
노동 세계와 목적에 구속받지 않는 사물들: 블룸펠트의 두 개의 공―작품 내재적 해석의 문제에 대해
사물들의 해방의 기능
사물들의 치유의 기능
사물들의 치명적 기능
해방하는 자아로서의 동물
단편 <변신>의 갑충
단편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의 원숭이
<시골 의사>
<튀기>
카프카의 단편(斷篇)과 단편(短篇)의 동물들
회당의 담비
동물들의 인식 가능성의 문제: <시골 학교 교사>
순수한 동물 이야기들과 보편성
<어느 개의 연구>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족속> 예술의 변호와 비판
<굴>과 인간의 자아
제4장 객관적 세계의 구축과 구속력이 있는 법
인류의 건축과 천상의 탑의 건축
인류의 최고 지도자들
유목민들과 자유의 문제
제정(帝政)과 역사에서의 절대적 명령의 왜곡
중재의 시도: 귀족
<유형지에서>
제5장 현대의 산업 세계: 장편소설 ≪실종자≫(≪아메리카≫)
현대의 휴식 없는 노동
≪소송≫, ≪성≫과 유사한 현대의 중개 기관
정의와 규율
자유로운 유희로서의 기술
중개 기관과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의 문지기
≪실종자≫와 ≪소송≫에서의 사디즘과 사회적 지배 관계의 왜곡
사랑의 왜곡
세계와 영혼의 상태로서의 자본주의
오클라호마 야외극장
제6장 법정으로서의 세계: 장편소설 ≪소송≫
죄 개념
법정으로서의 삶
카의 마음의 투영으로서의 법정
현세 법정과 최고 법정
자유와 세계의 법(<법 앞에서>)
체포의 의미
카와 법정 사이의 이중 의미의 상호작용
여자들의 역할
변호사 훌트에게서 나타나는 종교적 은총의 왜곡
티토렐리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
구원으로서의 자기 재판
실패한 죽음
제7장 인간의 우주: 장편소설 ≪성≫
자유와 구속 사이에서 벌이는 카의 투쟁
혁명적 행위로서의 토지측량
카와 마을 사이의 이중 의미의 관계
노동자의 삶과 자유로운 실존
관리 클람의 프로테우스적 본성
죽음의 순간에 도달한 관청: 베스트베스트 백작과 성의 건축양식
초개인적인 사랑의 권력으로서의 클람
성애의 개인화
초개인적인 사랑의 감정
초개인적인 사랑과 개인적인 사랑의 갈등
클람의 코냑
관리와 개인으로서의 클람
클람과 현세의 사랑의 한계
죽음과 삶을 의미하는 상징들
하녀에서 사회의 귀부인으로: 프리다와 페피
사회 적응력을 갖춘 부인
절망한 여자
집단적인 결혼으로의 도피
개인적인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프리다의 투쟁
기혼녀의 우상과 체념
여성의 사랑의 체념에 대한 카의 비판: 클람이 중지한 호출
관능적 사랑과 개인적 사랑의 충돌
반성하지 않고 신뢰하는 사랑의 비극
부조리한 실존 형식으로서의 평범한 시민의 가정생활
단정한 여자의 테러
카의 조수들과 우주와 사회에서 작용하는 근원적 자연력의 세계
자연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요구와의 불화
아말리아의 절대적 요구
관리 뷔르겔과 카의 만남
비극적 모순의 극복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카
소설의 내적 완성
죽음 속의 삶의 권리
부록
프란츠 카프카의 약력
텍스트 비평에 관해
카프카 문헌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삶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자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운명에 절망이 조금이나마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만−침입을 막는 것은 극히 불완전하다−다른 손으로는 자신이 폐허 속에서 봤던 것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고 더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죽었으며, 원래부터 살아남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절망과의 전투를 위해서 그가 필요한 것은 두 손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일기≫).
●“작가란 인류의 속죄양이야. 작가 덕분에 인류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원죄를 즐기지.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말이야.”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삶 전체를, 본래 속박된 모든 영(靈)들을 해방하는 작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이 떠맡는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