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파팽 자매 사건
1933년 프랑스 소도시에서 한 부르주아 가정의 모녀가 하녀들에게 살해된다. ‘파팽 자매’라 불리는 하녀들은 살인이 있기 전까지 그 집에서 7년간 성실히 일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프로이트, 라캉, 사르트르 등 프랑스 지성계가 이 잔혹한 사건의 배경에 관심을 보였다. 주인 모녀를 살해하고 눈알을 파 버린 점, 자매가 동성애 관계였던 점, 살해 동기로 “마담의 피부를 갖고 싶었다”고 증언한 점 등이 사건의 배경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유도했다. 사르트르는 계급적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봤고, 라캉은 이 사건으로부터 ‘거울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쏟아진 문학작품과 비평이 거의 이 사건의 원인 규명에 치중해 있을 때 장 주네는 이 사건의 연극성에 주목했다. 실제로 하녀들은 마담의 눈을 피해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하곤 했다고 증언했고, <하녀들>은 바로 그녀들의 연극 자체를 무대에 올린 연극이었다. 마담에 대한 동경과 원한이 담긴 하녀들의 연극 놀이, 마담의 등장과 함께 전개되는 현실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그녀들의 진정한 비극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란을 꿈꾸는 하녀들의 놀이
클레르와 솔랑주는 마담이 없는 동안 각자 마담과 하녀 역할을 맡아 연극 놀이를 벌인다. 마담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연극이 거듭될수록 마담과 하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한 계급 관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하녀들은 마담이 되어 마담의 권위와 권력에 취하고 그에 비추어 복종해야만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마담의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마담의 말투를 흉내 내 보지만 하녀들은 이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가질 수는 없었다. 노력하면 결과가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조리한 권력 관계는 뒤집을 수 없다. 부조리한 채로 지속된다. 하녀들은 이 부조리를 끝내기 위해 마담 독살 계획을 세운다. 몰래 마담이 즐겨 마시는 차에 독을 타고, 마담이 그걸 의심 없이 마셔 주길 기다린다.
주네는 말했다.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게 아니고,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게 아니다. 연극으로 혁명을 이룰 수 없다. 태양은 너무 밝고 우리 눈꺼풀은 너무 얇으니 연극은 그런 태양을 잠시 피하게 해 주는 그늘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녀들의 연극은, 그리고 그녀들의 연극을 다룬 주네의 연극은 어떨까? 주네는 이 “연극을 통해 ‘하녀들의 노동조합’을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결과적으로 ‘하녀들의 노동조합’을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 모든 사적 요소를 배제한 채 오직 미학적 완결을 추구한 결과, 이 극은 고도의 비극성으로 어떤 급진적인 주장이나 호소보다도 강하게 관객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으로 완성된 무대 미학
주네는 또 이렇게 말했다. “쇠로 만든 칼보다는 나무로 만든 칼이, 나무보다는 종이로 만든 칼이 더 위험하고 강하다.” 실체와 거리가 먼 상징을 사용할수록 시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의미다. 그는 연극도 시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사슬로 무대를 가득 채움으로써 ‘속박’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가능한 한 상징적이고 양식화된 소품과 의상, 동작 등을 통해 무대가 시적인 힘을 발휘하길 바랐다. 또 주네에겐 어떤 세계도 절대로 선하고 절대로 악할 수 없었다. 그 이중의 세계관이 작품과 연출 스타일에도 자연스레 반영되었다. 상징적이고 양식적인 소품과 함께, 예를 들어 강한 향기를 풍기는 꽃 같은, 매우 사실적인 소품이 제시되는 것도 주네의 이중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부록으로 주네가 직접 메모한 <하녀들> 연출법을 실었다.
주네의 무대 미학을 온전히 살린 번역과 해설
배우의 대사는 아무리 일상의 어법을 따른다 해도 자체로 완벽한 음악성을 지녀야 한다. 어법에 맞으면서도 관객들이 최고의 음악성을 느낄 수 있도록 음표를 찍은 대사, 원작이 그러하다면 번역도 그러해야 한다. 장 주네로 학위를 받고 장 주네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려 온 순천향대학교 오세곤 교수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무대화에 어색함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몰입을 높이는 음악적인 대사들을 번역했다. 여기에 직접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한 경험을 녹여 대사 하나, 소품 하나에 담긴 주네의 의도와 그 적용을 주석에서 친절히 설명했다.
200자평
장 주네의 첫 희곡 <하녀들>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파팽 자매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시놉시스 기획 단계부터 참고했다고 밝힌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사르트르와 라캉 등 프랑스 지성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하녀들이 7년간 일한 주인집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심각하게 훼손한 배경을 두고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때 발표된 문학작품과 비평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장 주네의 <하녀들>이다. 주네는 특히 이 사건의 ‘연극성’에 주목했다. 실제 하녀들이 벌이곤 했다는 역할 바꾸기 놀이 자체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주네는 하녀들이 꿈꾸는 환상과 현실의 심각한 괴리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계급 문제의 비극성을 선명히 드러냈다. 이 연극은 고도의 상징으로 시적인 힘을 얻으며 어떤 비평적 관점과 해석보다도 강렬하게 대중의 인상에 남았다.
지은이
장 주네는 1910년 12월 19일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22세의 가정부였던 어머니는 생후 7개월 된 주네를 빈민구제국에 넘긴다. 이후 주네는 모르방의 한 농가에서 좋은 위탁 부모 아래 성장한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직업학교를 탈출한 뒤 자잘한 절도와 부랑 등 일탈을 일삼다 16세 때는 결국 감화원에 들어간다. 감화원에서 출소한 뒤로도 절도 등 자잘한 범죄로 수감된다. 그러다 1942년 감방 동료의 도움으로 첫 시집 ≪사형수≫를 출판하는데 이를 계기로 장 콕토를 후원자로 만난다. 콕토의 후원에 힘입어 ≪꽃의 노트르담≫, ≪장미의 기적≫ 등 소설 출판이 성사되었고, 1947년에는 루이 주베 연출로 ≪하녀들≫의 초연, 그리고 1949년에는 ≪엄중한 감시≫와 ≪도둑 일기≫의 출판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계속된 범죄 등으로 종신형과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때마다 콕토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구명 노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마지막 유배형 위기 때 콕토, 사르트르, 피카소 등의 탄원으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냄으로써 기나긴 범죄 이력을 끝맺는다. 이후 꽤 긴 공백기 끝에 1956년 ≪발코니≫, 1958년 ≪흑인들≫, 1961년 ≪병풍들≫을 차례로 발표한다. 이후 주네는 작품 발표보다는 현실 참여에 적극성을 보인다. 미국의 쿠바 개입이나 베트남 전쟁, 남아공 인종 차별 정책을 비난하고, 68 학생 시위 때는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한다. 1970년 11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를 만나 아랍에 체류하다 1986년 유작 ≪사랑에 빠진 포로≫ 교정 작업 도중 파리의 작은 호텔에서 생을 마쳤다.
옮긴이
오세곤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현대 희곡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논문: 장 주네의 희곡 연구)를 마쳤다. <배우의 화술>, <예술강국, 문화대국>, <연기화술클리닉> 등의 저서와 여러 과목의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를 집필하였으며, 손턴 와일더의 ≪우리읍내≫,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과 ≪엄중한 감시≫, 시집 ≪사형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오네스코의 ≪대머리여가수≫, ≪수업≫, ≪의자≫, ≪왕은 죽어가다≫, ≪살인놀이≫, ≪알마의 즉흥극≫, ≪신부감≫, 장 아누이의 ≪반바지≫, 스트린드베리의 ≪줄리 아씨≫, 하벨의 ≪청중≫,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등 여러 작품을 번역하였고, ≪왕은 죽어가다≫, ≪우리읍내≫, ≪체홉의 수다≫, ≪술로먼의 재판≫, ≪갈매기≫, ≪보이첵≫, ≪가라가라≫, ≪가라자승≫, ≪타이터스≫, ≪오 행복한 날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1996년 가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재 같은 대학교 연극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차례
나오는사람들
하녀들
부록 : <하녀들> 연출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클레르 : 하녀 역할을 그만둘 때가 다가오는 걸 느끼는 거야. 복수를 하려는 거지. 그래, 준비는 다 됐어? 손톱은 뾰족해? 증오심은 불타고? 클레르는 결코 잊지 않는다. 클레르, 내 말 들려? 클레르, 내 말 안 들려?
-23쪽
클레르 : 내 덕분에 존재하는데, 그런데 날 경멸해? 클레르, 마담 노릇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하녀들한테 아양 떨 기회를 만들어 주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내가 약간만 생각을 달리하면 하녀들은 존재하지 못해. 하지만 난 착해. 하지만 난 아름다워. 마음대로 해 봐. 난 애인 때문에 절망에 빠졌어. 그래서 난 더욱 아름다워.
-24쪽
클레르 : 언니도 알잖아. 모든 물건이 우릴 저버려.
솔랑주 : 아니, 물건들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다.
클레르 : 아냐, 틀림없어. 물건들은 우릴 배반해. 물건들은 악착같이 우릴 고발해. 마치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듯이 말이야. 하마터면 마담한테 다 들킬 뻔했어. 전화가 우릴 배반했고, 그다음엔 우리 입술이 우릴 배반했어. 언닌 다 못 봤지? 난 다 봤어. 마담은 하나하나 발견해 내고 있어. 하나하나 밝혀내고 있어. 아직까지 확실히 깨달은 건 없지만 거의 다 찾아냈어.
-99∼100쪽
클레르 : 겁쟁이, 시키는 대로 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러니까 우린 끝까지 가야 돼. 언닌 혼자 남아 우리 두 사람의 생애를 완수해야 돼. 무척 힘이 들 거야. 내가 유배지까지 언니와 함께 동행한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특히 선고를 받을 때 내가 언니 속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언니, 우리는 아름답고 자유롭고 기쁠 거야. 이젠 단 1분도 허비할 시간이 없어. 날 따라 해…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