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우리 문단사에서 한효의 등장은 가장 극렬한 좌파적 비평가의 문단 진입을 의미한다. 그의 등단작인 <우리들의 새 과제−방법과 세계관(진실의 탐구를 위하여)>(≪조선중앙일보≫, 1934. 7. 7∼7. 12)에서부터 마지막 발표작으로 확인되는 <아름다운 것과 미학적 태도>(≪조선문학≫, 1957. 7)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그가 줄곧 추구해 온 담론의 줄기는 ‘리얼리즘’이다. 시기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 진보적 리얼리즘, 혁명적 로맨티시즘, 고상한 리얼리즘 등의 다양한 담론적 방향 전환이 있긴 했지만, 세계관과 창작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천착은 지속된다. 그리하여 그는 남한 문학사에서는 ‘완고한 교조적 계급주의적 입장’(홍문표)을 내포한 비평가로 적시된다.
한효의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1934년∼1945년(실제로는 1938년경까지)인데, 이때는 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세계관과 창작 방법 논쟁, 휴머니즘론, 행동주의 문학론 등의 논쟁을 주도한다. 2기는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46년 월북 이전까지 진보적 리얼리즘론, 민족문학론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3기는 1946년 월북 이후 1957년까지로 고상한 리얼리즘론, 민족문학론, 신경향파론, 도식주의 비판, 자연주의 비판 등이 주류를 이룬다.
1930년대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에서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비판적 논객의 핵심적 구성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여타 비평가의 담론에 대한 메타비평으로서 논쟁적 비판을 중심으로 진행했다면, 점차 구체적인 텍스트를 평가하는 방식을 포함하면서 메타비평과 인상비평을 넘어 작가론, 작품론, 예술론, 성격론, 주제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차원적으로 확대되면서 줄곧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일원으로 ‘진보적 리얼리즘’을 주창하던 한효는 <예술운동의 전망>(≪예술운동≫, 1945. 12)에서 해방 이후 일제 식민지 기반과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예술 전 분야에 걸친 광범한 혁명을 수행할 당위성과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면서, 마르크스ᐨ레닌주의적 지도 이론을 바탕으로 당파성의 확립과 조직의 강화를 주장했다.
해방 이후에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이분법적 도식을 통해서 자신의 리얼리즘 관련 논의를 보다 선명한 태도로 진행하던 한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향파 작가인 최서해와 사실주의의 최고봉인 민촌 이기영 연구를 통해 작가론의 전범을 보여 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남북한의 작가를 통틀어 공과를 거론하며 문학사적 인식을 보여 주는 부분은 경청할 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가 그토록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임화만큼이나 분단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남북을 통틀어 가장 좌파적인 이론가에 해당하는 한효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도식주의 비판의 연장선 속에서 사라진 것은 북한문학사의 자장이 ‘주체사실주의’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면으로 진입하는 초기의 형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200자평
한효는 남북을 통틀어 가장 좌파적인 이론가로 꼽힌다. 이론적으로는 ‘경직된 리얼리즘’을 주창했지만, 창작자의 자유를 실천하고자 했던 문인이었다. 진실 탐구를 위하여 새로운 세계관과 창작 방법으로 문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적 태도로 아름다운 세계를 지향했다.
지은이
평론가 한효(韓曉)는 191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출생한다. 본명은 한재휘(韓在暉)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조선총독부 어용신문인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로 활동한 바 있다. 카프의 중앙위원을 거치면서 1930년대 중엽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한 카프 진영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한다. 좌익 비평가 중에서도 가장 원론적이고 비타협적인 주장을 펼친 극좌적 이론가로 손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창작 방법론, 휴머니즘론, 행동주의문학론, 고발문학론 등 각종 논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의 일익을 담당한다. 해방 후 진보적 리얼리즘을 주창하다가 월북 후 고상한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을 주장하며 북한 문학의 초기 문예 담론을 형성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1930년대 중반에 벌어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도입을 둘러싼 창작 방법 논쟁에서 김두용, 안함광 등과 논전을 벌이며 두각을 나타내는데, 특히 세계관에 앞서서 ‘진실을 그리라’는 명제를 옹호한다. 1934년부터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을 통해서 활발한 비평 활동을 진행하면서, 등단작인 <우리들의 새 과제−방법과 세계관>(1934) 이후 <1934년도의 문학 운동의 제 동향>(1935), <신창작 방법의 재인식을 위하여>(1935), <문학비평의 신임무>(1935), <창작 방법의 논의>(1935), <금년도 창작계 개관>(1935), <예술이론의 일반 법칙>(1936), <조선 문단의 현대적 제상(諸相)>(1936),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검토>(1936), <진정한 리얼리즘의 길>(1936), <현대 조선 작가론>(1936), <휴맨이즘의 현대적 의의>(1936), <창작 활동의 신전망>(1937), <창작 방법의 신방향>(1937), <세계관의 빈곤−문학 학도에게 남은 과제>(1937), <욕설비평의 근거>(1937), <조선적 단편소설론>(1938), <현실 인식의 태도와 모랄>(1938) 등의 활발한 비평 활동을 진행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임화 등의 ‘조선문학건설본부’(‘문건’) 측과 대립하다가 이기영, 한설야, 이동규 등과 함께 구카프계를 계승해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문맹’)을 결성(1945. 9. 17)한다. 이후 1946년 2월에 ‘문건’과 조직을 결합하여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1946. 2. 9)’의 중앙집행위원을 지낸다. 해방 직후에는 새로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을 주창하며, <건국과 예술운동>(1945), <정치와 문화>(1945), <작가의 사상성>(1945), <예술운동의 전망>(1945), <민족문화의 본질>(1945, <조선 문학 운동의 현 단계>(1946), <문학자의 자기비판>(1946), <전국 문학자대회의 성과>(1946), <문학과 언어>(1946), <조선낭만주의론>(1946)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46년 말 월북한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창작 방법론의 전제>(1946), <조선 현대 문학사조>(1947), <≪고향≫ 연구>(1947), <고상한 리얼리즘의 체득>(1948),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과의 호상 관계에 대하여>(1948), <새 영웅을 그리자>(1949), <민촌 연구>(1949), <민족문학에 대하여>(1949), <보다 높은 성과를 향하여>(1949), <장편 ≪땅≫에 대하여>(1950), <새로운 시문학의 발전>(1950)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전쟁기에는 중편소설 ≪서울 사람들≫(1951)을 발표해 주목을 받고, 전쟁기에는 안함광, 엄호석 등과 함께 공저로 ≪청년을 위한 문학 이론≫(1952)도 출판하며, 평론 <조선 문학에 있어서 사회주의 레알리즘의 발생 조건과 그 발전에 있어서의 제 특징>(1952), <자연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의 조선 문학>(1953) 등을 발표한다.
1953년 휴전 이후 평론 <신경향파 작가로서의 최서해>(1954), <생활과 신조를 같이하는 것은 작가들의 신성한 의무다>(1954), <우리 문학의 10년>(1955), <≪고향≫에 대한 약간의 고찰>(1956), <문학의 옹호>(1956),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신경향파문학과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에 대하여>(1957), <아름다운 것과 미학적 태도>(1957) 등을 발표한다.
1950년대 중반 6·25 전쟁 중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는 인민군 전사의 처절한 투쟁을 형상화한 장편소설 ≪밀림≫(1955)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1950년대 후반 도식주의 비판 이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초 숙청될 때까지 북한의 문학 이론계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고상한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의 대표적인 창작 방법론을 남긴다.
엮은이
오태호는 1970년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1989년은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성했다. 그래서 민족과 민중, 노동과 계급, 해방과 통일, 혁명 등의 소위 굵직굵직한 이야깃거리들이 화제였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오롯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화염병과 쇠파이프, 짱돌과 최루가스가 뒤범벅된 교정과 거리에서 ‘나’와 세계는 그렇게 서걱거리며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그 주변의 다른 친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문학과 혁명을 동시에 꿈꾸는 몽상가였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제 비로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진정한 청춘의 방황은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대학 4년 내내 항상 ‘누구와 함께’였던 ‘우리 안의 나’에서, 대학원 입학시험을 혼자서 준비하는 6개월 동안에 나는 이제 ‘홀로인 나’로 거듭나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들어온 대학원 생활에서 다시금 문학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황석영의 ≪장길산≫ 연구>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과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한 성찰을 했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2000년부터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비롯한 교양 과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되었고 이후 여기저기에 잡문을 쓰고 있다. 2004년에는 <황석영 소설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논문을 제출했고, 2005년에는 소설 평론들을 모아 ≪오래된 서사≫를, 2008년에는 시 평론들을 모아 ≪여백의 시학≫을, 2012년에는 소설 평론집 ≪환상통을 앓다≫를 출간하는 등 세 권의 평론집을 상재했다. 2012년 현재 글쓰기 등을 강의하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차례
今年에 있어서의 文學上의 諸 問題에 對하야
現代 朝鮮 作家論
眞正한 리알리즘에의 길
휴맨이즘의 現代的 意義
신경향파 작가로서의 최서해
보다 높은 成果를 向하여
자연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의 조선 문학
해설
한효는
엮은이 오태호는
책속으로
文學上에 있어서의 리알리즘의 地位는 그가 언제나 現實에 對한 最高限의 迫眞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特徵化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恒常 旣存 社會에 對한 容恕 없는 批判을 要請하고 있는 것이다.
―<現代 朝鮮 作家論>
文學은 그것을 生産하는 社會의 民主性에 對한 特殊한 檢證 器具이다. 진실로 자유롭고 참으로 民主主義的이며 自由的으로 자기의 生活을 創造하면서 있는 人民들은 반듯이 자기의 作家들과 詩人들의 形象을 통하여 그것을 노래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高尙한 리아리즘은 人民들의 이러한 欲求에 의하여 우리의 民主主義와 그 現實을 反映하는 創作 方法이다.
―<보다 높은 成果를 向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