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미디어
2615호 | 2015년 6월 2일 발행
최영송이 설명하는 들뢰즈의 미디어
최영송이 쓴 <<들뢰즈와 미디어>>
미디어, 무한 생산의 관계
들뢰즈의 미디어는 광범하다.
다른 것과 연결되어 의미가 달라지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 불통의 원인이 여기서 찾아진다.
우리는 고립을 고집하고
기회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들뢰즈 미디어론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 커뮤니케이션학의 정보 삼각형, 곧 송신자-정보-수신자의 변수를 각각으로 나누지 않고 일체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송신자, 정보, 수신자 모두 미디어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과 미디어론’, <<들뢰즈와 미디어>>, viii쪽.
저 셋이 어떻게 미디어가 될 수 있는가?
들뢰즈가 상식을 벗어나 미디어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미디어는 뭔가?
다른 것과 접속해 변할 수 있는 유무형의 모든 개체다. 들뢰즈의 기계(machine) 개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기계 개념이 뭔가?
우리가 말하는 기계(mechanique)는 정해진 구조에서 같은 기능을 반복한다. 들뢰즈의 기계는 무한 접속을 통해 구조를 바꾼다.
기계의 무한 접속이 뭔가?
선수-기계, 관중-기계, 공-기계가 따로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접속하면 야구-기계가 된다. 야구-기계는 때로 구단-기계와 얽혀 자본주의-기계의 첨병 노릇도 한다.
매개와 재매개의 운동 아닌가?
그렇다. 기계 개념에는 매개하면서 매개당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매개를 낳는 운동이 있다. 여기서 들뢰즈의 기계는 미디어 개념과 맞닿는다.
기계 접속의 현실은 뭔가?
2011년 중동혁명을 보라. 혁명 세력의 대자보나 팸플릿, 이들을 억압하려고 동원된 텔레비전과 신문, 개인의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미디어이자 기계다. 하지만 들뢰즈에서 미디어는 더 넓어진다.
중동혁명에서 미디어는 어디까지 넓어지나?
민주화운동 세력, 폭압적 권력, 장기불황 외에 무수히 많은 요소가 포함된다. 일반 미디어뿐만 아니라 이들 유무형의 개체가 접속해 창발한 사건이 중동혁명이기 때문이다. 연쇄 혁명을 불러온 초기 이집트혁명도 또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미디어고, 중동혁명도 사회역사적 의미에서 하나의 미디어다.
그가 미디어의 범위를 확장하는 목적이 뭔가?
우리가 영화, 텔레비전, 신문을 미디어라 정의하는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기존 관점은 미디어를 인간 봉사 도구로 정의한다. 전쟁 시기나 기업 현장에서 오직 효율성을 목표로 할 때 통용되는 정의다. 하지만 이 정의는 주류 미디어의 실재를 은폐한다.
주류 미디어의 실재는 뭔가?
특정 이념을 전파하려고 동원되는 이데올로기 장치다. 그렇게 많은 미디어가 있지만 민족과 지역, 집단 간에 불통이 만연한 이유가 뭐겠는가? 인간에 예속된 도구로 미디어를 이해하면 불통을 벗어나기 어렵다.
미디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불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를 미디어로 정의하고 그 역학 관계를 살펴야 한다. 익숙한 미디어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미디어와의 접속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다행히도 오늘날 디지털 문명은 그 물질 토대를 제공한다.
낯선 접속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월가 점령 시위를 보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서 동시 진행됐다. 신용카드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월가의 시위대에게 피자를 배달하거나, ‘나는 99%다’라는 홈페이지 동영상 릴레이에 전 지구인이 참여했다. 미디어‘들’의 접속이 불통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이 책, <<들뢰즈와 미디어>>는 무엇을 말하는 책인가?
비소통, 전염, 기계, 리좀, 이접처럼 들뢰즈 존재론의 주요 개념을 정리한다. 통제사회, 미시정치, 명령어, 배치, 되기와 같은 실천론적 키워드를 살펴본다. 들뢰즈의 사상을 대안적 미디어론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영송이다.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