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천줄읽기
이서규가 뽑아 옮긴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천줄읽기≫
아는 것과 사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 사는 것은 알 수 있는 것 아래 있는 세계, 곧 의지의 세계에서 진행된다. 그것은 맹목적이며 충돌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살아 인식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그러나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과 추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정말 그렇게 의식하는 자는 철학적 신중함을 얻게 된다. 그리 되면 그가 아는 것은 태양과 땅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땅을 느끼는 손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천줄읽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이서규 옮김, 31쪽.
‘태양과 땅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땅을 느끼는 손만’을 아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성을 사용해 세계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세계를 특정 법칙에 따라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단지 표상 세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표상 세계는 세계의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본질 파악을 방해하는 인식의 특정 법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칸트는 인식 조건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그리고 12범주로 설명했다. 핵심 항목은 인과율이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이라 했다.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존재 근거 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이다.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을 뭐라고 설명했나?
박사 학위 논문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에서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가지 형태의 충분근거율을 제시한다. 변화의 근거, 진리 판단의 논리적 근거, 현상으로서 존재의 근거, 행위의 근거를 각각 원인과 결과, 이성, 시간과 공간, 동기(動機)에서 찾는다. 이 네 가지 근거가 표상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충분근거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 대상은 없는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권에서 이념의 인식을 언급한다. 이념은 의지가 직접 객관이 된 것이다. 표상과는 달리 개체 원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념을 인식하면 표상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술이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세계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표상 세계 뒤에 의지 세계가 있다. 의지는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고 원인과 목적이 없다. 그래서 본성을 헤아릴 수 없다. 세계는 충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맹목 의지로 가득 차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의지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맹목적 삶에 대한 의지와 인식의 불화 때문에 고통 받고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갈등한다. 의지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그 삶은 의미가 없다.
인간이 의지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가?
표상 세계의 한계를 파악하고 이념을 관조해 의지의 본질을 뚫어 봐야 한다. 의지가 맹목적이며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다음으로 세계의 다양성과 개별성이 의지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형이상학의 깨달음을 얻으면 세계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고통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예술로써 이념을 조망하고, 동정심으로써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금욕을 실천한다면 고통과 갈등 없는 세계 인식이 가능하다.
이성의 배후에 의지가 있다는 발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19세기 독일 철학계의 주류로 떠오른 이성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세계가 의지 세계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이성의 역할을 논하고 물자체와 현상계를 구분한 칸트철학을 쇼펜하우어는 긍정했다. 이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려면 플라톤, 우파니샤드, 칸트의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썼다. 세계를 표상 세계와 의지 세계로 나눈 것은 칸트철학의 영향이다.
칸트 체계 안에 있으면서 칸트를 비판한 까닭은 무엇인가?
칸트철학은 물자체의 세계가 의지 세계인 것을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데서 출발하는 칸트철학으로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쇼펜하우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타자와 끝없이 대립하고 고통 받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뿌리를 보게 된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유한성에 갇히지 말고 진정한 존재 의미를 찾아 나서라고 그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무의미로부터 자신의 삶을 건져 올릴 계기를 제공한다.
이 책은 원전에서 얼마나 뽑아 옮겼나?
10% 정도 뽑아 옮겼다. 1판의 서론과 1권의 1∼4절, 2권의 17∼18절, 3권의 30∼33절, 4권의 53∼54절을 옮겼다. 전체 내용을 균형 있게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발췌본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 철학의 기본 입장을 간결하게 제시했다. 방대한 저서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번역했는가?
쇼펜하우어의 난해한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의미 전달을 위해 복잡한 문장은 가능하면 단문으로 연결해 번역했다. 독문학자 곽복록 교수의 오래된 번역본을 참고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서규다.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