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티에 환상 단편집(Récits fantastiques de Gautier)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의 <<고티에
환상 단편집(Récits fantastiques de Gautier)>>
존재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사물은 끝없이 변하지만 기억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실이 인식의 세계상이고 오늘이 기억의 내일이라면 불멸의 존재는 오직 기억에만 실재한다. 환상은 기억의 미래형이다.
사실, 어떤 것도 죽지 않고, 모든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어떤 힘도 한 번 존재했던 것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우주의 거대한 흐름 속에 던져진 모든 말, 행동, 형태, 생각은 원을 그리며 차츰차츰 넓어지면서 불멸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물리적인 형태는 그저 속된 사람들의 시선에서만 사라질 뿐이고,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은 영원의 세계 속에서 살게 된다. 트로이의 영웅 파리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세상에서 끊임없이 헬레네를 납치하고 있고, 클레오파트라의 범선은 시드너스 강의 푸른 물빛 위에 실크로 된 돛을 펼치고 있다. 뜨거운 열정과 강한 정신세계를 가진 몇몇 사람들은 수백 년 전 과거의 시간을 자신들에게 불러들였고, 이미 죽은 인물들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파우스트는 헬레네를 자신의 연인으로 가졌고, 그녀를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의 고딕 성으로 데려갔다. 옥타비앙은 티투스 황제의 시대에서 하루를 보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파괴된 도시에서 그리스-로마 풍의 침대에 누워 자신의 곁에 있는, 아리우스 디오메데스의 딸, 아리아 마르첼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티에 환상 단편집≫, 테오필 고티에 지음, 노영란 옮김, 148~149쪽
영혼 불멸을 말하는가?
<아리아 마르첼라>에 나오는 구절로, 테오필 고티에가 믿고 있는 영혼 불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대목이다. 영혼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의 사상은 이 책의 모든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다.
테오필 고티에는 누구인가?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한 프랑스 고답파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하지만 다양한 재능을 지닌 작가다. 소설가이자 수많은 공연과 미술 평론을 쓴 비평가이기도 하다. 아돌프 아당의 음악에 그가 대본을 쓴 발레 <지젤>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그는 <에르나니>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에르나니> 사건이란?
1830년 2월 25일 <에르나니> 공연 때 고티에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 스캔들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었던 당시에 빨강 조끼에 노란 장갑을 끼고, 긴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나타난 것이다.
튀는 옷과 색으로 뭘 의도한 것인가?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으며, 고전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움직임, 즉 낭만주의를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에르나니> 공연은 낭만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문학사에 남게 된다.
그는 환상 문학으로 일관했는가?
그가 스스로 ‘환상 단편’이라고 부제를 붙였던 첫 번째 작품 <커피포트 아가씨>를 시작으로 평생 동안 꾸준히 환상 작품을 썼다. 환상 문학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열정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평생 환상을 좇은 이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고티에의 환상 문학은 불가능한 것을 향한 욕망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왜 죽은 여인만을 다루는가?
여성 주인공들에게서 드러나는 공통점이다. 모두 이미 죽은 여인들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이 죽은 여인들을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그녀들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지금 없는 인간을 열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죽은 여인들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이다. 지금, 이곳의 여성이 아닌,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영향을 받은 작가인가?
독일 작가 아르님, 괴테에게서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에른스트 호프만이다. 고티에는 호프만의 작품을 분석한 글을 여러 편 썼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인용문이나 은유적인 표현, 주인공들의 대사나 이름 등을 통해서 호프만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호프만 추종도 환상성 때문인가?
거짓말 같은 것,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것에 너무나 현실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봤다. 그는 “호프만의 환상적인 것은 동화의 환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항상 한쪽 발은 현실 세계에 담고 있다”고 했다. 고티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환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현실적인 것’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상이 현실을 찾아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야기가 평범함의 궤도에서 멀어질수록 사물들은 더 세밀하게 묘사되고, 현실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상황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 호프만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아주 익숙한 인물들이다. 호프만의 작품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나, 주술적인 것, 혹은 환각으로 인한 정신착란 같은 것들을 독자들이 현실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은 사실적인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친근한 존재감이다.
화가 지망생이었던 경력이 그의 묘사력에 나타나는가?
고티에는 사물을 보는 탁월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재능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법한 일로 바꿀 수 있는 정교하고도 세련된 묘사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 이야기 속에서 어느새 사물들이 움직이고, 춤을 추고, 초상화 속의 인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말을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상이 펼쳐지는 고티에의 환상 세계는 시각적으로 강한 흡입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는 그의 어떤 작품이 실렸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환상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 개의 작품, <커피포트 아가씨>, <옹팔>,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아리아 마르첼라>가 실렸다.
<커피포트 아가씨>는 어떤 작품인가?
고티에가 스무 살에 발표한 첫 번째 환상 단편이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같이 화실에 다니는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들을 초대한 지인의 집에 도착한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는데,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댄스파티를 벌이고 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 앙젤라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녀와 춤을 추고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날이 밝아 오자 새벽빛과 함께 그녀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앙젤라는 커피포트였던 것이다.
사물의 의인화라는 테마는 호프만의 작품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나?
그렇다. 비록 주제는 독창적이지 않지만, 초상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에 대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고티에는 이 주제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은 어떤 작품인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삶을 살고, 상반되는 요소의 공존이 환상적 세계를 창조해 내는 작품이다. 로뮈알드는 평범한 시골 사제의 삶을 살던 어느 날 밤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따라나서게 된다. 그가 안내되어 간 곳은 서품식 날 그의 영혼을 흔들었던 신비의 여인 클라리몽드의 집이었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정신을 잃은 로뮈알드는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그녀의 죽은 입술에 키스를 한다. 그의 눈물과 키스는 클라리몽드를 살아나게 만든다.
클라리몽드는 뱀파이어 캐릭터 아닌가?
사랑하는 남자들의 피를 먹으며 생명을 연장하는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어둡고 괴기스러운 다른 뱀파이어와 다르게 클라리몽드는 사랑에 빠진 뱀파이어다.
<아리아 마르첼라>는 어떤 작품인가?
그의 초기작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호프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확립하게 되는 작품이다. 고티에 환상 작품의 주요한 특성인 ‘사실적 환상’이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다. 주인공 옥타비앙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폼페이 유적으로 여행을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독자가 주인공들 함께 지금 폼페이 유적지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 만큼 자세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폼페이 발굴 당시를 기술한 많은 자료와 서적을 참고했다. 실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밀 묘사의 효과는 무엇인가?
독자들은 자신이 읽은 폼페이 안내서에 나온 사실들을 그의 소설 속에서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소설의 리얼리티에 빠져들게 된다.
왜 이 책을 골라 번역했나?
테오필 고티에는 프랑스 환상 문학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늘 아쉬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노영란이다.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