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의 형성
최현철이 옮긴 한스 라이헨바흐(H. Reichenbach)의 ≪과학철학의 형성(The Rise of Scientific Philosophy)≫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험주의자
라이헨바흐는 철학에게 묻는다. 도대체 뭘 철학하는 거야? 철학을 향한, 철학에 의한, 철학의 문제입니다. 다시 묻는다. 살아 있는 인간은 어디 있는 거야? 낮의 태양과 밤의 별은 또 어디 있는 거야?
“과학철학이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철학적 욕구들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사변철학의 목표가 획득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과학철학이 이루어 놓은 업적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상상에 호소하는 회화적 언어는 시인에게나 자연스러운 표현일 뿐이다. … 그동안 전통 철학이 남긴 막연한 개념들과 독단적 주장의 더미들 속에서 몇 개 안 되는 진정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독립적 판단력과 예리한 비판력 덕택이다. 이제 철학자들은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싹터 온 전통 철학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현대의 과학철학이 제시한 해답들을 소개하는 데 있었다.”
≪과학철학의 형성≫, 한스 라이헨바흐 지음, 최현철 옮김, 170-171쪽
저자가 비판하는 철학은 어떤 것인가?
사변철학의 잔재들이다. 모호한 언어를 사용해 논리와 과학에 의거한 경험적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존재해 왔다. 그 위에서 철학이 태어났고, 따라서 이전의 철학적 문제들은 대부분 억측의 대상이었다.
사변철학은 무엇이 문제인가?
철학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문제에 대한 철학적 체계의 역사적 이해만을 전달하려 했다. 기존 철학자들은 너무 많은 것을 대답하려는 욕망 때문에 종종 진리를 희생시켰다. 회화적인 언어로 서술하려는 유혹 때문에 논리적 명석함을 희생시켰다.
주범이 누구인가?
라이헨바흐는 이러한 철학 체계의 실패가 심리학적 원인에 기인하고 있음을 철학사적 사례를 중심으로 추적한다. 1부의 제일 첫 대목에서, 난해하고 신비로운 사변적 철학자의 대명사로 헤겔이 등장한다. 비유와 허위적인 설명 때문에 독단과 유해한 오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등의 철학자도 이성주의(rationalism)의 범주에 넣어 비판하고 있다.
헤겔, 플라톤, 데카르트가 주범이라면 칸트는 무죄인가?
칸트는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리를 찾으려 했다. 절대적 확실성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험도 선험적 진리를 반증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우리는 선험적 원리들과 모순되는 경험을 상상할 수 있고, 언젠가는 그러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확실성 없이도 일할 수 있다.
칸트에 대한 그의 평가는 무엇인가?
그는 말한다. “사변철학은 칸트의 철학 체계에서 절정을 이룬 후에, 단지 평범한 대표자들만 내놓으면서 쇠퇴해 갔다. 이제는 다른 철학이 부각되고 있다.”
‘다른 철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철학이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그 결과물에서 다양한 인식 도구가 발견되었다. 이것을 사용해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다른 철학에서 과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인가?
이것은 과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철학이다. 이전 시기의 철학이 제기한 엄청나게 많은 물음에 대답한다. 우주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전적으로 과학자의 몫으로 돌린 후, 철학자들은 과학을 분석해 얻은 성과들에 기초한 새로운 지식론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과학철학은 경험주의의 진화인가?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이성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철학이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 이 유형의 철학자들은 경험과학을 지식의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했다. 그들은 감각 관찰이 지식을 얻는 일차적 수단이며,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궁극적인 심판자라고 주장한다. 또 인간의 정신이 논리적 관계에 관한 진리 이외의 다른 진리를 경험과 무관하게 직관하는 것은 결국 자기기만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유형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부른다. 그 기원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로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의 베이컨, 로크, 흄은 기틀을 마련했다. 과학철학은 이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대 경험주의와 20세기 과학철학의 형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흄은 귀납추리를 비판했고, 이로써 고전적 경험주의가 막을 내렸다. 흄에 따르면 귀납추리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귀납추리에 의해 얻은 결론과 상반되는 결론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납추리는 더 이상 예측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흄의 귀납추리 비판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추리가 예측을 하지 못하면 경험론은 불가지론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세기 비유클리드 기하학, 20세기 물리학에서 성장해 온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다.
과학에는 이성주의적 성격이 없나?
고전 물리학에는 경험과 이성이 공존하는 이중성이 있었다. 뉴턴 물리학을 보면 알 수 있다. 경험적 관찰 진술을 넘어선 수학적 설명이 예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경험주의의 물결뿐 아니라 이성주의의 물결도 함께 고조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은 이성주의적 가면을 벗고 경험주의로 되돌아갔다.
19~20세기, 과학과 과학철학이 이룬 발전은 어떤 것인가?
과학에서는 기하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진화론이 발전했고, 과학철학에서는 기호논리학이 형성되었다.
푸앵카레가 라이헨바흐의 비판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수학자 푸앵카레의 규약주의에 따르면, 기하학의 문제는 규약의 문제이며 기하학의 상대성이 성립한다. 하지만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동등한 여러 서술 가운데 정상 체계, 자연 기하학을 결정하는 것은 규약이 아닌 경험적 문제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봤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두고 우주적 차원에서의 자연 기하학이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이라고 주장했다.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우리의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었나?
상대론은 시간 순서와 동시성의 의미를 일상적 경험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개개의 원자적 사건들이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을 뿐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실체와 물질의 성격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지금까지 철학이 주장한 어떤 허구보다도 더 놀라운 생각을 물리학이 내놓았다. 실체와 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진화론은 우리 생각에 어떤 변화를 야기했나?
진화의 원리가 명료해졌다. 인과법칙과 결합한 통계적 선택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기호논리학은?
새로운 과학철학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퍼스, 프레게, 러셀 등의 노력으로 새로운 유형의 수학적 논리학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우리의 인식 방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기호로 사물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이 학문은 19세기 들어 집합론을 정교하게 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또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별하면서 기호론과 의미론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기호논리학을 철학적 작업의 주된 도구로 삼았다.
라이헨바흐는 논리 경험주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가?
논리 경험주의자들의 모임인 빈 학파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빈 학파의 기관지인 <인식(Erkenntnis)>의 편집자가 되고, 카르나프와 함께 비경험적 명제를 배격하는 반형이상학적 철학을 구성하는 데 일조했다.
라이헨바흐는 어떤 인간인가?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의 추정을 찾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인다. 제자 새먼에 따르면 라이헨바흐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험주의자”다.
이 책은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위한 전문 지식인가?
아니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상식과 행동을 뒤돌아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철학과 과학에 관한 책들을 읽었으나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 의미를 발견하려 했으나 안개 같은 철학적 용어들의 장막에 싸여 있는 독자들에게 객관적이고 엄밀한 철학적 진리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현철이다.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강의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