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러 산문선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의 ≪뮐러 산문선(Prosa von Heiner Muller)≫
말과 행동 사이
하이너 뮐러는 그의 산문선에서 희곡과 산문의 이종 교배를 시도한다. 전통이 해체된 그 자리는 이질과 상징이 차지하고 관습을 잃은 독자와 관객은 존재와 세계에 대해 더욱더 깊이 빠져든다.
야경화(夜景畵, Nachtstück)
무대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크며 어쩌면 인형일 수도 있다. 몸은 플래카드로 싸여 있다. 얼굴에는 입이 없다. 그는 자기 두 손을 관찰하고 팔을 움직여 보고 다리를 시험해 본다. 핸들이나 페달, 또는 둘 다, 또는 핸들과 페달 그리고 안장까지 떨어져 나간 자전거 한 대가 무대 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인형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은 자전거 뒤를 쫓아 뛰어간다. 무대 바닥에 문지방과 같은 턱이 하나 생겨난다. 그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 넘어진다. 배를 깔고 누워서 자전거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가 보지 못하는 가운데 턱이 사라진다. 일어서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지 둘러볼 때 무대 바닥은 이미 매끈하다. 그의 의심은 자기 다리를 향한다. 앉아서, 누워서, 서서 자기 다리를 뽑아 버리려고 한다. 발꿈치를 엉덩이에 대고, 두 손으로 발을 잡아서 그는 왼쪽 다리를 뽑는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렇게 엎어진 자세에서 오른쪽 다리를 뽑아 버린다. 자전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그를 지나쳐 무대를 지나갈 때도 그는 여전히 엎드려 있다. 그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기면서 그것을 따라잡지는 못한다. 몸을 일으켜 흔들리는 몸통을 양손으로 받치면서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던지고, 양손으로 다시 받치는 등의 동작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데에 자신의 팔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새로운 이 나아가는 방법을 연습한다. 그는 자전거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오른쪽 입구에서, 그다음에는 왼쪽 입구에서. 자전거는 오지 않는다. 혹시 인형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은 오른쪽 팔은 왼손으로, 왼쪽 팔은 오른손으로 동시에 두 팔을 뽑아 버린다. 그의 뒤에서 무대 바닥으로부터 턱이 키 높이까지 솟아오른다. 이번에는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는다. 무대 천장에서 자전거가 내려와 그의 앞에 멈추어 선다. 키 높이의 턱에, 혹시 인형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은 기대서서 무대 위에 멀찌감치 흩어져 있는 자기의 다리와 팔을 바라보고 자기가 사용할 수 없는 자전거를 바라본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운다. 눈높이의 꼬챙이 두 개가 오른쪽과 왼쪽에서 들어온다. 그것은 혹시 인형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의 얼굴에 닿아 멈춘다. 그는 그저 머리만 돌리면 된다. 한 번은 오른쪽으로, 다음은 왼쪽으로. 꼬챙이는 나머지 부분에 신경을 쓴다. 꼬챙이는 끝에 눈을 하나씩 달고 밖으로 나간다. 혹시 인형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의 빈 눈구멍에서 이가 기어 나와 얼굴을 새까맣게 덮는다. 그는 비명을 지른다. 비명과 함께 입이 생겨난다.
≪뮐러 산문선≫, 하이너 뮐러 지음, 정민영 옮김, 63∼65쪽
마치 팬터마임의 한 장면 같은데, <야경화>는 어떤 작품인가?
본래는 독일 역사의 분열상을 주제로 하는 극작품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1977)의 열한 번째 장면으로 삽입된 텍스트다. 1982년에는 독립 텍스트로 발표되기도 했다. 팬터마임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희곡인가 산문인가?
산문이다. 하이너 뮐러는 희곡에 독자적인 산문 텍스트를 삽입해 전통적인 희곡 형식을 해체하고 그 이질성과 상징성을 통해 독자가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든다.
산문 텍스트로 공연이 가능한가?
<야경화>처럼 지문 또는 무대장면 스케치와 같은 뮐러의 산문은 ‘연극을 위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무대 위의 그림을 글로 분해해 놓은 것과 같다. 그것을 조립하는 것은 연출자와 배우들, 그리고 관객의 몫이다. 텍스트는 기호와 상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 나가는 과정은 오히려 엄청나게 다양한 공연 가능성을 제공한다. 뮐러에게 장르의 틀에 대한 고정관념은 없다. 경계가 없는 ‘텍스트’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된 적 있는 <그림 쓰기>는 마침표 없는 9쪽 분량의 문장 사슬로서 희곡의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연극 텍스트’다.
작가는 이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연극을 위한 재료일 뿐이다. 이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 이야기할지는 이 재료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 할 일이다. 무대 위의 인물은 끔찍한 자기 파괴를 보여 준다. 자전거를 따라가려 하고 자전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무엇인가 목표를 이루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다. 사실 그가 좇는 목표인 자전거도 완전한 것이 아닌 결함투성이에 망가진 것이다. 결과는 자기 파괴로 모든 것을 상실하고 비명만 남은 상황이다.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입이 생겨난 것은 희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대인의 삶, 그 어두운 일면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이 텍스트가 삽입된 희곡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인물의 자기 파괴 행위는 뮐러가 보고 있는 독일 역사의 모습, 자기 파괴와도 같은 분열의 과정을 이어 온 독일 역사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망가진 자전거는 잘못된 역사의 흐름에 상처 입은 희망, 폭력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 희망을 좇는 인물의 처절한 모습은 작가 자신의 모습, 또는 독일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한편, 텍스트가 주는 경악, 끔찍함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의 전략적 표현 방식이다. 무언가 불안해지면 그제야 뭔가를 생각하게 되니까.
뮐러는 누구인가?
구 동독 출신의 극작가다. 동독에서보다 서구 연극계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동독은 그를 어떻게 보았나?
극작품에 나타나는 인물 행동에 인과관계가 없으며 짧은 장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 구조가 사건의 지속적인 진행을 방해한다고 지적받았다. 특히 노동자를 이끄는 당 지도부의 역할을 미약하게 표현했다고 비판받았다.
비판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1961년 동독 작가연맹에서 제명되었고, <마우저 총>은 동독이 존재하는 동안 공연은 물론 출판조차 할 수 없었다.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 <군들링의 삶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레싱의 잠 꿈 비명>, 그리고 <햄릿기계>는 동독 무대에 오르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뮐러의 작품은 동독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본 것인가?
그의 초기 관심사는 동독의 생산 현장과 사회 내부의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이었다. 때문에 당시 정치적 조건, 그리고 동독 사회주의의 청사진만을 그리도록 요구했던 당의 문화 정책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브레히트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독일어권 극작가”라는 서구의 평가는 정당한가?
“동독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찬사를 시작으로 1980년대 말, “베케트에 필적하며, 베케트 이후 1950년대 이래로 연극이라는 매체나 드라마 생산에 더불어 영향을 주고 있는 작가가 바로 뮐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동독의 태도 변화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1980년대 들어서 동독 문학계와 연극계는 그의 텍스트가 가진 동독 사회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건설적 비판의 잠재성으로 파악했고 현대 연극으로서 그의 새로운 극작 방식에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동독의 예술아카데미는 1982년 뮐러를 받아들였고 1986년 그는 동독국가상을 수상했다. 뒤이어 1988년 2월 18일 작가연맹이 그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26년 만에 다시 동독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산문은 뭔가?
극작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예술세계를 더욱 심도 깊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자료다. 초기 산문은 대부분 작가로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시험적 시도의 성격이 강하며,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 이후 극작품을 위해 기록한 메모 또는 정리한 자료에 가깝다. 단순한 일화 형태 또는 교훈적인 우화의 특성을 가지며, 내용과 모티프는 이후 극작품에 이용된다.
뮐러의 산문은 어떤 것이 있는가?
<철십자 훈장>은 히틀러가 죽자 그를 추종하던 어느 종이 상인이 히틀러를 따라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며 아내와 딸을 권총으로 죽이고 자신은 죽음이 두려워 서쪽으로 도망치면서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철십자 훈장을 던져 버리는 이야기다. 비겁한 한 남자의 행위를 통해 일반인에까지 파고든 파시즘의 영향을 경고하는, 완성도와 독창성이 뚜렷한 우화적 산문이다. 그 밖에 1953년 발표한 <사랑 이야기>는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여성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어떤 내용인가?
대학생 한스 P는 베를린의 어느 전철역에서 우연히 공장 노동자인 한 아가씨를 만나 사귀게 된다. 그는 “여성의 동등권”을 배우고, 그것을 주제로 한 시험에 합격하지만 아가씨를 만나는 과정에서 여전히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를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고 소유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그녀가 임신하자 그는 아이를 지울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가씨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고 그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고민 후 결혼을 제의하지만 이는 소유욕과 체면 때문이다. 아가씨는 진정한 사랑의 결과가 아닌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임신한 아이를 책임지며 미래를 준비한다. 한스 P는 전철 승강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별의 마지막 순간에 아가씨가 타는 금연칸에 따라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흡연칸을 택한다.
남녀 관계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했나?
이론의 허구와 가식에 사로잡혀 있는 남성과 실제 생활 공간에서 생산에 참여하고 독립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여성의 대립, 그리고 남성의 인위성과 여성의 자연성이다. 한스 P로 대표되는 낡은 것과 아가씨로 대표되는 새로운 것의 대립은 동독의 사회주의 건설 과도기에 드러나는 갈등의 형태로, 새로운 것을 향한 발전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가?
아가씨를 통해 나타나는 여성의 새로운 성 역할,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필요한 여성의 새로운 독립성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노동력으로서 당시의 동독 사회가 요구하는 긍정적 여성상이다.
생산문학인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숨기지 않았다.
뮐러의 작품에 개인적인 경험은 어떻게 드러나나?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체험이 가장 강렬한 동인이 된다. 이는 아버지와 개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어려웠던 성장 과정, 파시즘의 폭력 체험이 연결된 복합적인 것으로, 이후 그의 작업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에게 아버지란 무엇이었나?
단절해야 할 낡은 것이다. 이는 뮐러의 문학에서 잘못된 현재를 극복하고 변혁하기 위한 기본적인 사고 토대라 할 수 있는 “다른 것에 대한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단죄의 대상인
동시에 연민과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난 후 기차 안에서 뮐러가 보는 것은 파괴의 현재, “폐허”와 “쇳빛”이지만 동시에 건설의 움직임이 살아 있는 “건축 공사장”과 혁명의 역동적 힘을 생각할 수 있는 “10월 낮”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된 다른 사건이 있다면?
아내였던 잉에 뮐러의 자살이다. 잉에 뮐러는 같은 작가로 하이너 뮐러의 문학 작업에 동반자 역할을 했으나 두 사람의 문학적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결혼 생활도 위기를 맞이했다. 1966년 집에 돌아온 뮐러는 가스 중독으로 숨진 아내를 발견한다.
작품에는 어떻게 드러나나?
1975년 뮐러는 아내의 자살을 <사망 신고>로 작품화한다. 여기서 그는 아내의 자살을 여성의 자기 존재 확인을 위한 저항이자 단절과 억압의 세계를 만들어 낸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한다. 이 사건은 여성의 존재를 다시 관찰하게 만들었고, 그의 극작품에서 역사 속 여성의 역할이 중요한 테마로 자리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글이 난해한 이유는?
그의 사유와 글쓰기 방식은 극단적이다. 그의 의식의 흐름은 고통을 수반하면서 때로는 악몽으로 때로는 전혀 비논리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어진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는 역사가 발전을 멈춘 채 응고되어 있고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채 현재의 순간에 점령당해 있다고 봤다. 모든 것이 석화해 있는 것이다. 뮐러는 이러한 현재 상황을 부수는 작업에 몰두한다. 새로운 것으로 전이, 새로운 역사의 움직임을 태동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굳어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만들어 내는 장면들은 극단적인 난폭성, 테러와 같은 공격으로 채워지고 압축된 언어는 수수께끼와 같은 암호와 상징, 은유로 덮여 있다. “경악”을 통해 모든 기존의 틀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 놓는다. 기존의 틀에 갇혀 있는 독자와 관객에게 그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다.
지나친 경악은 거부감을 낳지 않나?
관객의 경악이 그 작품 자체를 향하고, 최소한 방어 반응으로서 어떤 저항감을 가지고 극장을 떠나게 되면 이미 새로운 경험과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뮐러는 사회주의 작가로서 폭력이 사라진 인간적인 세계를 꿈꾼 작가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그의 글은 더욱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의 모습을 재인식하게 만들고 진정한 역사 발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그의 희곡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산문은 그의 희곡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난해함은 사고의 유희로 함께 즐기면 좋겠다.
당신은 누군가?
정민영이다.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