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강의
오류로부터 자유로우려는 170년의 노력
헤겔의 아름다운 일탈
정반합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러나 미학에서는 통일−분열−재통합의 길에서 벗어난다. 상징−고전−낭만의 예술형식의 전개는 분리−통일−해체의 과정이다. 아름다움에서 그는 스스로의 도식에서 벗어난다.
아름다움에 있어서 진리는 외면성에서 현상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곤 하는 것처럼 ‘가상(Scheinen, 가현)’은 그렇게 무의미하고 내용 없는 표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가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념도 가상이 된다[가현(假現)된다]. 신은 스스로를 외화해야 하며 가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추상물일 뿐이며 내적인 진리일 수가 없다. 아름다움에서 존재는 가상으로 정립되어 있다. 개념은 외면성을 꿰뚫고 나아가며 가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현은 존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외면성으로 이렇게 출현함으로써만 본질(Wesen)은 존재하게 되며, 다시 말해 본질이 가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자체가 바로 이 가현이기도 하다.
≪미학 강의(베를린 1820/21년)≫, 게오르크 헤겔 지음, 서정혁 옮김, 54∼55쪽.
가상이 존재보다 더 높이 있다는 말은 타당한가?
바로 이 주장에서 철학적 선입견을 깨는 통찰이 드러난다. 본래 독일어에서 가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 곧 거짓이나 가짜를 뜻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본질은 가상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이는 특히 예술에서 강조된다. 예술은 사변적인 철학보다 훨씬 더 깊이 감각 직관에 의존하고, 예술 세계는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외면 세계를 통해서만 구축되기 때문이다.
≪미학 강의(베를린 1820/21년)≫는 어떤 책인가?
헤겔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1818년 여름 학기에, 베를린대학에서 1820/21년 겨울 학기, 1823년 여름 학기, 1826년 여름 학기, 1828/29년 겨울 학기에 미학 또는 예술철학을 강의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1820/21년 강의했던 ‘예술철학으로서 미학’을 들은 수강생의 필기 노트를 1995년 출판한 것이다.
출간까지 170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헤겔의 제자 하인리히 구스타프 호토가 편집해 1835년 초판, 1842년 개정판으로 출간한 ≪미학 강의≫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판본이다. 그러나 최근 이 책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뒤 헤겔이 미학을 강의했던 학기별로 필기 노트나 정서 노트를 새롭게 편집해 출간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의혹은 호토의 견해가 반영되었다는 의심에서 비롯되었나?
헤겔의 생각뿐만 아니라 호토 자신의 견해가 반영되었다고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호토는 다른 저서들처럼 미학도 완결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헤겔 미학을 편집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1818년 강의 노트뿐만 아니라 1820/21년 강의를 편집에서 제외하고, 주로 1823년 이후에 행한 미학 강의 자료를 재구성했다. 그 결과 헤겔의 강의 내용이 아닌 것도 마치 헤겔의 것인 양 제시했다.
이 책의 원본은 믿을 만한가?
본래 작스 반 테르보르크라는 사람의 유고에 남아 있던 원고다. 테르보르크가 헤겔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노트를 추후에 아셰베르크라는 사람이 정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뒷부분은 미덴도르프라는 사람의 노트를 다시 정서한 것으로 보인다.
정서한 원고의 정확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정서한 것이기 때문에 직접 필기한 노트보다는 헤겔의 본래 강의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토가 편집한 ≪미학 강의≫에 가려졌던 헤겔 사유의 기본 입장을 확인해 보는 유일한 자료로 베를린 시기 첫 번째 미학 강의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후 강의와 비교해 봄으로써 베를린에서 헤겔 미학이 발전되어 나간 방향을 조망해 볼 수 있다.
1826년을 전후해 그의 강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826년 강의 이전까지 헤겔은 미학 강의를 두 부분, 즉 보편적 부분과 특수한 부분으로 나누고, 상징적·고전적·낭만적이라는 세 가지 예술형식을 거의 동일한 분량으로 다루었다. 반면 1828/29년 마지막 강의에서는 개별적 부분을 추가해서 근대 예술과 관련해 예를 좀 더 풍부하게 다루었다. 호토가 편집한 ≪미학 강의≫는 이러한 시기별 특징을 무시하고 완결된 결과물로 헤겔 미학을 해석한다. 그러나 필기 노트에 기초한 미학 강의들은 헤겔 미학이 마지막까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보편과 특수는 어떤 관계로 제시되나?
보편적 부분에 예술의 특수한 부분이라는 제목을 별도로 두고 세 가지 예술형식을 다룬다. 또한 고전적 예술형식을 완성된 예술로, 낭만적 예술형식을 근대적 예술로 명기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가지 예술형식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표현되어야 할 내용과 표현된 형식, 달리 표현하면 실재와 개념의 적합성 여부다.
상징적 예술형식이란?
내용과 형식이 서로 부적합한 예술형식이다. 이 부적합성을 내용이 예술형식을 찾는 과정이자 지향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절대자가 아직 내용에 적합한 형태로 표현되지 못하고 이질적인 자연 대상으로 대체되며 내용과 표현이 낯선 상태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지배적인 범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숭고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동방의 건축물이 대표적이다.
고전적 예술형식이란?
내용과 형식이 완전하게 일치함으로써 미의 이상을 실현하는 예술형식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절대자가 개별적인 인간 신체로 구현되는 것처럼,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형상화한다. 그리스인에게 예술은 종교를 위한 부가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종교다. 특히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아름다움 또는 예술의 이상이 진정으로 실현되었다는 데 헤겔이 주목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개체, 즉 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한계를 지적한다.
낭만적 예술형식이란?
고전적 예술형식이 성취한 아름다움과 예술의 완성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 예술형식으로 퇴행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존 예술의 해체이자 초월이다. 어떤 외적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주관적 내면성이 곧 낭만성이며, 이 특징은 기독교로 이행하면서 가능해졌다.
헤겔 미학에서 특수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개별 예술 장르와 작품을 해석한다. 다음 구절에서 각 예술형식과 장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상징적 예술이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특징과 탁월성을 지니며, 고전적 예술은 조각에서, 낭만적 예술은 회화와 음악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편적 예술과 관련해서 보면, 이 세 가지 형식 모두를 초월해 대자적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것이 바로 언어 예술이다.”
미학에서도 변증법은 유효한가?
보통 헤겔 철학 연구자들은, 헤겔의 철학 체계를 완결된 결과물로 보고 모든 저작을 해석해 내려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 미학을 소위 변증법적인 삼분법 도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본래 헤겔 미학은 이렇게 작위적인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구성을 지녔다.
미학에서 헤겔의 사유는 어떻게 구성되었나?
추구하기−도달하기−뛰어넘기로 진행되는 헤겔의 예술형식론은 순환적이기보다는 직선적이다. 상징−고전−낭만의 전개는 분리−통일−해체의 과정으로서, 원초적 통일−분열−재통합이라는 일반적인 헤겔의 도식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도 예술의 종언을 주장하나?
호토가 편집한 ≪미학 강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문제다. 그러나 ≪미학 강의(베를린 1820/21년)≫에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예술의 부정 또는 중단이 짧게 언급될 뿐 예술의 과거성을 직접 언급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가 예술의 종언을 주장한 것은 오류인가?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헤겔 미학 강의의 내용을 시기별로 비교하면서 역추적하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헤겔의 생각과 언급이 조금 더 분명해지고 체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헤겔의 생각이 바뀌는 추이를 고려하면서 예술의 종언이나 과거성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다만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얘기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모든 예술 활동의 전면적 중단이나 무의미함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종언에 내포된 일차적 의미는, 예술은 더 이상 철학적 사유의 도움 없이는 예술로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헤겔은 누구인가?
칸트에서 출발한 독일 관념론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철학자다. 생전에 이미 헤겔학파, 우파와 좌파가 형성되어 그의 사상을 상반되게 해석하고 수용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키르케고르로부터 지젝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현대 사상가들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헤겔 사상과 생산적으로 대결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 할 만큼 후대 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다.
헤겔의 미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표현은 정당한 것인가?
헤겔 미학은 자연보다 예술을 우위에 두고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예술의 역사를 발전 단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고찰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는 잘 정리된 서양 미학사 교과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예술이 철학과 함께 절대정신에 속하면서도 철학적 사유에 미치지 못하는 표현 방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이데거가 표현했듯이 헤겔 미학은 “서양에서 가장 마지막이자 위대한 미학”이다.
루카치에서 헤겔은 어떻게 재현되는가?
20세기에 새롭게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아서 단토는 스스로 헤겔주의자라 말했다. 그 밖에 헤겔 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 대표자로 죄르지 루카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소설론이 “헤겔 철학의 성과들이 미학적 문제들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정신과학적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정혁이다. 헤겔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