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육필시집 별까지는 가야 한다
산에서 배우다-10월 일기
어제는 온돌에서 자고 오늘은 한기(寒氣)의 산을/ 오르다/ 잎새들이 비워 놓은 길이 너무 넓어/ 내 몸이 더욱 작아진다/ 내 신발 소리에도 자주 놀라는 산길에선/ 내 마음의 주인이 이미 내가 아니다// 10월의 포만한 얼굴에서 나는/ 연민을 읽지 않는다// 누가 다 떼어 갔는지 산의 이불인/ 초록이 없다/ 자장(慈藏)이면 이곳에 지팡이를 꽂고/ 대웅전 주춧돌을 놓았으리라// 그러나 범연한 눈으로는/ 햇볕 아래 서까래를 걸 데가 없다// 경전의 글자가 흐려서 책장을 덮는 밤에는/ 스스로 예지를 밝히는 저녁 별이 스승이다/ 겨울을 예감한 나뭇잎들이 나보다 먼저/ 뿌리 쪽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돌을 차며 비로소/ 산의 무언을 채찍으로 배운다
≪이기철 육필시집 별까지는 가야 한다≫, 102~105쪽
산은 말이 없다.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시월, 잎새를 비워 길을 넓힐 뿐이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
2784호 | 2015년 10월 31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