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혐오자
몰리에르 희극의 정수, 프랑스 고전 희곡 신간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
인간 혐오자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사회 예법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는 인간, 그는 인간을 혐오한다. 주변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사람들은 그를 혐오한다. 혐오하고 혐오당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대화가 없고 이해가 없고 사랑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원점, 그곳에는 자신에 대한 작은 두려움이 숨어 있다.
셀리멘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얼마나 배반했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증오할 자격이 있어요.
이제 저를 증오하세요. 회피하지 않겠어요.
알세스트
정말 믿기 어려운 사람이군요. 내 어찌 당신을 증오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어요?
미워하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게는 그럴 뜻이 없습니다.
난 아직도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셀리멘
제가 늙기도 전에 사교계를 떠나
당신의 시골에 묻혀 살란 말씀이세요?
스무 살에 고독이란 끔찍한 거예요.
저는 그럴 만큼 대단하고 굳센 인간이 아니예요.
어떤 장면인가?
≪인간 혐오자≫ 5막 4장의 한 장면, 대화의 요약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셀리멘에게 알세스트가 마지막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고 있다.
스토리라인은?
젊은 미망인 셀리멘은 귀족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그녀의 살롱에는 구혼자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알세스트도 그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진정성 없는 사교계 예법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는, 살롱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의를 차리지 않은 직언으로 살롱에 모인 다른 귀족들과 갈등한다. 그런 그에게 셀리멘의 사교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다. 한편 알세스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아르지노에의 폭로로 셀리멘이 보여 준 호의와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알세스트는 영영 사교계를 떠나려 한다.
부제가 ‘사랑에 빠진 우울한 사람’인데 무슨 뜻인가?
주인공 알세스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성정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적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세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야말로 인간 혐오자다. 진정성 없는 사교계 예법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는 진지한 인물이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남들에게 조롱당한다.
그에게 우호적인 인물도 있을 텐데?
필랭트가 그의 친한 친구이자 조언자로 등장한다. 몰리에르 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분별력 있는 인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당대 사교계가 추구하던 이상형인 교양인에 매우 가깝다. 셀리멘의 사촌 엘리앙트는 신중한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과 좌충우돌하는 알세스트 편에서 그에게 공감하는 유일한 여성이다.
‘인간 혐오자’라는 캐릭터는 어디에서 기원하나?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의 원조로 메난드로스의 ‘무뚝뚝한 사람’을 꼽는다. 셰익스피어 또한 비극 <아테네의 타이먼>에서 고대에 실존했던 인물을 등장시켜 ‘인간 혐오자’라는 인물 전형의 맥을 이었다. 몰리에르는 인간 혐오자 알세스트를 당대 사교계라는 특수한 공간에 위치시켜 작품이 현대성을 갖도록 했다.
인간 혐오증의 결과는 어떻게 종결되나?
궁정과 사교계에서 소외된다. 인간 혐오증이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성격희극이자 풍속희극이라는 면모를 보여 준다.
성격희극이 무엇인가?
고대극 이래로 굳어진 희극 캐릭터 전형에서 탈피해 특정 인물의 개성을 부각하는 연극을 말한다. 몰리에르 연극을 예로 들면 알세스트의 비사교성이 부각된 <인간 혐오자>, 타르튀프의 위선을 그린 <타르튀프>, 동 쥐앙의 여성 편력을 묘사한 <동 쥐앙>을 성격희극이라 할 수 있다.
풍속희극은 무엇인가?
당대 세태를 다룬 희극을 말한다. <인간 혐오자>에서는 파리 사교계와 궁정이 묘사되고 있다. 그 밖에 몰리에르 연극에서는 파리 부르주아지의 종교 맹신 분위기를 그린 <타르튀프>와 당대 배금주의를 풍자한 <수전노>가 풍속희극으로 분류된다.
이 연극의 특징은?
전통적인 이분법, 곧 비극에는 왕족이나 귀족,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희극은 주로 부르주아 계층을 묘사한다는 당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이 모두 귀족으로 설정되었다. 몰리에르 연극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파리 사교계를 무대로 당대 파리 상류층이 보여 준 행태를 관찰한 결과가 이 작품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 극작 방식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젊은이들의 사랑을 중심 사건으로 설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기성세대를 등장시켜 세대 갈등을 보여 주는 것이 기본이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 희극의 전형적인 갈등 구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세대 갈등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주제는?
사교계 예법과 진실성 문제가 주된 테마다.
몰리에르가 희극에 몰두한 이유는?
자기 발성이나 연기가 비극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희극 공연과 창작에만 매진했다. 비극을 공연하기는 했지만 집필한 적은 없다.
프랑스에서 몰리에르의 위상은?
몰리에르 사망 후 그의 극단은 마레 극단과 합병해 게네고 극단으로 개명한다. 1680년에 왕실은 게네고 극단과 부르고뉴 극단을 통합해 코미디프랑세즈를 출범시켰다. 프랑스 국립극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코미디프랑세즈를 ‘몰리에르의 집’이라고도 부른다는 점에서 확인되듯, 그는 프랑스 연극의 원조이자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몰리에르가 극작가로서 역량을 최대로 발휘한 작품이다. 역사가 미슐레는 이 작품을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경의다.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