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선 초판본
허혜정이 묶은 ≪초판본 서정주 시선≫
미당, 너는 누구냐?
가난과 상실 그 너머의 세계, 한국 근대기의 시련과 번민, 팔 할이 바람이었다는 유랑벽, 현실 저쪽을 향하는 정신의 시선, 저주받은 길의 선택, 그에 따르는 자기 징벌과 자학, 오직 시의 이슬을 마시려는 결연한 탐미 의식이 아닌가?
冬天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초판본 서정주 시선≫, 허혜정 엮음, 77쪽
겨울 하늘에서 삼라만상, 억겁의 인연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뭔가?
순간은 연기적 상상력과 단아한 형식을 통해 영원이 된다. 차디찬 겨울 하늘에 외롭게 떠 있는 초승달에서 임의 눈썹을 연상한다. 화자는 그 초승달을 여러 해 여러 밤 꿈속으로 맑게 씻어 하늘에 옮겨 심는다. 그런데 임에게 가고픈 화자의 마음처럼 새 한 마리가 초승달을 비껴 날아간다. 찰나와 영원, 인간과 자연이 맞물린 시 세계는 서정주의 영원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 준다.
서정주는 누구인가?
한국 전통문화와 민족 정서를 수려한 모국어에 담아낸 시인이다. 1915년 태어나 2000년에 타계했다. 60여 년의 긴 시력은 한국 현대시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그의 문학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이 당선되면서부터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발표했다. ≪화사집≫과 ≪귀촉도≫가 초기 시집이며, 중기에 속하는 시집은 ≪신라초≫, ≪동천≫이고, 후기 시집은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등이다.
≪화사집≫에 나타나는 시의 정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원초적 생명의 본능과 악마적 육성이 한 갈래이고, 한편으로는 운명적인 죄의식과 번민의 목소리도 있다. 전자에는 짙은 원죄 의식과 관능적인 애욕의 세계에 탐닉하고자 하는 탐미적 정서가 잘 드러나며, 후자에는 금기를 위반한 자의 자기 징벌 의식과 시인 자신을 얽어매는 운명적 억압을 내포한다.
“한국의 보들레르”가 맞는 말인가?
≪화사집≫은 본능과 도덕의 갈등, 혹은 내면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끊임없는 물음과 충돌에서 비롯했다. 현실의 슬픔과 문학적 환희, 금단의 세계를 넘나드는 초기 시의 육성은 보들레르의 문학 세계와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
대표작 <자화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되는가?
시인 자신의 근원적 고통과 젊은 날의 방황, 이로부터 나타나는 결연한 생명 의식이다. 가난과 상실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자 했던 시인의 자전적 목소리, 화자의 시련과 번민으로 드러나는 한국 근대기의 아픔, “팔 할이 바람”이라고 표현한 유랑벽과 현실 너머의 세계를 갈구하는 정신적 지향, 현실의 규범에 적응하기보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감내하며 저주받은 길을 선택한 자기 징벌과 자학, “시의 이슬”을 결연히 맛보려는 탐미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미당에게 시란 무엇인가?
“시란 것은 진실한 생각, 진실한 느낌, 진실한 표현을 통해 나오는 그 자신의 전인격적 체험에서만 스스로 체득할 수 있고 이와 같이 시를 체득한 시인의 생명의 결정인 작품을 통하여서만 그의 최상의 시 작법을 듣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미당의 시 세계는 여러 차례의 변모를 거치지만 특히 그를 ‘생명파’로 불리게 한 초기 시의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초기 시는 이전의 시문학파나 모더니스트들은 거의 시도하지 못한, ‘생의 탐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제2시집 ≪귀촉도≫는 어디로 가는 여정인가?
≪화사집≫에서 강렬하게 보여 준 악마적이고 탐미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동양의 문화 전통을 중요한 시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카프문학과 모더니즘에 대해 왜 그렇게 강렬하게 반발한 것인가?
1930년대부터 카프문학을 “집요하고도 조잡한 양적 어수선” 혹은 ‘마구잡이’ 문학으로 매도했다. 우익문학-민족문학-순수문학의 논리로 해방기의 좌익문학에 대해 강한 경멸감을 노출했다. 김동리가 ‘메커니즘의 시’로 규정한 모더니즘 시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감을 거듭 표출했다. 이념과 시류에 조잡하게 편승한 현대시의 ‘아수라장’을 타개할, 보다 고차원적 문학 질서의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아수라장을 타개할 고차원 문학 질서의 증거가 <귀촉도>인가?
<귀촉도>는 고국 촉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한 충신의 원혼이 새가 되었다는 귀촉도의 애절한 전설을 상상의 원천으로 해서 임과의 이별과 죽음이라는 모티프를 노래한 작품이다. 설화에 대한 관심은 이후 발간된 중기 시는 물론 후기 시까지 관통하고 있으며,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 그리고 모더니즘 시에 대한 비판 의식 속에서 정밀한 논리로 구체화한 그의 전통론과도 맞물려 있다.
1955년에 발간된 ≪서정주 시선≫은 어디에 위치하나?
“초기 시와는 사뭇 달라진 화해나 관조”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한계를 긍정과 정화로 승화시킨” 운명애, 따뜻하고 정감 어린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시와 후기 시를 이어 주는 고리에 해당한다. 이 시집에 드러난 시 의식은 후기 시로 이어지는 ‘영원주의’나 ‘화해’의 밑거름이 된다.
중기 시의 불교적 세계관은 이제 어디를 향하는가?
연기(緣起)나 윤회전생 같은 불교적 인식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온 신라로 이어진다. ≪신라초≫ 이후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신라의 설화를 바탕으로 동양적, 불교적 정서를 시화(詩化)했다. 불교는 미당의 중기 시만이 아니라 후기 시까지 관류하는 기본 사상이 된다. ≪삼국유사≫ 같은 고전에서 촉발된 시적 상상력을 통해 한국적인 전통을 작품에 담아내려 했다.
서구 시의 규율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온 한국 근대시의 역사와 모더니즘 시에 대한 문제 제기인가?
시인은 “우리의 태반이 외래 조류의 잡음 속에서 귀머거리가 되어 있”고 “또 다른 한 개의 아류법(亞流法)을 이조(李朝) 아닌 현대에 세우려고 탐색하고 있”음을 탄식한다. 서구의 문화적 표준이 관통하고 있는 근대문학 성립 이후, 주변성을 감수해야만 했던 한국 문학이 현대에 와서도 서구 모더니즘의 아류가 되어 있음을 조소한다.
그 돌파구가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 신라적인 것인가?
“시의 지성이니 감성이니”를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서구의 문예 전통과 달리 한국의 시는 ‘고향’과 “한국의 정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적 신화의 세계, 즉 ≪삼국유사≫뿐 아니라, ≪삼국사기≫, ≪수이전≫ 등의 민간전승 설화나 불교의 연기 설화, 민속적인 이야기를 적극 시로 형상화했다.
신라와 불교의 세계가 깊어져 ≪동천≫을 보게 되나?
단아한 형식미학 또한 초기 시보다 더욱 원숙해진 시인의 시적 역량을 잘 보여 준다.
<국화 옆에서>를 불교의 연기로 해석하면 어떤가?
처절하게 울어 대는 봄날의 소쩍새와 소낙비를 몰고 오는 여름날의 천둥소리, 가을밤의 서리가 모두 국화꽃을 피우는 데 작용해 꽃이 피어난다. 마찬가지로 ‘누님’의 원숙미는 인생의 아픈 경험과 세월이 만들어 낸 관계의 실타래들, 더 넓게는 국화꽃을 피게 한 우주적 인연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불교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후기 시의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신화적인 원형과 토속적인 풍속에서 시적 상상력의 근거지를 찾는다. 신화나 원형은 현실과 역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상속된다. 시인은 인간의 삶이 가진 갖가지 양상들을 통해 역사의 근원을 보고자 했다. 이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신화나 전설, 설화 등에 대한 강렬한 천착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전통과 토속이 신화 공간으로 확대되었다는 뜻인가?
전통에 대한 관심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 나라의 신화, 전설, 민요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인의 향토적이고 소박한 삶과 세계 각지의 민속적 풍경과 삶을 더듬으며, 갖가지 애환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영원의 의미로 읽어 내고자 했다.
≪질마재 신화≫가 미당의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집의 발문을 쓴 박재삼 시인은 “이 시집은 그분이 시단 생활 40년에 쌓은 대가적 풍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 평했다.
대가의 풍모와 샤머니즘 사이에 어떤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누렸던 삶”을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이야기 형식으로 내보인다. 이러한 시 세계는 ≪떠돌이의 시≫도 비슷하다. <당산나무 밑 여자들>에서 당산나무 밑 여자들의 성적 능력은 느티나무에 깃든 신비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나무 신앙을 가지고 있던 한국의 샤머니즘적 주술과 토속적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질마재 신화≫에서 정형시를 실험한 것은 어떤 의도인가?
정형시’가 전근대적인 것으로 폄하되는 풍토에서 전통 운율을 형상화의 핵심 요소로 활용함으로써 민족 정서를 시 속에 깊이 담아내고자 했다. 정형률에 대한 실험은 자유시로 제도화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포착이자 전통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그의 문화적 역사의식의 반영이다.
≪떠돌이의 시≫, ≪늙은 떠돌이의 시≫, ≪80 소년 떠돌이의 시≫에서 떠돌이는 누구고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영원한 자유를 추구하는 떠돌이 의식이다. 고백체, 이야기체, 대화체, 육자배기 가락 등을 폭넓게 활용해 “표현상의 새 매력”을 추구했다. 내용도 신화적 상상력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질마재 신화≫와는 달리 현재적 현실과 일상의 이야기를 영원 속으로 용해시킨 변화의 양상을 보여 준다.
그의 문학 노선이나 친일 행적과 관련한 비판은 옳은가?
정치적 행적과 문학은 분리해서 논의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미당의 시를 매도하는 것은 민족 문화의 손실이다.
서정주의 시집은 많다. 이 책은 뭐가 다른가?
좋은 책들이지만 원본과 다른 표기들이 종종 눈에 띄고 때로는 심각한 오기도 있다. 미당의 시를 원본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원하는 독자나 연구자들을 위해 이 책을 엮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시를 고르고 정리했는가?
가독이 힘든 부분도 있었고 사전이나 방언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미당만의 표현이나 한자도 적지 않았다. 미당은 대단한 시론가이기도 했기에, 그의 문학 세계와 맞닿아 있는 논리의 줄기를 해설하는 데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미당 시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이 많이 음미하면 좋겠다. 특히 문학 연구자들에게 좋은 학술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허혜정이다.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다.